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생명으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면 궁극적으로는 보상을 받으나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다. 요한복음 제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3-54)
성체성사의 신비, "그냥 받아 들여라"
생명의 빵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이 긴 이야기는 예수님 생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라기 보다는 초기교회의 관심을 반영하는 요한복음서 구절의 하나인 듯 하다. 하지만 요한은 주님의 가르침을 안다. 요한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해주신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임을 안다. 요한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이 복음서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요한 시대에 성체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고 느꼈던 사람들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 가르침에 직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어, 누가 이런 것을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라고 말하는 이 이야기 속의 사도들과 같을 수 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말은 영적인 것이니
생명이다." (요한 6,63)
즉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당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신비를 받아들여야만 그분이 말씀하시는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보아라, 이 신비를 이해할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원하니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라. 내가 이 빵과 술을 너에게 줄 때 내 자신을 준다는 것을 네가 믿기를 바란다. 네가 그렇게 믿으면 그것을 설명 할 수 있든 없든 너는 내가 성체 안에 정말 현존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설명하느라고 너무도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나 그 신비를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날 누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신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신적 신비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가 어떻게 성체 안에 현존하시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문제다. 우리는 하느님의 문제를 풀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빵을 부수고 술을 나눌 때 우리에게 현존하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일단 그렇게 하면, 일단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믿으면, 우리는 하느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된다.
하느님,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고 살아내야 할 신비
동양에서와 달리 서양문화는 신비를 다루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서양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어느것이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철학적 편견이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가 있거나,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풀려야 할 문제가 아니고 살아내야 할 신비이다. 신비란 흩어놓았다가 다시 짝을 맞추는 퍼즐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번에 아주 일부만 만져볼 수 있는 엄청난 진리인 것이다. 우리는 이 신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그 신비의 어떤 측면을 알아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신비와 만나도록 해야하며, 그 전체 그림을 다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된다. 우리는 결코 신비를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를 내어주어 그 신비에 우리가 사로잡히도록 해야 한다.
선물을 받기 전에 그분께 승복하라
성체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선물을 정말 받고 싶으면 앞서 말한 받아들임, 승복이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타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 만일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그저 “예”, “준비되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65)
여러모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 중 몇몇은 그 정도의 자기포기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아신다. 그들은 아직 그 정도 깊이의 신앙심에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들이 그분을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이들도 그들과 합류했다. 그들이 예수님 없이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시는 그분의 눈에 슬픔의 빛이 어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요한 6,67-68)
우리들 대부분이 이 기도에 동감 할 수 있다. 가끔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가 무언지 알지 못한다. 종종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실제적이지 못한 것 같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의심이 많고 포기하고 싶다고 고백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직하게 그분에게 말해야한다: 다른곳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그분의 선함을 경험했었다. 그분의 말씀은 전에 우리를 생명에로 이끌었다. 과거에 있었던 은총의 기억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지만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분과 함께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준다.
성령으로 가득 차면...
여러분은 제4장에서 우물가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던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가? 복음서 의 그 부분에서 복음사가는 수수께끼 같은 “생명의 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7장에서 요한은 생명의 물이 바로 성령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 7,37-39)
우리가 성령으로 가득차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경험이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못 느끼더라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갈증과 믿음이다. 그러면 우리가 계속해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실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필요할 때에 생명을 주실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받을 수 있을 때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완벽한 본보기이다. 그분은 늘 용기가 있었고 자신에 대해 확고하셨다. 그분은 항상 당신의 신성과 사명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만일 우리에게 요한복음만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의식을 가지고 성장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근본과 운명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 복음의 예수님은 영광스럽게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부활한 후의 실체의 예수님이시다. 그는 기도 속에서 만나게되는 주님, 성체로 모시게 되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진정으로 실체보다 더 큰 예수님의 형상들로 가득차 있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