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도 지났고, 이제 삼복더위 중에 중복(中伏)이 빤히 보이는 칠월의 하순 초입에 들어섰겠다. 홀연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가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정선 아리랑> 한 구절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빗줄기는 갈수록 괴팍스럽게 오르락내리락하니, 시절을 종잡을 수 없지만, 그래도 이맘때면 농사일도 한시름 놓으며 약간의 휴식을 가질 때가 아니더냐? 휴식은 인간에게나 살아있는 온갖 생물에게는 꼭 필요한 “무용지용(無用之用)”이 아닐까? 말하자면 누구에게는 “쓸모없는 것(無用)”이겠지만, 또 누구에는 반드시 “쓸모 있는 것(有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 가진 자는 “무용”을 이야기하겠지만, 못 가진 자는 “유용(有用)”을 이야기해왔던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하지만 쓸모 있는 것(有用)과 쓸모없는 것(無用)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사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매우 쓸모 있는 존재”라고 여기거나 아니면 “천하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이분법의 논리에 빠져 있다는 것이지. 말하자면 사람은 자신을 두고 “유용”과 “무용”의 간격 앞에서 일종의 해결될 수 없는 “도박”을 벌이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이 이즈음의 생각이다. “쓸모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자는 “쓸모없는 존재” 여기는 자를 비웃거나 짐짓 겸손한 자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확실히 “이분법의 논리”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魅力)이나 마력(魔力)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21세기 현대사회는 “유용”을 무척 “위대한 것”으로 대우해주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좀 더 생각을 넓게 펴보면, “유용”이 대우를 받는 것은, 건너편에 “무용”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무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용”도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무용”이 있어야 “유용”도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지.
한편 “유용한 것”은 “실용(實用)”이라는 가치 외에 아름다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쯤 해서 그 옛날 장자(莊子)라는 사람의 말을 빌려보고 싶다. 그는 “'무용의 가치를 모르면 유용의 가치를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지. 그렇다면 무용과 유용의 가치가 결국엔 다르지 않다는 역설이겠다. 이 역설을 유가에서는 “중용(中庸)”이라 불렀겠구나 싶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쓸모와 쓸모없음 사이, 유용과 무용 사이를 헤매 돌고 있으며, 시대가 바뀌어도 헤매 도는 것은 여전해 보인다. 그렇게 오래도록 헤매고 있지만, 조금의 진보도 없이 탐욕과 교만 사이에서 자신의 숨통만 조이고 있을 뿐이 아니더냐? 일찍이 장자라는 양반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쓸모 있게 사는가, 쓸모없게 사는가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의 저서 『莊子』 「人間世」 편을 통해 물음을 던지고 그 유명한 “상수리나무와 목수 장석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답을 툭 던져 넣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저마다 “귀엽게 행동하는 고양이는 사람에게는 애완동물이지만, 쥐의 입장에서는 먹잇감이 될까 봐 두려운 존재이다.” 또 “그토록 아름답다는 왕소군이나 초선이는 물고기한테는 피해야 할 한낱 인간일 뿐이다.”라든지 혹은 “지렁이는 그녀들의 발에 밟혀 죽을까 봐 빨리 숨어야 할 두려운 인간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각자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고, 구분 짓고, 분별하는 관점 때문에 한편에서 유용함이 다른 한편에서 무용함이 되고, 또한 그 반대가 되기도 하니, 결국 “눈먼 자식이 효도하고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곧 “무용지용” 혹은 “유용무용”의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능력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필요한 법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쓰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능력 없는 사람도 때로는 생각지도 못하게 쓸모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유용하고, 무엇이 무용한가”를 판가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는 “무”가 있어야 하고, “무”는 “유”가 있어야만 가능해지질 않겠는가?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는 차갑게 살 에이는 겨울 날씨를 그리워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유-무논리”를 “돈후(敦厚)”하게 만드는 지혜일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에 빗줄기가 가늘더니 이젠 제법 안동 땅에 억수장마처럼 뿌린다. 이 억수장마도 누구에게는 “무용”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겐 “유용”일 수 있겠다. 마치 “소금 장수와 우산 장수”에 관한 우화처럼 말이다. 딴엔.
신대원 신부
천주교 안동교구 태화동성당 주임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