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과 약간의 결을 달리하며 생애동안 노동운동이 사회 변혁을 위한 큰 줄기라는 것을 확신했고 노동자와 농민들과 끝까지 연대했다. 대표적인 예로 캘리포니아로 계절 이주노동을 하며 착취와 노예적인 조건에 처한 농민들이 조직 활동을 하는데 다년간 참여 하였다.
도로시 데이는 단지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 존엄을 회복하고 인격적 삶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에 농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장거리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행진을 하며, 미사를 올리며 그곳에 그들과 함께 머물렀다. 그녀가 살아 낸 삶의 행적들은 그래서 사회운동을 하는 오늘날의 활동가들에게 분야를 초월하여 강렬한 영감을 주고 있다.
카투만두에서....이주노동의 문제
최근 카트만두에서 노동조합이 주최한 기자 회견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연인 즉, 레바논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조직 활동을 하던 여성 활동가들이 구금과 강제 추방을 당한 것이다. 담담히 자신들이 겪은 과정을 밝히는 이 여성들은 10년이상 가정부로 일했다 한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집안 일’, 그것은 사적인 공간인 개인 집에서 하게 된다. 자신의 가족을 떠나 딴 가정의 개인 집에서 가사 노동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루의 일과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동석자 중의 한 명으로 만 9년 레바논에서 일했다는 한 여성은 아랍어는 물론 불어와 영어에 능통하였다. 그 언어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곳, 비록 강제 추방을 당했지만 자신이 살며 일해 온 레바논으로 여전히 돌아가고 싶어 하는 긴 머리의 멋쟁이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을 찾아 이동하는 사람들의 행진이 지구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이주’문제는 전 지구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가혹한 가정부들의 노동 환경
추방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당한 이 여성들이 조직 활동을 통해 성취하고자 한 것은 ‘합당한 대우를 받자’는 것이다. 레바논에만 만 명 이상의 네팔 여성들이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는데, 레바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중동 근동의 여러 나라들에 두루 퍼져 일하고 있다.
공장도 아니고 농장도 아닌, 아파트나 주택이 일터인 여성들에게 합당한 노동조건이란 무엇일까? 그들이 호소하는 내용을 보면 그들의 주장이 보인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 진다는 것이다. 계절이 가는지 오는지, 오늘이 수요일인지 일요일인지 구별 할 필요조차 없이 반복되는 일에 묻혀 지내게 된다.
그렇게 바깥 세상과 소통을 잊은 채 지내다 보면 기계적으로 일은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에 장애가 될 만큼 심리적 정서적 타격을 받게 된다. 일부는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고 한다. 게다가 여성들이기에 폭력에 항시 노출되어 있고 폭력으로 사망 사건이 발생해도 흔히 자살로 보도되곤 한다는 것이다. 감금이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일하고 월 이백오십 달러 남짓 되는 임금을 받는다.
얼마전 우리 장학생 아유스가 중동으로 일하러 간다 하였는데 음식점에서 일하게 될 아유스가 받을 월급과 비슷한 금액이다. 이렇게 여성들은 적은 월급에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조건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필리핀이나 이디오피아에서 온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과 힘을 모아 조직 활동을 하여 온 것이다. 인간이 이동할 자유를 잃게 되면 그건 그자체로 감옥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매일 공항으로 나가는 네팔 여성들
그럼 이 기자 회견을 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활동가가 될 수 있었을까? 단지 재수가 좋아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주인을 만나서였을까? 그렇기도 하거니와 현지에 나가 어떻게 해서든 이 노예적인 상태에 처한 여성들을 조직하려는 파견된 노조원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인의 눈치를 보며 겨우 바깥출입을 하게 된 여성들은 여러 문화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거기서 서로 은밀한 접촉을 하였던 것이다. 결사 혹은 조직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아랍권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그래도 레바논은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 한다.
만 명이 넘는 네팔 여성들이 레바논에서 일하는데 비밀 결사체처럼 시작된 권리 찾기 운동에 동조한 여성들은 불과 칠십여명이었다고 한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노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운동의 싹이 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추방당하여 귀국하게 되었으니 이제 거기서의 운동은 다시 원점을 돌아가 시작해야 한다. 좌절되었지만 그래도 싹이 움 터 올랐던 적이 있기에 처음보다 나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인력 송출로 그들이 송금해 오는 돈으로 나라 재정의 상당액을 충당하고 있는 네팔은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 면에 있어서 필리핀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정부와 정부 사이에 해야 할 일들이 때로는 너무 개인들에게 맡겨져 삶의 무게를 더욱 짓누르고 있다.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할 국가는 보내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거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교육에 이어 자주 일간지에 등장하는 이슈가 이주 문제인 걸로 보아 네팔 정부도 뭔가 하려는 의지는 있어 보이지만 막상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돕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정부가 아닌 민간 혹은 노조와 같은 단체들이다.
매일 공항에서 해외로 일하러 나가는 네팔인들은 어림잡아 약 1,500명에서 2,000명 가량이라고 한다. 그중 한국으로 가려는 젊은이들이 오늘도 한국어 능력 시험에 응시하려 곳곳에서 성업 중인 한국어 학원을 찾고 있다. 만 명에서 수천명이 매년 한국으로 간다. 한국어 능력 시험을 통과한 젊은이들로, 그들에게도 레바논의 여성들과 매 한가지인 고용허가제의 독소 조항인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발생하게 될 문제들이 닥칠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 이주민 정책으로 이주민들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부추기고 있기에 더욱더 어떤 경로로 국경을 넘어 갔던 한 개인의 문제에 우리는 눈을 감고 침묵 할 수 없을 것이다. 도로시 데이의 원칙 중 하나였던 가톨릭 아나키즘에 대해 더욱 숙고해 보아야 하는 이유다.
기자 회견을 마치고 돌아 와 한국에서 ‘밥 먹다 말고 잡혀가는’ 이주민들의 처량한 처지를 담은 뉴스를 접하며 삶의 끝자락을 붙잡고 사는 이들에게 주님의 돌보심이 함께 하길 청해 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주님께서 지금도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바치는 이들을 돌보시기를.
이금연 세실리아
국제 가톨릭 형제회 (AFI) 회원
네팔 환대의 집 'Cana의 집'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