[해방신학]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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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교회
  • 한상봉
  • 승인 2017.05.2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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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2강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하나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 외침은 하늘을 꿰뚫고 점점 더 커지면서 모든 시대에 강한 경고를 전한다. 그것은 정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고난 받는 사람들의 외침이다. ... 이 외침이 점점 커지고 강렬해져 때때로 많은 위협을 받는다. 현재의 상태는 불의이다.”(푸에블라문헌, 87,89,90)

사회정의의 신학적 기초

교회는 1891년에 레오 13세 교종이 <노동헌장>을 발표한 이후 줄곧 이른바 ‘사회교리’를 선포해 왔다. 그중에서 특히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문헌인 <세계정의>(1971)에서 주교들은 이렇게 천명했다.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행위에 동참하는 것은 복음의 온전한 구성요소로 보인다. 즉, 인류의 구원과 모든 억압적 상황에서의 해방을 위한 교회 사명의 구성요소인 것이다.”(6항)

“복음은 ‘세상의 정의를 위한 요구’를 포함한다. 이것이 교회가 사회, 국가,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의 상황을 비난할 권리와 특히 의무를 지닌 이유이다.”(36항)

주교들이 ‘사회정의’ 활동을 교회의 복음선포에서 ‘구성요소’라고 말한 데 주의해야 한다. 이는 사회정의 활동이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자칫 신앙과 정치를 혼동할 위험을 사전에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정의’ 활동이 ‘의무’라고 적시함으로써 복음선포의 필수사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주교라 할지라도 사회정의에 대한 무관심은 직무유기이며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오로 6세 교종은 <현대의 복음선교>(1975)에서 “교회는 그 대부분이 영적 자손인 수백만 인류의 해방을 선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교회는 이 해방을 도와주고, 그 편에 서서 증언하며, 해방이 성취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동참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복음선포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30항)라고 정의실현 활동을 거듭 ‘의무’라고 강조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회정의의 성경적 기초

<세계정의>는 구약과 신약에서 사회정의 활동의 기초를 제공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서 자기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는 피억압자의 해방자로, 그리고 가난한 자의 보호자로 계시된다. 오로지 정의에의 의무를 준수할 때에만 진실로 하느님은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자로 인식된다.”(30항)

구약에서 하느님은 두손 모아 비는 사람들이나 번제물을 바치는 사람들, 그리고 금욕주의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정의의 행로에서 만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정의로운 것을 추구하고,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는 것”이다. 예수 역시 종교적 규칙의 준수보다는 정의, 자비, 믿음 등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사랑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이지만, 그 사랑은 정의실현을 전제로 하는 “정의로운 사랑”이다. 그래서 주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랑은 실상 이웃의 존엄성과 권리를 인정하는 정의의 요구를 포함한다. 정의 그 자체는 사랑에서만 완성을 본다. ...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의는 분리될 수 없다.”(세계정의, 34항)

해방신학에서 고백하는 하느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자칭 ‘유신론자’라고 강조해 온 지배층이 강요해 온 하느님은 부정되어야 한다. 그들은 실상 돈, 권력, 물질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이며 주교였던 페드로 카살달리가(Pedro Casaldaliga)는 이렇게 노래했다.

“네가 법을 말할 때, 난 하느님을.
네가 평화, 정의, 사랑을 말할 때, 난 하느님을.
네가 하느님을 말할 때, 난 자유, 정의, 평화를 말하리라.”

하느님은 거룩한 말씀 속에 ‘기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거기에 자유와 정의, 사랑의 실재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있는 하느님이 아닌 우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예수로 강생하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예수가 공심판의 종말론적 발언에서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그분에게 해 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그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그분에게 조직적 폭력을 행사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예수가 거부했던 황제권력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푸에블라의 주교들에게 말한 것처럼, 예수는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 루카가 “가난한 사람들아, 저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6,20)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정확한 해석은 “가난한 사람들, 너희는 행복하다. 불의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 너희는 행복하다. 정의, 행복, 그리고 평화의 왕국인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가난을 통해 구체화된 불의와 폭력에 하느님은 분노하신다. 사회적 불의는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며, 여기에 응답하기 위하여 하느님은 직접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이 예수 강생이다. 하느님이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더 신앙심이 깊고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불의한 권력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징조는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공동체 생활뿐 아니라 각자의 인생에서도 행복에 참여하고, 기꺼이 압제에 대항함으로써 그들의 존엄성이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

