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구원의 의미를 표현하는 다양한 프레임들이 있다. 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다. 해방으로서의 구원 프레임은 기원전 13세기의 이집트 탈출 이야기와 관련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 그들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주인이었던 이집트 파라오 치하에서 노예로 살았다. 하느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내세워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이집트 탈출은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 광야에서의 생활,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집트 탈출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해방 체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이해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삶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매년 파스카 축제를 통하여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억하고 거행하였다.
해방으로서의 구원 프레임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첫째, 경제적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은 착취당하고 가난하였으며 턱없이 부족한 배급을 받고도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둘째, 정치적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은 아무런 힘도 목소리도 가질 수 없었으며 체제에 대하여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셋째, 종교적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세상에 대한 열정을 가진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현실을 정당화하였다. 이와 같이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측면을 가진다.
이집트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사회적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스라엘은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고 약속의 땅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것은 해방된 백성으로서 다른 생활 방식, 즉 대안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이 그저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듯이, 이스라엘에게 땅이 주어진 것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곧 이스라엘에게 있어 땅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다. 토지는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인간은 단지 청지기로서 그것을 사용할 뿐이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 어느 성에서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신명 15,7-8)
하느님의 선물인 땅은 평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사람 수에 따라 땅을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어라. 수가 많은 지파에게는 상속 재산을 많이 주고, 수가 적은 지파에게는 상속 재산을 적게 주어야 한다. 각 지파에게, 사열을 받은 이들의 수에 따라 상속 재산을 주어야 한다.”(민수 26,53-54)
그런데 땅을 선물로 받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유혹을 만나게 된다. 주어진 땅은 새로운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한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잊고 채무자, 가난한 이, 종들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며 다른 신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가능성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노예로 만들었던 제국적 질서를 의미했다.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은 이스라엘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구원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안에 새로운 이집트가 다시 만들어져서는 안 되었다. 사실 이집트 탈출 이후 약 1세기 동안에는 이스라엘에서 임금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억압과 착취는 왕권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기원전 1000년경에 왕정이 시작될 때에도 임금이 새로운 파라오가 될 것이라고 반대한 의견이 있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분 이외에는 다른 임금도 주인도 없었다. 사실 왕정시대에는 여러 예언자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과 그 구원적 의미에 기초하여, 임금들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임금들은 이스라엘 안에 이집트를 다시 만드는데 책임이 있는 새로운 파라오들이었기 때문이다.
송창현 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