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강도들의 소굴이 된 성전을 폐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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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강도들의 소굴이 된 성전을 폐쇄하다
  • 한상봉
  • 승인 2017.02.2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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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2강 : 월요일 성전정화 사건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2강 : 월요일 성전정화 사건]

*동영상은 강의 1부는 문제가 생겨 2부 강의만 올립니다. 

성주간 월요일에 발생한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학자들은 이 사건이 단순히 성전 ‘정화’에 그치지 않고 성전을 폐쇄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세 콤블린은 <나자렛 예수>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스스로 종교적 경신행위들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또한 제자들의 경신행위에 대해서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예수는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경배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는 종교적 의식(儀式)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었고, 그의 제자들도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예수가 예배의식을 행하였다는 사실은 복음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성전에 갔을 때도, 그는 말씀을 선포하고 장사꾼들을 내쫓았을 뿐이다. 그가 성전에 간 것은 희생제사를 바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성스런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음송(吟誦)기도를 바치기 위함도 아니었다. 예수는 자신의 소위, 활동무대로서 성전을 이용하였다. 성전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성전은 파괴될 수 있는 것이었다(마르13:2). 왜냐하면 성전은 새로운 계약의 성취를 위해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당신들이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옵니다... 과연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될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예배하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요한 21-23)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만한 정황이 있었던 것일까? 과연 예수는 월요일에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분이 전통적인 예언자들처럼 ‘정의 없는 경신행위’를 타박한 것일까?

마르코 복음은 성전정화 사건 앞뒤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삽입했다. 이런 방식을 ‘마르코의 샌드위치’라고 부르는데,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예수의 난데없는 저주 한 마디로 이튿날 제자들은 뿌리까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발견해야 했다. 본래 무화과는 5-6월에 열매를 맺는데, 당시는 아직 이른 철이었다. 나무에겐 잘못이 없는데, 이 이야기는 무화과가 성전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은유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당혹스러운 일로 남는다.

예수의 성전 정화, 야코프 요르단스, 1650년경,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성전의 구조와 관행

예루살렘 성전은 하부도시의 달리 정갈하고 빛이 가득찬 광장에 마련되었다. 바깥 이방인의 뜰은 월경 중인 여성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었다. 평소 사람들은 이곳에서 토론도 하고 거래도 한다. 예수도 초대교회도 이 장소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이곳에서 환전과 희생동물의 매매가 이루어졌다. 성전은 성소로 이르는 ‘대로’가 없이 미로처럼 만들어졌으며, 거룩함과 정결함의 수준에 따라서 들어갈 수 있는 공간마다 겹겹이 담이 쳐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성전 심장부인 지성소로 곧장 이어지는 직통로를 원하지 않았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부정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아내를 데리고 두 번째 뜰로 들어갔다. 세 번째 뜰은 깨끗하고 정결한 유대인 남자만 들어갔다. 네 번째 뜰에는 제사장의 옷을 입은 제사장만이 들어갔다. 지성소에는 특유의 옷을 갖춰 입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성전은 이방인, 유대인 여인, 유대인 남자, 제사장, 대제사장 순으로 위계를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조직 중 하나였다. 매년 제국 전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성전세를 거둬들였고, 하루에도 수 천 명씩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희생제물과 헌물을 판매하여 이윤을 남겼으며, 십일조도 거둬들였다. 이른바 성전은 은행처럼 ‘부유한 사람들의 유동자산 창구’로도 사용되어, 그들은 성전에 자산관리를 맡기며 얼마간의 대가를 지불했다. 즉, 성전은 예배 장소일뿐 아니라 동시에 ‘유대의 중앙은행’이었던 셈이다. 또한 성전은 여리고 근처에 농장도 소유했다.