종교적-정치적 환원주의를 경계함

교회는 종교적 환원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환원주의도 경계한다. 바오로 6세 교종은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교회는 마치 인간의 현세적 문제에 무관심한 듯이 종교적 영역에 그 행위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34항)고 했다. 이런 종교적 환원주의는 교회를 거룩함과 거룩한 행위 속에 가둔다. 그러나 하느님은 교회 안에도 밖에도 자유롭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다.

한편 정치적 환원주의는 사회변혁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게 한다는 환상을 갖게 만든다. 사회변혁은 하느님 나라와의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 왜곡되고 또 다른 억압을 낳는다. 그래서 정치적 태도 역시 늘 복음에 비추어 늘 새롭게 판단되어야 한다. 그래서 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정치를 초월함과 동시에 그것을 꿰뚫고 떠맡는다.”

영화 <로메로> 중에서

정의, 그리고 정의를 위한 투쟁

‘정치’처럼 애매모호한 말이 없다. 그래서 기성교회나 반동세력은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이 모호성을 이용한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라고. 그러나 정치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란 더러운 것, 거짓말, 대중선동을 뜻한다. 그것은 ‘정치모리배’라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부패와 조작, 그리고 특정 정치집단의 갈등을 포함한 좋지 못한 정치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시민사회 안에서 정치와 무관하게 살 수 없으며, 정치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정치의 병리현상’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푸에블라 문헌>(1979)은 “교회가 정치영역에 참여해야 하는 필연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서 흘러나온다”(516항)고 했다. 정치는 그리스도의 ‘권위’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마음과 영혼, 교회 같은 작은 영역에서만 ‘주님’으로 고백되지 않는다. 그분은 정치적, 사회적, 우주적 차원의 주님이시다. 특별히 예수는 ‘정의’와 상관이 깊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 하느님의 통치 영역 안에는 ‘정치’영역이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정치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교회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방법이며, 세상을 비성역화하는 방법인 동시에 세상을 성역화하는 방법이다.”(푸에블라 521항; 교회헌장 34항)

하느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신성시된 정치권력의 신비를 걷어내고,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신앙행위는 사실상 정치행위이기도 하다. 이처럼 교회는 복음의 비전 속에서 개인과 사회, 정치와 경제 등 삶의 모든 분야에 걸친 재구성을 요청하는 ‘복음의 정치학’을 선포한다. 실상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의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만인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며, 정의의 성취는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들려드리는 행위이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종의 <팔십주년>(1971)은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타인에게 봉사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임무를 삶으로 수행하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최선의 방법이다.”(46항)

<푸에블라 문헌>에서 주교들은 정치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대문자 P로 시작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Politics)는 “평등과 자유를 공공권위 및 합법적 자율성에 적용시키고, 전체공동체의 기본적 가치를 명백히 하며, 모든 개인과 집단의 참여를 명백히 한다. 또한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수단과 윤리를 명시한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정치는 교회의 관심대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종인 사제들까지 함께 관심을 갖아야 한다.”(521항)

교회는 사회적 불의에 맞서고 분명한 착취를 바라보면서 침묵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있을 수 없다. 명백한 불의 앞에서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발언하거나 아니면, 침묵으로 지배권력에 동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푸에블라 주교회의는 정치적 무관심이나 공동선과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 부족을 공식적으로 비판하였다.

