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에서 소유를 행사하는 것은 가난을 거스르는 죄이다. 회칙은 여기에 대해 매우 단호하다: 수도승들은 그들 스스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각자에게는 수도원에서 필요한 것이 주어지기 때문에 아무도 필요한 것들이 부족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그 자신의 개인 소유로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처음부터 어떠한 독점적인 소유권의 표시가 나타나기만 해도 이 악덕은 뿌리뽑혀야 했고, 잘라져야 했으며, 근원에서부터 제거되어야 했다. 베네딕도는 매우 명확하다: 이것은 중대한 악덕이고 그는 이 중대한 악덕에 걸맞는 공격을 하는 것이다. 소유하고, 축적하려는 욕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욕망은 하느님에 대한 경험을 위해 그가 항상 열려 있도록 하는 내적인 빈틈을 가득 채울 것이다.
가난보다 중요한 가난의 정신
가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의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베네딕도 수도자들이나 시토수도자의 삶에서 비참한 가난이란 없다. 충족은 있으나 과잉은 없다;
식량의 마련에 표현되는 관심과 그것을 제공하는 방식은 물질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베네딕도의 존경과 경의를 보여준다. 식량과 옷은 시골 주위에 있는 농장노동자들의 기준들과 실천에 근거하였다. 수도원에 머물기를 원하는 방문 수도자에게 물었던 질문이 이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발견한 것에 만족하는가? 베네딕도는 ‘만족’이란 단어를 이 장에서 두 번 되풀이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있어 꽤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초기공동체의 모범이 언제나 그들의 마음에 있었다. 만물을 공동으로 가지고 지혜롭게 쓰기 위하여 이 세상의 재화를 나누는 것, 그것들을 기쁘게 쓰는 것은 모든 선에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에 대해 열려 있는 표시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다른 모범은 사막의 교부들과 사도들이나 성 바오로의 모범이었다. 베네딕도는 손노동의 생산품에 의지해서 사는 그의 수도승들을 마음에 그렸다. "우리 교부들과 사도들처럼, 자신의 손노동에 의해서 살아가야만 진정한 수도승이다."
손노동이 기도와 만날 때
첫번째 시토 수도자들이 회칙 본래의 개념에서 보았던 철저한 단순함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을 때, 그들은 특히 손노동의 역할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왜냐하면 12세기경에 베네딕도 회원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 같다. 한 역사가는 이 시기쯤에 그들 가운데 ‘공동작업’으로 된 들이나 정원일에 관해서 한 마디 언급도 찾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십년 동안 베네딕도 수도자로 지내다가 그 후 클레르보로 가서, 거기서 추수하기 위해 한낮의 열기 속에서 스스로 진력하는 ‘그렇게 지혜롭고, 고귀하고 온화하게 키워진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 그들 자신들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소유권을 벗어버리면서 가난과 거친 옷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텔라의 이삭이 강론에서 지적한대로, 고용된 노동을 거부하면서 그들은 ‘하인들이나 소들의 땀보다 우리 이마의 땀으로 우리의 빵을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평신도형제들이 있다해서 일상 매일의 손노동(monachos laborando vivat)이 성무일도를 낭송하는 수도승들로부터 제외되지 않았고, 추수 동안 수도승들은 추수하는 들판에서 돕기 위해 부속농장에 나갔다. 치즈로 유명한 수도원 원장인, 앙드레 루프는, 오늘날 시토 수도원 공동체에서의 일의 위치에 관해 쓰면서 일이 치유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을 ‘정상상태의 보증’(건전하고 균형된 형태로 사용될 때)이라고 불렀고, 매일의 삶의 현실에서 아주 멀어진 잘못된 영성 속에 빠져들고 있는 지원자에게 ‘어떤 물질을 갖고 당신은 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땅, 찰흙, 나무, 물, 금속, 치즈나 초코렛- 수도승은 이 단순한 물질을 매일 그 자신과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렇게 하여 현실과 계속 접촉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느님의 손에서 나오고, 땅에서 나와 땅에 굳게 뿌리 박혀 있고, 그리고 땅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는 이그니의 게릭에게서 좋은 말을 계속 인용하고 있다:
"일은 짐인데, 그것은 마치 배가 무게를 실은 것과 같이, 마음이 조용해지고 위엄이 실린다. 또한 그 안에서 사람의 바깥쪽은 굳은 기초와 안정된 상태를 발견한다."
일과 기도가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면서, 육체와 영혼은 조화롭게 합쳐진다. 여기에 한 사람의 전체를 치유하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총회보고서에서 다시 인용하자면 일과 기도의 통합의 목적은 ‘수도승의 전체 삶을 일치시키고 단순화시키는 것으로, 온전한 단순함 속에서, 그리고 어린이와 같은 기질로 깊게 계속적으로 하느님을 숨쉬게 하는 습관을 수도승에게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시토 수도회 생활의 가장 친밀하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계속적인 기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도는 언제나 휴식을 취하지만 결코 게으르지 않은 생활에서 흘러나온다. 이그니의 게릭은 성모승천축일에 그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강론으로 결론을 맺는다:
"따라서 모든 것 속에서, 심지어 일 속에서도 나는 휴식을 추구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비로운 진리를 보게 되는데, 오늘날의 세계를 위하여 시토수도회의 생활이 주는 가장 가치 있는 선물들 중의 한가운데서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 내가 이 장의 앞 부분에서 인용한 베르나르드의 이 구절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Tranquillus Deus tranquillat omnia:
고요하신 하느님은 우리 안의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하신다."