성전세는 20세 이상 유대인 남자는 누구나 성전유지를 위해 1년마다 반 세겔(2데나리온)씩 내는 세금이다. 예수 당시 제사장들의 ‘면세’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전세를 ‘두로의 화폐’인 세겔로 낸 데에는 로마의 은전에 황제와 제국의 승리를 드러내는 상징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겔의 앞면에는 멜카르트(헤라클레스) 신이 뒷면에는 ‘가장 신성한 두로’라는 글귀와 함께 두로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과연 티베리우스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형상보다 이방신들의 형상이 더 나은지 의문이 생긴다. 닉 페이지는 <가장 길었던 한 주>에서 “세겔이 통용되었던 이유는 두로의 세겔이 은이 평균 90% 함유된 더 나은 은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세겔은 ‘종교적 선택으로 포장된 상업적 결정’이라는 게 닉 페이지의 생각이다. 한편 환전상들은 대제사장과 성전 관리자에게 인가를 받아서 상업행위를 했다.

성전에서는 새벽과 일몰 때에 각각 양 한 마리씩 번제를 바쳤는데, 희생제물로 시작해 희생제물로 마감하는 셈이다. 유대인들은 명절을 기념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흠결없는 짐승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성전의 동물매매는 호황을 누렸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최저임금인 1데나리온이었고, 능숙한 서기관의 하루 품삯은 2데나리온이었다. 당시 하루 두 끼를 배불리 먹을 정도의 빵을 사려면 1데나리온의 1/12이 들었다. 노동자 하루 임금 중 식비가 1/12라는 말이다. 동물 가격은 때때로 달랐지만, 통상 송아지는 20데나리온, 숫양은 8데나리온, 새끼양은 4데나리온이었다. 비둘기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선택하는 제물로 1데나리온이었다.

그러나 유월절 같은 명절에는 이 희생제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 <미쉬나> 기록에 따르면 비둘기 한 쌍의 가격이 25데나리온까지 오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명절을 지내려고 제국의 변방에서 며칠 걸려 달려온 이들은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순례를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 동물들을 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희생제자 자체가 아니라, 희생제물로 사야하는 동물의 값이 얼마이며, 거기에서 누가 이득을 봤느냐는 점이다.

성전경제는 시장경제가 아니었다. 제국 안에서 유대인들은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성전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이런 종교적 백성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애착을 담보로 돈을 벌어들인 자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귀족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누추한 공동주택에 살면서 먹고 살려고 몸부림치지만, 정작 성전에서는 ‘순한 양처럼’ 비싼 값으로 비둘기 한 쌍을 구입해야 했다. 그래서 닉 페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고, 교회와 예배당도 언제나 종교의 이름으로 그들을 벗겨 먹을 것이다.”

예수와 강도의 소굴

마르코복음은 예수가 이방인의 뜰에서 거래하는 자들과 환전상들과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 둘러엎으셨다. 상행위를 방해한 것이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제사행위를 막은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성전경비대나 로마군인들에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상징적인 수준의 작은 소요였다. 이는 마치 예레미야 예언자가 가죽끈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고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조언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성전에서 행해지는 합법적인 제사활동과 상업활동을 예수가 가로막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뿌리까지 말라죽은 무화과 나무처럼, 성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성전정화가 아니라 ‘성전폐쇄’를 요구했다. 예수는 성전이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어야 하지만, 지금은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예레미야 7장 11절과 마르코복음 11장 17절의 그리스어에서 ‘강도’는 ‘레스테스’(lestes)다. 이 말은 곧 ‘노상강도’, ‘산적’ ‘반역자’ 또는 ‘제도적 통제에 대한 폭동’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비판한 이유는 먼저, 성전을 둘러싼 경제적 독점권력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다. 가난한 이들의 등을 치고 로마와 협잡하고, 성전을 ‘부당행위의 전당’으로 뒤바꾼 곳이 성전이다. “정의 없는 예배”를 강요함으로써 하느님 이름으로 하느님을 능멸하는 곳이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부분은 요세푸스처럼 70년 예루살렘 멸망을 지켜본 마르코 복음사가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은 헤롯이 세운 성전이 무너진 뒤에 저술되었다. 33년 경의 예수는 여전히 예루살렘이 그래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마르코에게는 이미 성전이 만민에게 열려있는 집이 아니었다. 67년~70년경 예루살렘은 유대교 귀족정치에 저항하는 반란군 요새였으며, 결국에는 로마군의 공격에 저항하는 요새가 되었다.

