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부자에게 주는 말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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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부자에게 주는 말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김흥순
  • 승인 2024.05.2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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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칼럼

예수님은 영적인 부자를 원하지 물질적 부자를 원하지 않으신다. 자본주의 부자를 경멸하는 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예수님은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라는 것을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보면 분명히 알게 된다. 

하느님이 돈이 아닌 사람을 모으시고 사랑으로 하늘 나라로 가자고 말씀하셨기에 ‘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사랑’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길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돈·돈·돈으로 무장된 현대 자본주의 돈 인간들은 하늘나라 출입을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다

성경에 부자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다. 오늘은 부자 청년 이야기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켰다. 그러나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 않았다. 곧 사랑을 행하지 않았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 자기를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 하신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신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신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질문,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물음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뒤에 이어진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부자를 하필이면 '낙타'에 비유하신다. 

고대 그리스어 카멜로스(낙타, 약대)는 신약성경에 6번 나온다. 세례자 요한의 낙타 털옷, 예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을 꾸짖으시며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하신 말씀, 그리고 재물 많은 청년이 예수를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눠야 한다는 말을 듣고 상심해 돌아간 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있다.

카멜로스는 히브리어 ‘가말’에서 전해졌다. 구약성경에는 가말이 창세기에 25번 등 모두 54번 나온다. 가말은 그리스어 라틴어를 거쳐 영어 캐멀(camel·낙타, 베이지톤 갈색)이 됐다.

“성경 말씀에서 가장 유익한 건 이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늘 너희 곁에 있을지니’, 그들이 있기에 우린 언제나 자비로울 수 있는 것이지요.”

미국 작가 진 웹스터가 1912년에 펴낸 서간체 소설 <키다리 아저씨> 중 한 부분이다. 주인공 주디가 교회에서 들은 주교의 설교를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로 옮겨 쓴 구절인데, 주디는 이 설교에 크게 불만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주교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가난한 사람들이 무슨 유용한 가축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주디에게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답장 대신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중인 1642년에 후세페 데 리베라가 그린 그림 <내반족 소년>을 보면 성경 말씀을 압축해 놓은 것 같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 흔적이 옛 그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José de Ribera "Lo Spagnoletto" Valencia, Spain, (1591 - 1652).
José de Ribera "Lo Spagnoletto" Valencia, Spain, (1591 - 1652).

스페인의 화가 후세페 데 리베라(1591~1652)의 1642년 작 <내반족 소년>이다. 맨발에 낡은 옷을 입은 소년이 탁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한눈에 보아도 그는 가난한 발까지 굽은 장애 소년이다. 소년은 발이 안쪽으로 휘는 ‘내반족’ 장애가 있는 어린이다. 어깨에 걸친 기다란 목발 없이는 아마 걷기 힘들다. 하지만 소년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가난과 장애의 이중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예수님의 친구들 같다.

화가 리베라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만난 이 소년의 낙천적인 태도에 꽤 감화됐다. 시점을 아래에 둔 채 그려 소년의 풍채를 위풍당당하게 표현한 것만 봐도 그렇고, 귀족이나 왕족 초상화의 배경이 되는 넓고 광활한 풍경을 소년의 뒤에 배치한 것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내반족 소년>은 보통 ‘어려운 환경에도 삶을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그림으로 국내에 소개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의아한 지점이 있다. <내반족 소년>의 세로 크기는 164㎝. 거의 사람 키 높이 그림이다. 과연 리베라는 단순히 가난한 소년의 청청한 생기를 기록하고 싶은 인간애 하나로 이 거대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리베라가 살았던 시대는 17세기다. 순수한 취미로서의 회화가 등장한 근대 이전에는, 그림이란 주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려지던 때였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장애가 있는 남루한 소년의 초상을 리베라에게 의뢰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의뢰자가 누구였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나폴리 총독인 메디나 데라스토레스 공작 또는 나폴리의 스틸리아노 공작이라는 설도 있고, 플랑드르 상인이 의뢰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셋 중 누가 주문했든 그들 모두 부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굳이 목돈을 들여 <내반족 소년>을 주문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가난한 사람의 존재는 부자들에게 천국을 보장하는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마태오복음 19장 24절에 나온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아예 ‘부자는 천국으로 갈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그 옛날 서양 부자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심정이 떨렸을 것이다. 죽은 뒤 지옥 가기는 두렵고, 그렇다고 현세의 안락을 보장해주는 돈도 포기하기 힘들고.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이때 교회는 부자들에게 한 줄기 빛 같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신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으며,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풀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즉 가진 돈 중 약간만 내놓으면 문제없다는 얘기다. 가난한 사람은 주위에 널려 있었기에, 부자들은 천국행 티켓을 사 모으듯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었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계량화돼 나타났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그 증거를 그림으로 남겨 집에 걸어두었다. 리베라의 <내반족 소년>도 그런 ‘선행의 증거’ 중 하나다.

소년이 왼손에 쥔 쪽지엔 보란 듯이 또렷하게 “(당신이) 신의 사랑을 받으려거든 저에게 자선을 베풀어주세요”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다. 당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교육을 잘 받은 상류층뿐이었다. 이 그림의 의뢰자는 자신이 쪽지의 내용을 잘 실현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위선이 판을 치고 있다. 개인의 선도 중요하지만 공동선이 더욱 중요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수 없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신다.

 

김흥순
천주교청년연합회 민주화 활동
민통련 민족학교 1기 아태 평화아카데미 1기
전 대한법률경제신문사 대표
사단법인 세계호신권법연맹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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