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표의 책인 요한복음서의 초반부 전체를 통하여 요한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주님이 되시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분은 어둠과 맹목, 무지함과 오해, 증오와 두려움, 허기와 갈증, 아픔과 질병을 극복하신다. 제 11장에서 드디어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존재가 생명을 갈구하는데 있어 궁극적인 장애를 극복, 승리하심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죽음까지도 이기신다: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 자체이시다.
라자로를 일으키신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요한 특유의 것인데, 주님께서 만유의 주님이시라는 요한 특유의 이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인간적이면서도 신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님에게는 당신이 무척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분의 마음은 죽은 오빠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 졌고 그분이 라자로의 무덤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왜 당신이 무덤에 왔는지도 아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의 힘이 당신 안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궁극적인 징표를 주려고 오셨음을 아신다.
요한 복음서 앞 부분에 나오는 대화와 같이 여기 나오는 대화도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 깊게 밝히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1-26)
예수님은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은 생명을 아주 실제적으로 알게 되어 죽음마저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생명을 우리 안에 갖는 것은 죽음 뒤에도 그 생명이 계속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였을 때 이것을 믿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말로 이것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마리아는 그녀의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요한 11,27)
마리아가 그들과 동행하고 두 자매는 예수님을 라자로가 묻힌 곳으로 안내한다. 무덤은 삶을 마치 죽음과 같이 만드는 무감각, 차가움, 경직됨 등을 상징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 받아들여지기를 청하실 때 다가가던 죄이다. 하느님의 양이 없애 버리려고 온 세상의 죄다. 그래서 예수님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덤입구의 돌을 치우라고 하신다. 어둠 속에 그분은 빛을 비추시고, 그분의 생명으로 죽음을 이겨내시려고 오셨다.
그분이 자신의 힘으로 돌을 치우지 않으신 것을 주목하라. 물론 그분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었지만 그분은 생명을 주는 기적에 다른 이들도 동참하도록 초대하신다. 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그분은 그분의 신성에 관한 아주 강력한 징표를 주려는 바로 그 순간에도 다시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무덤 속에 있는 사람에게 외치신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1,43-44)
무덤에서의 예수님의 상징적인 행동을 아주 능란하게 묘사하면서 요한은 여기에서 주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으나 그분에게 우리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이들의 공동체가 백성을 억누르고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돌을 치우는데 기꺼이 동참하지 않으면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 이것이 교회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세상의 어둠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진실을 위해 인류를 해방시키는 일에 예수와 함께 동참해야 한다.
요한이 이해하고 있는 기쁜소식은 단지 예수님과 나만의 관계에만 그리스도인들이 불림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만을 맺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과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 안에서 다른이들도 포용해야 한다. 비록 예수님께서 모든 무덤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신다고 하더라도 오직 우리만이 그분을 위해서 돌을 치울 수 있다. 그분은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원하시나 우리만이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끈을 그분을 위해 풀어줄 수 있다.
공동체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하나 더 부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복음의 힘은 지배가 아닌 협조, 독선이 아닌 취약함에 바탕을 둔 상호관계 안에서 주로 느껴진다. 예수의 치유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개인들의 부서짐을 치유하는 관계 안에서 아주 강하게 경험된다.
제12장에서 징표의 책은 끝나는데 공동체가 아니라 고립으로 끝난다.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서 행하신 징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라고 그들을 초대한 삶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기쁜소식을 들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들 같이 그들은 주님의 영광 대신에 세상의 영광을 선택한다. 그들은 생명으로 다른 사람과 결합하는 대신 혼자 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들은 어둠의 당사자와 함께 고립된 운명에 처하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세상의 빛임을 드러내실 준비를 하신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2,31-32, 46)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