사진출처=northsidebc.org

유대전쟁

66~74년까지 벌어진 유대전쟁은 참혹했다. 헤롯이 지은 성전은 성소인 동시에 성벽 도시 안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전쟁은 로마총독 플로투스가 유대인의 공물을 충당하는 성전금고의 돈을 취하려고 한 사건이 빌미가 되었다. 열심한 유대인들이 총독에 맞서싸워 결국 총독과 로마군대를 예루살렘에서 축출했다. 이때는 68년 네로황제가 죽고나서 세 명의 황제(갈바, 오토, 베스파시아누스)가 등장하면서 로마정국이 혼란스러웠을 때였다. 젤롯당을 비롯한 반란세력에 귀족들과 하급제사장들이 결합하면서 사태가 커졌다. 제사장들은 로마황제를 위해 매일 두 차례 봉헌하던 희생제사도 중단했다. 로마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겠다는 시위였다.

이들은 시리아 12군단의 봉쇄를 격파함으로써 사기가 높아져, 이윽고 귀족세력과 규합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각 지역에 지방관을 임명하여 자체적인 통제아래 치안을 유지하였다. 또한 군대를 훈련시키고 로마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예루살렘을 요새화하였다. 그러나 67~68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10군단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면서 갈릴래아, 이두매, 유대 등 각 지역이 방어선이 무너졌다. 베스파시아누스가 69년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의 아들 티투스가 10군단을 이끌고 두 번째 침공을 재개하였고, 예루살렘은 무너졌다.

70년 4월 티투스가 도시를 포위하기 직전에는, 유월절을 지내려고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약 10만 명을 웃돌던 예루살렘 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한 상태였다. 반군들은 분열되어 권력다툼을 하다가, 결전을 앞두고 21,000명의 전사가 결집하였으나 로마정규군에 맞서기에는 불가항력이었다. 그해 7월 하순, 네 달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티투스의 군대가 새벽에 성전 공격을 명령했다. 성 안에는 일부 광신적인 종교적 열심당원들이고 일부는 약탈꾼들이었지만 대부분은 거대한 죽음의 함정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무고한 민간인들이었다.

당시 성벽 주변에는 생지옥 같은 끔직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가 햇볕 아래 썩고 있었고, 악취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개와 자칼이 인육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티투스는 지난 몇 달 동안, 매일 500여 명의 죄수나 탈주자들을 십자가에 처형했기 때문에 올리브산과 바위산에는 십자가를 더 이상 꽂을 수 없을 만큼 빼곡했다. 예루살렘 함락 당시 로마군의 조직적 파괴로 성전은 완전히 무너졌다. 서쪽 벽 일부만 재외하고 성전의 잔해들은 성전 옆의 골짜기로 버려졌고, 그것이 상부도시와 하부도시 사이의 골짜기를 메웠다.(예루살렘 전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시공사, 2012 참고)

사진출처=bible.ca

성전을 넘어서..랍비 유대교

바리사이 가운데 파괴적으로 분출되는 폭력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던 세력이 있었다. 랍비 힐렐의 제자가운데 손꼽히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그는 유대인이 로마에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에 반대했다. 유대교의 보존이 정치적 독립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관속에 숨어서 열성당원의 눈을 피해 예루살렘을 몰래 빠져나왔다. 로마군영에 가서, 그는 로마원정대장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남서쪽 해안의 야브네에서 살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성전이 파괴된 뒤, 야브네는 향후 60년 동안 성전 없는 ‘랍비 유대교’의 본산이 되었다.