“교회는 신앙의 영역을 개인이나 가족생활에 제한시키거나, 죄악, 기도, 용서, 사랑이 직업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질서와 아무 관련이 없는 듯이 여기는 사람을 비판해야 한다.”(515항)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미가 없는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인 자신들이나 심지어 사제와 교회 관계자들에게서 비롯된 교회의 조작극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조작은 비록 그것이 발각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기존 질서와 뒤얽히며 타락하게 된다.”(558항)

보프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신자들을 이끄는 것은 복음의 조작과 불구화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정치적 차원까지 포함해 인간생활의 총체를 복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푸에블라 515항) 보프는 특별히 미사와 강론에서 이런 복음적 정치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일 우리의 설교와 강론이 정의와 형제애, 사회참여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또 폭력을 규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는 복음을 왜곡하고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소문자 p로 시작되는 좁은 의미의 정치(politics)는 정당활동 등 국가권력의 획득과 행사를 통한 사회개혁이나 행정에 상응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교회 전체가 아니라 일부 평신도가 참여한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참여가 실효성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의식만으로 부족하다. 사회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회과학 등 분석도구를 확보해야 하며, 조직을 통하여 희망을 성취해야 한다. 여기서 교육은 필수적이다. 바오로 6세 교종은 <팔십주년>(1971)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푸에블라 문헌>은 그 교육이 ‘정의를 위한 교육’이나 ‘해방의 교육’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교들은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처럼 일종의 ‘의식화 교육’을 강조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교회 지체들의 책임 배분

<푸에블라 문헌>과 <세계정의>에서 인권과 인간존엄성을 ‘선포하고’ ‘장려하고’ ‘촉진하고’ ‘옹호하는’ 것은 교황과 주교와 사제, 부제에 이르는 교계제도의 책임이다. 물론 교도권이 사회적 사안에 대하여 세밀하고 직접적인 방법을 일일이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고, 사회적 현실을 복음에 비추어 판단하는 역할은 당연한 책무이다. 또한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일 역시 교도권의 몫이다.

한편 바오로 6세 교종은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Evangelica Testificatio, 1971)에서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마주하도록 초대한다. 바오로 6세는 “이 부르짖음은 너희들이 어느 형태의 불의든지 용서하지 못하도록 한다. 복음과 교회에 나타나는 비참한 드라마와 정의의 요구를 깨닫도록 너희의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18항)고 말했다. <푸에블라 문헌>은 수도자들이 정치 분야의 복음화에 협력해야 하지만, 정당정치에 개입하려는 유혹은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친다.(520항)

<푸에블라 문헌>에서는 평신도들이 활동하는 장소가 ‘세상’이며(789항), 평신도들은 “정의와 공동선을 고무하기 위한 진지한 동참에서 제외될 수 없다”(793항)고 말한다. 평신도는 적절한 이데올로기와 전략으로(524항) “정당을 기초하고 조직하는 것”(524항)을 포함해서 당 지도권에 참여해야 하며(791항), 다만 “복음정신과 교회의 사회적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물론 평신도들이 행동하는데 늘 주교와 사제의 지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이며, 평신도의 존엄성과 ‘신앙 감각’에 의존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 감각(Sensus Fidei)이란 세례를 통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실천을 파악하고 그에 동의하며 잘못된 것을 배척하도록 해 주는 복음적 진리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본능’이다.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Sensus fidei in the Life of the Church, 2014,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에서는 이 신앙 감각을 키우기 위해 평신도들이 △교회 생활의 참여(전례와 성사, 기도, 봉사 등) 하느님 말씀의 경청 △이성(理性)에 대한 개방 △교도권에 대한 신뢰 △성덕(겸손ㆍ자유ㆍ기쁨) △교회 성장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한다.

한편 주교들은 “평신도들의 연대의식을 예시해 주어야 하며, 그들의 일치와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어야 하며, 그들이 공동선과 약자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도록 창조성을 자극해야 한다”(푸에블라, 525항)

한편 평신도들은 신앙과 복음의 차원에서 볼 때 아무 정당에나 가입할 수는 없다. 복음이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어떤 정당에는 가입하면 안 된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있을 수 있다. 그 기준을 <푸에블라 문헌>에서는 이렇게 적시한다. 전체교회는 복음과 피억압자의 외침에 충실이 응답해야 하므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고려되어야 한다. 도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혁을 추구하는 총체적 해방의 관점에서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은 교회와 함께 걷고자 하는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을 인도한다. 어느 정당이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가? 어느 정당이 총체적 해방에 가장 많이 공헌하는가?

<푸에블라 문헌>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피억압자의 편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어려움을 감수하고, 해방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방을 시도하는 것이다.”(푸에블라, 327항)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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