머튼이 이 구절을 인용했을 때 그는 시토 수도자의 단순함이 가장 완벽히 표현되고, 모든 것을 ‘무한히 단순한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침묵과 기쁨 속에 담기게 하는 그런 관상의 고요함 안에서 일치와 평화’로 바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어느 옛 수도원의 경구는 한 사람이 수도원 회랑을 청소하는 도중에 어떻게 기도하는지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일상의 일에 대해 영적인 일과 매일의 현실 사이를 양분해서는 안된다. 나웬은 처음에 이런 일치에 대해 아주 저항했으며, 도서관에서 기도에 대해 읽고, 혹은 여전히 더 잘 기도에 대해 쓰고 있을지도 모를 때에, 빵 제조소에서, 뜨거운 일렬의 빵 위에서, 혹은 시냇물에서 새로운 소성당을 위해 강 밖으로 바위들을 끌어내는데 보내는 시간을 얼마나 많이 원망했는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그는 ‘나의 일을 더욱더 나의 기도의 한 부분으로 만들 수 있고 단순히 초조한 때로 만들지 않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의아스럽게 생각하였고, 요한 에우데스 밤베르거 수도원장과 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수도승들, 특히 더 나이든 사람들이 손노동을 정말로 즐긴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계속 손노동을 기도로 만들기 위하여 분투하도록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후에, 수도생활의 통합이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전례와 영적 독서와 함께 손노동도 모두 기도의 필수적인 측면들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손노동이 기도가 될 수 있는가? 우리의 손으로 일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일할 때 그것은 기도이다... 손노동이 더 이상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치지 않고 기도하는 우리의 소명을 더 이상 온전히 실현시키지 못할 것이다.’
금욕주의와 일의 특성
그러나 일에는 어떻게 하느님이 땅을 벌하고, 살기에 필요한 열매를 땅에서 맺도록 하기 위하여 어떻게 아담과 이브에게 일이 부여되는지 말하는 창세기에서 앙드레 루페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또다른 측면이 있다.
일은 죄 이후 세상에 퍼진 고통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일에는 이중적인 징표들이 있다. 그것은 일의 가혹한 면이고,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땅과 순환하는 계절에 토지의 활동에 가깝게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에 대해 낭만적일 수 없다. 끼어 들고 새싹을 잘라내고, 종종 거의 잔혹한 방법으로: 땅에 밭고랑을 깊이 파고; 과일나무의 새로운 생장을 얇게 잘라 내고; 잡목 숲에서 어린 생장을 자르고; 양털을 깎는 등. 공동체 내의 사목적 책임에 대해 사람들에게 연설하면서, 돌셋과 소머셋 사이에 아름답게 펼쳐진 시골에 살면서, 포르드의 요한은 깎아내는 것과 열매맺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알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난과 인내로 나를 깎기를 소망하여, 그래서 내가 그에게서 가난과 헐벗게 되는 것을 배울 수 있으려면... 그러면 그는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먼저 실행해야 한다. 만일 그가 방해없이 깎으려고 한다면, 먼저 그 자신부터 깎이도록 해야 한다."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 말인 금욕주의의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금욕주의는 시토 수도자의 전체의 삶에 가장 필수적인 부분을 이루었다. 금욕주의의 어원을 보면 단순히 훈련, 연습을 의미한다. 그것은 초기 몇세기 동안에는 문제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왜냐하면 수도생활에 불가결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과도한 고행들이 거대한 영적인 성취로 여겨지는 성향이 생겨났으므로,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바실 페닝톤이 그 자신의 시토 수도자 경험 속에서 자기부정의 의미를 전해주었을 때, 나는 그 의미가 다음의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을 발견한다:
만일 우리가 참회와 자기부정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가 이것들(예를 들면, 일상생활에서 인간적인 갈등과 잘못 되어 가는 일들)을 잘 다루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수난과 일치하며 그것들을 봉헌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획안에서 고통과 십자가의 가치를 진정으로 소중히 여길 때, 일상의 생활과 노동의 과정 중에서 일어나는 것에 우리가 전적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더 많이 하기를 원하고 더 많이 하기를 추구한다. 성 베네딕도가 말하듯이, 우리는 단식(우리가 얼마나 많이 축제를 사랑하든지 간에)과 철야(우리가 얼마나 많이 베개를 사랑하든지 간에) 그리고 수도생활의 다른 모든 실천들을 사랑하게 된다.
시토 수도회의 금욕주의 전통이 지니고 있는 진지한 주의는 여러 가지 뛰어난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금욕의 목적은 변모이다. 그것은 개인의 역량이나 능력과는 아무관계가 없다- 그것은 은총에, 활동 중에 있는 은총의 작용에 열려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에 이르게 한다.
이 금욕주의의 문제는 우리에게 다시 침묵의 주제와 그것이 시토 수도자의 삶에서 하는 창조적 역할을 상기시킨다. 나는 앙드레 루페가 이에 대해 했던 매우 도움이 되는 말을 발견했다:
"침묵의 금욕주의는 어떤 다른 소음이 없이 하느님을 들을 수 있는 곳인 존재의 심연 속에서 침묵, 비움을 창조해야 한다. 침묵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 내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된다. 그것은 우리의 가난에서 생겨 나오고 우리의 풍부함으로부터 분출된다. 침묵은 우리 내부의 비움에서 솟아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유롭게 그리고 완전하게 받아들여진 비움이다...
침묵 홀로 우리마음 속의 비범한 풍요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때가 온다. 그런 침묵은 한 사람을 온화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껴안고 언제나 내부에서 나온다... 그것은 침묵하는 사람의 주위에 평화와 고요의 지대를 세운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거역할 수 없게 현존하신다고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수도원 내부의 이미지로 다시 되돌아간다.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기 위한 비움의 장소이고, 그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올 다른 모든 것을 위한 상황을 제공하는 숨김없음과 단순함의 자리로.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