“당신 자신에게 혐오스러운 일을 다른 이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 가르치므이 핵심이며,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오”라고 말했던 랍비 힐렐의 추종자였던 야브네의 랍비들은 황금률, 동정심, 사랑, 환대를 이 새로운 유대교의 중심적 가치로 삼았다. 성전이 파괴될 무렵 바리사이파의 일부는 이미 하느님을 섬길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어느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다. 랍비 여호수아가 그 뒤를 따르다 불에 탄 성전의 폐허를 보고 “이스라엘의 죄를 씻던 곳이 황폐해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랍비 요하난이 말했다. “슬퍼마라. 우리는 성전만큼 값진 참회, 자비로운 행위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소. 경전에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헤세드)이지, 제사가 아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환대가 미래의 핵심 가치라고 여겼다. 공동체가 사랑과 존중 안에서 통일될 때 하느님은 그 공동체와 함께 있지만, 서로 싸울 때는 천사들이 ‘한 목소리와 한 선율’로 노래를 하는 하늘로 돌아가 버린다고 했다.

서기 132년 로마인에게 죽임을 당한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토라의 가장 위대한 원리라고 가르쳤다. 랍비들은 누가 되었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며, 무신론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살인은 신성모독이었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교양인, 2006)에서 랍비들은 하느님이 태초에 오직 한 사람을 창조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온 세상을 없애는 것과 똑같으며,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라는 말했다고 한다.

사진출처=dailymail.co.uk

성전을 넘어서..그리스도교

한편 예수의 사촌인 시몬이 이끌던 예루살렘의 소규모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로마인들이 닥치기 전에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 마르코 복음을 전한 공동체 역시 이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유대인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천상의 예루살렘을 기대했으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다.

예수 사후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었다. 랍비 유대교처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여겼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북부 갈릴래아 출신이었지만, 예수가 죽고난 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나라의 도래를 기다렸다. 이 예수운동의 지도자가 12명인 것은 새로 구성될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매일 성전에 모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냈다.

이들은 신실하고 정통적인 유대인처럼 살았다. 에세네파처럼 이들은 사유재산 없이 공동소유하고 종말을 기다렸다. 예수는 자발적인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 보호를 원했으며, 이들과의 연대를 가족과의 연대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악에 대처하는 방식은 비폭력과 사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금을 내야하고, 로마 정부를 존중해야 하며, 무장투쟁은 거부되었다. 토라를 중심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동시대의 랍비 힐렐처럼 “너희는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팔레스타인의 사마리아, 가자와 같이 종교적으로 불안한 지역에 먼저 선교했다. 그들은 유대인 추종자에게 먼저 선교했지만, 경건한 이방인들이 더욱 관심을 가졌다. 베드로는 로마군 주둔지인 가이사랴에서 전도했으며, 바나바는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했다. 안티오키아는 예수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까지 교회를 설립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던 야고보는 혼란스러워했다. 특히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소아시아 전역에 걸쳐 교회를 세우도록 독려했다. 히브리서 저자처럼 예수가 ‘토라’의 지위를 대체했고, 희생제사는 예수의 희생행위에 대한 암시라는 급진적인 견해도 내놓았다.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탄 채 악취를 내뿜는 돌덩어리가 된 것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묵시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 사건으로 유대교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복음서들은 성전 파괴 이후에 집필되었는데, 모두가 격동기의 두려움을 근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마르코복음은 예레미야와 이사야 예언자의 말대로 성전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곳이어야 했는데, 성전은 이런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이방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언자들의 예언을 수용했다고 보았다. 정통 유대교와 갈등을 빚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는 토라의 위대한 스승”이며 “예수는 예언서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유대교와 갈등을 빚으면서 환멸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요한 묵시록에 와서 유대교와 결별할 태세를 완전히 갖춘다.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과 요한복음서는 이방인에 대한 선교라는 강박을 더 크게 느끼게 되고, 예수의 처형의 책임을 로마보다는 유대인에게 돌렸다. 특히 마태오복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격노했다. 그들은 ‘위선자’이며, ‘눈 먼 인도자’이며, ‘독사의 자식’들로 여겨졌다.

왜 그랬을까? 성전 파괴 이후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 힘을 모은 첫 집단이었다. 다른 중요한 경쟁자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0년대와 90년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새파가 ‘랍비 유대교’를 통해 놀랍게도 부흥하기 시작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당시 발흥한 랍비 유대교의 사상과 그리스도교는 너무나 닮았다는 점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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