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의 복음서는 예수의 공생활로 시작한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은 직후에 예수는 가릴레아로 가서 선포한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15)
이 짧은 세 구절에서 마르코는 예수님의 초기 가르침을 요약하고 독자들에게 그분이 그들에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날이 오늘이다
첫째로, 그때가 왔다. 구원의 때는 지금이다. 지금이 구원의 시간이다. 구원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가 태어났을 때도 아니고,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도 아니다. 그 시간은 우리가 고백 성사를 할 때도, 우리가 죽을 때도 아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오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결코 듣지 못한다. 지금 하느님 나라에 살든지 아니면 살 수 없다.
둘째로, 그 장소는 여기다. 구원은 우리가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구원을 찾기 위해 거룩한 땅으로 갈 필요가 없다. 구원을 찾기 위해 로마나 교회에 갈 필요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하느님이 통치하시도록 허락하는 곳 어디에나.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를 우선으로 하는 곳 어디에나 있다. 하느님 나라가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아무곳에서도 그 나라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회개하고, 변화하고, 마음과 가슴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야한다. 하느님이 예수를 사랑하신 것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쁜소식을 긍정적으로 믿어야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받아들여짐을 수락하지 않는 한 우리를 구원 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승복 중에 가장 어려운 승복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부름을 받았다
다음에 나오는 짧은 부분은 최초의 제자들을 부르심에 대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들은 즉시 자기들의 일과 가족을 버리고 그분과 합류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내가 계획 할 수 없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론적으로 이러쿵 저러쿵 따질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만나야하고 최초의 제자들과 같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그분에게 응답해야한다. 그렇다 해도 최초의 제자들도 그랬듯이 처음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직후 그분은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병들고, 중풍에 걸리고, 악령 들린 사람들을 고치신다. 때때로 이런 이야기가 본문에서 발췌되어 인용될 때에는 예수께서 하느님이심을 증명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르코는 복음서에서 이전에 대해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그는 왜 제자들이 불림을 받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치유의 능력이 하느님의 아들 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들, 딸들인 우리 모두에게도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처럼, 몸과 영혼이 병든 이들을 돌보고 치유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제자됨은 기적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마르코는 경고한다. 기적을 행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가 하신 일들을 소문내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이 메시아적 비밀의 또다른 측면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기적을 하실 수 있으나 메시아는 그렇지 않다. 종교적 마술사처럼 제자됨은 기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제자가 된다는 것이 결국 십자가까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임을 독자에게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들은 대부분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난다. 예수님의 믿음이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닿고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그분에게 전해졌을 때 그들은 치유된다. 하느님의 권능이 믿음을 통해 발휘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질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함에 승복한다면 악이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마르코는 이 사실을 제6장 앞부분에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 접촉하시는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있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런 기적들이 예수님을 유명인사로 만들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그분이 치유해 주신 사람들은 행복했으나 얄궂게도 그분의 자비하신 행동 때문에 그 지역 당국자들은 그를 마귀로 의심한다. 예수님 생전에 실제로 그런일이 일어났으나 마르코는 이와 똑같은 일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도들은 기적을 행하였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으나 로마 당국자들은 그들을 박해하였다.
원수를 사랑하라,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될수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때때로 갈등을 조장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이 부자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국가 안보의 위협이라고 간주 될 수 있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 국가 경제를 약화 시킨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 능력을 통해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것이 그런 일은 도대체 불가능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맹목적인 도덕감으로 마음이 닫혀진 사람들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정말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그분이 누구이시고 그분의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이 새로운 기적쟁이를 보기를 열렬히 원했으나, 예수님의 친척들은 전혀 다른 시각을 갖는다:
예수께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와서, 그분 일행은 빵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분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서 그분을 붙들러 나섰다. 사람들은 “그분이 정신나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마르코3,20-21)
예수는 미치광이도 코카시안도 아니다
당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비쳤을까 하는 우리의 생각은 복음서의 장면보다는 그리스도교 예술과 심신적인 감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헐리우드 영화는 눈같이 흰 가운을 입고, 머리를 잘 다듬은, 분명히 하느님 같은 아름다운 코카시안 예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돌았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일을 하는 평범한 유다인 예수를 볼 수 있다.
마르코는 다른 복음사가들 보다 예수시대에 훨씬 가까운 때에 그의 복음을 썼다. 그러므로 이런 장면들이 사실에 많이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를 결국 처형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가 이해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겉모습에는 관심이 없었고 더 깊은 실제에 관심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분의 아버지께 충실하는 것과 세상이 원하든 말든 진리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이해해 주기를 원했던 그룹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그분의 제자들이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에서 그분은 알기 쉽게 비유를 사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계속 회개와 치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똑같은 일을 하라고 파견하신다. 하느님 같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치신다. 그리고 드디어 획기적인 질문을 하신다.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를 정말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다(마르코 8,29). 이 부분이 마르코 복음의 첫 번째 절정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의 질문은 열 두 제자 뿐 아니라 복음서를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던져진다. 마르코는 현대의 복음사가들 만큼이나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셨는가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하시는 것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신념을 갖고 거기에 대답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을 그냥 ‘주님’이 아니고 ‘나의 주님’이라고, 그냥 ‘구세주’가 아니라 ‘나의 구세주’라고 인정하는 것은 개인적인 회심(回心)이 요구된다. 그것은 한 개인의 삶에서 혁명적인 전환점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그것은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