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베트남 남자아이가 혼자 남겨졌다. 이유는? 그의 부모가 아마도 죽임을 당했거나, 납치를 당했거나 수용소에 갇혔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적을 피해 달아나다가 매복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난민선을 탔다가 바다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혹은 저런 이유로…. 여하튼 그들의 아이는 혼자 남겨졌다. 텅 빈 미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아이의 두 눈을 보면서 나는 어둠의 세력에 짓밟히는 수많은 아이들의 눈을 본다.
이 작고 여린 아이에게는 잡아주고 안아주고 입맞춤을 해주고 달래줄 이가 필요하다. 이 아이에게는 강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의 손길과 다정한 어머니의 속삭임, “너는 참 아름다워”라고 말해주는 이들의 눈길이 필요하다. 이 아이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무섭거나 혼란스러울 때 달려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이 아이가 편안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고, 고통을 이해받고 두려운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누가 이 아이의 발바닥을 간지럽혀 줄까? 누가 그의 손을 꼭 잡아 줄 것인가? 누가 그의 뺨을 비벼줄 것인가?
아이는 연약한 채로, 외롭게 잊혀진 채 거기 있다. 자신들의 미래를 장담 할 수 없게 된 인류에 의해 아이는 버려졌다. 전 세계 곳곳에서 아이들이 폭력, 전쟁, 부패와 인간 고뇌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그들은 사랑과 음식에 굶주려 있다. 시설의 찬 방에 앉아서... 누군가가 관심을 보여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낯선 이들과 잠을 잔다. 그들은 대도시의 거리를 방황하며 혼자 또는 작은 무리를 지어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전 세계에는 이런 아이들이 수천, 그렇다, 수만 명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아이들을 통해 타락한 인류의 자화상이 가장 여실히 우리 눈앞에 놓이게 된다. 그들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버려지고 홀로 남겨져서,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잃었음을 일깨운다. 이 아이들이 자라 나이가 들어 미래를 책임질 남자과 여자가 될 때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필사적으로 복수를 위해 총을 들게 될 것인가? 정신병원의 창살 뒤로 물러나 평생 긴 침묵을 지키며 살게 될 것인지, 아니면 위험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서 살게 될 까? 테러리스트, 갱 두목, 마약 밀매업자, 매춘 알선업자, 아니면 창녀?
어쩌면 모든 인간적인 조작을 넘어서고 그 뒤에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어떤 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부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눌려 넘어지셨다. 그분은 계속해서 넘어지신다. 예수님은 단호한 결단력과 강철 같은 의지로 고통을 이겨내는 영웅이 아니시다. 아니, 하느님의 아이로 마리아의 아이로 태어나셨고, 양치기들과 현자들의 사랑을 받으셨던 분은 자신만만하고 태연하게 인류를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신 지도자가 아니셨다.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된 후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어 참회를 구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던 남자와 여자들의 대열에 합류하셨다. 당신의 마음에 깊숙이 남는 목소리를 들으셨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그 목소리는 그분이 사는 내내 함께 했고, 온갖 고통, 시기, 분노와 복수로부터 그분을 보호하였다. 그분은 항상 아이로 남으셨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예수님은 인간적인 고뇌의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 아래 넘어진 무죄한 아이다. 힘없고, 약하며 아주 상처받기 쉽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고 또 우리 안에도 있는 모든 아이들을 껴안는 하느님의 연민어린 마음이라는 신비와 접촉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내가 이룬 모든 성과와 성공과는 딴판으로 그 뒤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조건 없는 사랑을 갈구하며 울고 있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내 안의 아이와 관계를 잃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 그리고 그분에게 속하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잃는다는 것임을 알고 있다.
내 안의 이 아이와 만날 때마다, 나는 나의 무력함과 누구도 나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주지 않아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과 맞닥뜨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안의 아이를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도저히 통제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일으켜 세워져 안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를 위해 십자가 아래 쓰러지셨다.
버림받은 아이들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속에서 그 아이들과 대면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내가 세상의 모든 거부와 버림받음의 느낌 너머에 사랑, 진실한 사랑, 영원한 사랑, 사람이 되시어 그분의 아이들을 절대로 홀로 남겨놓지 않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발견하기를 원하신다.
출처_ <예수님과 함께 걷기 십자가의 길>,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