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례, 하느님의 혁명적 보살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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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 하느님의 혁명적 보살핌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5.0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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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의 사회적 의미-2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과월절 기간에 성찬례를 세우셨다. 과월절은 에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대민족의 큰 축일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유대민족의 축일에 더 깊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넓히셨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보다 잘 알아듣기 위하여는 유대민족의 과월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에집트의 학정으로부터 해방된 유대민족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역을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아우성을 쳤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 살펴 주셨다” (출애 2,23-25).

사진=한상봉

하느님의 계약

하느님께서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는 내 백성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고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해방이란 단순히 사회사업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또한 억압적이고 불의를 자행하는 에집트인들과 파라오의 구차한 선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430년 동안이나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장자는 태어나기만 하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극도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선택하신 구원과 해방의 방법은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하느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에집트왕은 단단히 몰아 세우지 않는 한 너희를 내보내지 않을 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내가 손수 온갖 놀라운 일로 에집트를 칠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야 그는 너희를 떠나 보낼 것이다”(출애 3,19-20).

하느님의 이러한 결정적이고 혁명적인 보살핌 앞에서 이스라엘인들은 투덜거리고 사막을 통과하는 긴 여정동안 불평을 일삼았다. 그러나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느님은 그들을 지켜주셨다. 이스라엘인들은 안식일을 제외하곤 다음날의 양식을 위해 만나를 남겨둘 수 없었다. 즉 그들은 필요한 만큼만 받았다. 그것은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평등에 바탕을 둔 선물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속에서 사막을 지나가야만 했다. 약속하신 땅에 데려다 주시리라는 희망 속에서 온갖 예측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견뎌내어야만 했다.

하느님은 이처럼 당신 백성의 역사에 깊게 개입하셨다. 하느님의 왕국은 역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 백성의 고통과 싸움에 깊게 관여하는 왕국이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에 참여햐야만 했다. 단순히 선의와 기도, 설득만으로는 해방을 이룩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로 싸우면서 나아가야 했다.

에집트로부터의 유대인들의 해방은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가 해방되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성찬례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당신 백성과의 계약을 이행하셨던 이 구약의 중심적인 사건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취하셨던 획기적이고 단호한 역사에의 개입과 이스라엘 민족의 투쟁행위를 기억하는 것이어야 한다.

불의한 제사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예언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명한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었다. 특히 실제 생활 안에서의 사랑과 정의에 관련없는 형식만의 예식을 단죄하는 것은 예언자들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러한 텅빈 예식들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예언자들은 말하고 있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너희가 나를 보러 오는데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내 집 뜰을 짓밟으라고 하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라히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 1,11-17).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 내가 기뻐하는 단식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 58, 4-8)

미가 예언서에서 주님은 악을 일삼는 자들의 기도와 예배를 철저히 거부하신다. 특히 미가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상을 강력하게 단죄하였다.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들은 들어라. 무엇이 바른 일인지 알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따르는구나!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남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 그런데도 야훼께서 부르짖는 너희 기도를 들어 주실 성 싶으냐? 그렇게 못된 짓만 하는데 어찌 외면하시지 않겠느냐?”(미가 3, 1-3)

이러한 죄상과 불의는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불의한 자들의 예배와 봉헌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미가 6, 6-7)

미가 예언자는 정의와 참다운 예배를 하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 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미가 6, 8)


[출처]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원출처] <하나되어> 1988년 8월(제19호)~1989년 6월(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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