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침묵 속에서 "그분은 나의 시작, 그분은 나의 끝없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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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침묵 속에서 "그분은 나의 시작, 그분은 나의 끝없는 끝"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2.2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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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9
사진출처=Ascetic Experience

말씀을 통해서 12세기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다. 회칙의 중심인 그리스도는 시토 수도자 삶의 중심이다. 전례는 본래 회칙이나 수도생활방식과 그 기관 이상으로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전례 자체가 목적이라면, 항상 그 너머 그리스도의 모습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된다.

전례 독서의 전체 순환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삶의 모든 길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모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닿아 있다; 알레드가 성모 몽소승천 축일에 한 강론에서 가르쳤듯이, 땅 위와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전적인 일치를 향하여 질서를 잡고 있는 것이다:

과연 형제들아, 그것은 위대한 선함과 위대한 즐거움이다
그분의 인성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인성대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말하자면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분의 탄생을 보는 것,
그분의 수난,
그분의 상처,
그분의 죽음,
그리고 그분의 부활을.
그러나 훨씬 더 위대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사도들과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육화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이제는 더 이상 이 방법으로 그분을 알지 못할 것이다[고린토후서 5,16].
어떻게 우리 주님이 구유 안에 누워 있었는지 생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지만,
그러나 어떻게 하늘에서 다스리시는지 묵상하는 것은
훨씬 더 큰 즐거움이다,
어떻게 그분 어머니의 가슴에서 길러지는지 생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지만,
그러나 어떻게 만물을 먹이시는지 묵상하는 것은
훨씬 더 큰 즐거움이다,
동정녀의 팔에 안긴 그를 생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지만,
그러나 어떻게 하늘과 땅위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 안고 계시는지 묵상하는 것은 훨씬 더 큰 즐거움이다.

같은 주제가 스텔라의 이삭에 의해 다음의 구절 안에서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그분 자신은 나의 묵상;
그분은 나의 기쁨;
그분 자신을 위해 나는 나를 초월하여 추구한다;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는 내 안에서 키운다.
그분은 그 안에서 내가 수고하는 들녘;
그분은 그것을 위해 내가 수고하는 열매.
그분은 나의 원인;
그분은 나의 결과.
그분은 나의 시작;
그분은 나의 끝없는 끝.
그분은 영원이시다.

만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도록 그들을 도왔기 때문에 그분을 찬찬히 응시하면서 그들은 그분을 알게 될 것이고, 알면서 변화되어 그들은 그분과 똑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호이랜드의 길버트가 젊은 학생인 아담에게 편지를 썼을 때 설명한 대로, 이러한 변화를 위한 상황은 침묵이다:

당신은 우리의 침묵이 의미가 없고 죽은 것이라고 충격을 받는가? 그 속에서 내적인 행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을 새로운 인간, 새로운 아담으로 바꾸고 변화시킴으로써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기술,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지혜의 보화가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올바르게 이르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케 하는 그런 침묵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토 수도자의 삶과 즉시 연관시키는 것이 침묵인데, 그럼에도 침묵에 대해 서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충격은 대단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침묵은 마침기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내내 진행되는 대침묵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충만한 조용한 분위기가 있는 소침묵도 그 필요성이 여전하다. 세인트 티어리의 윌리암은 처음 클레르보에 갔을 때 침묵 속에 살고있는 공동체의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적고 있다:

"산허리를 내려와 클레르보 수도원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여기의 침묵이 낮에도 밤과 같이 너무나 철저하고, 일의 소음이나 하느님을 찬양하는 달콤한 소리 이외에, 들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하는 일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런 침묵의 영향은 너무나 깊어서 그들은 잡담이나 헛된 말들을 삼갈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경건한 침묵을 유지하도록 한다. 아무리 수도승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고 해도, 각자는 혼자이고 고독했다."

침묵은 전율적일 수 있는 방법을 통해 하느님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귀를 기울이기 위해 필요하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허, 우리의 고독, 우리의 동경에 닿는다.’ 바실 페닝톤은 시토 수도자의 삶에 관한 그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글을 썼는데, 그 결과 그는 ‘결국에 수도승들은 하느님이 침묵으로 말씀하셔서 침묵 속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아무것도 정말 말할 필요가 없다. 침묵으로 충분하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시들 중의 하나, <트라피스트의 묘지-겟세마니>에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단순한 몇 줄을 썼다:

"어떻게 입을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시토 수도회 교부들이여,
우리의 초라한 갑옷인 침묵을."

그는 침묵과 고독에 대해 많이 생각하였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 찍혀 있는 침묵. 그것은 우리를 져버리지 않을 것이다.’ 시토 수도회 생활 내내, 머튼은 침묵이 의미하는 것과 침묵이 줄 수 있는 것을 탐구하였다. 여기에서 종종 그는 외면적으로 시끄러운 소음의 세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스텔라의 이삭이 ‘네 마음 속의 분출’이라고 부르는 그에 못지 않은 내면의 아우성의 세계에서도 점점 더 침묵에 대한 갈증을 인식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침묵, 주의 깊음은 우리에게 시간을 두라고 말하며, 폭력 없이 시간을 부드럽게 다루라고 요청한다. 독서에서 그것은 그들이 그들 내부의 감각을 포기할 때까지 말씀에 오래 머문다는 의미이고, 그리고 나서 말씀이 열매맺게 될 때까지 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느긋하고 애정 깊게 잡고 만져라’는 말이 호이랜드의 길버트 시 속에 있다:

잡아야 할 것을 빨리 잡아라,
잡고 만져라
느긋하고 그리고 애정 깊게
생명의 말씀을.
생명의 두루마리를 펼쳐라,
예수께서 펼친 두루마리를,
아니 오히려, 예수이신 그 두루마리를.
그분 안에 네 자신을 감싸라,
그분이 싸여졌던 고운 천 안에 네 자신을 감싸라
그분은 마치 빛이 나는 듯한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복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라.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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