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 같은 그 천국엔 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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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 같은 그 천국엔 가고 싶지 않다
  • 김선주
  • 승인 2024.05.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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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한겨레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윤석열 정부로부터 한겨레가 탄압받고 있다고. 구독으로 신문사를 살려 윤석열 정부에 맞설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화가 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한겨레가 독재정권에 맞서는 진보 언론이라고 스스로 생각합니까? 그런데 논조가 왜 그래요?”

1988년 5월, 한겨레가 창간할 때 나는 전역을 7개월 앞둔 해군 병장이었다. 한 달 월급 7,500원, 외박 나가서 버스 몇 번 타고, 소주 한 병에 라면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딱 그만큼의 돈이었다. 서울 대방동 해군본부 작전상황실에 근무할 때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그 돈을 모아 한겨레 주식을 샀다. 외박을 나갔다 돌아오는 친구가 한겨레신문을 사오면 그것을 너덜너덜할 때까지 돌려가며 읽었다. 한겨레는 시대를 읽고 인간과 세계를 향해 순수한 열망을 불태우는 지성의 불쏘시개였다.

유신 정권이 언론을 강압하고 통제할 때 자유언론 실천을 선언하다 해직된 기자들과 전두환 군부에 의해 해직된 기자들이 언론 자유를 위해 만든 신문이 한겨레다.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1인당 주식 소유 상한선을 1% 이내로 제한한 점은 신선한 이슈였다. 우리 같은 말단 사병들이 소주 값을 털어 몇 달치 월급으로 주식을 샀으니 한겨레는 단순한 신문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길을 가다 가판대에서 한겨레신문을 사는 것은 시대를 향해 열린 지성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한겨레는 내가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 지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 같은 것이었다.

 

그런 진보언론이 정치권력의 압제가 사라진 시대에 왜 변색됐는가. 아니, 왜 타락하고 말았는가. 가슴 떨리게 하던 그 신문이 왜 영혼 없는 진보(진보연 하는) 언론이 됐는가. 김상봉 교수는 그 물음과 답변을 자신의 심장을 꺼내들 듯 아프게 꺼내들었다. <영성 없는 진보>라는 책 제목에서 이미 이 시대의 진보, 또는 진보연 하는 세력들의 가장 큰 문제가 영성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성을 종교 언어로 사용해 왔다. 신비적이고 초월적 감각을 영성이라고 교회들은 가르쳤다. 오죽하면 한 대형교회 목사는 ‘24시간 예수만 생각하기’, ‘골방에서 영성일기 쓰기’ 같은 저급한 프로그램으로 영성을 개인의 종교적 감수성 안에서 이해하도록, ‘영성’이란 말을 왜곡시켰다. 한국 교회의 영성에 대한 개념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상봉 교수는 ‘영성’이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굳건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나와 타자가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믿음이 영성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개인은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전체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던져서 희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종교적 영성과 진보운동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수운과 전태일, 서준식을 소환하여 그들의 진보적 사상과 종교적 영성을 조망한다.

<영성 없는 진보>는 부제에 나타난 것처럼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윤석열 정권이 보이는 반민주적인, 퇴행적 행태와 그와 맞서는 진보진영의 태도에서 타자(사랑)에 대한 공감으로서의 사랑의 상실을 본 것이다. 그는 “사랑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진보운동은 타자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공감하는 데서 오는, 전체와 하나 된 그 느낌으로써의 ‘영성’과 관련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1980년대를 지나며 진보운동은 세속화되었고 진보운동에 영성을 제공했던 그리스도교는 보수화됐다.

사랑으로 출발한 진보운동이 당파성을 갖고 권력 투쟁을 하게 되면서 타자에 대한 공감과 자기희생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한탄한다. 뼈아픈 일갈이다. 역사는 다수의 세속화된 무리에 의해서 추동되는 게 아니라 전체와 하나 되었다는 느낌으로써의 영성을 가진 소수의 예언자적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변혁되고 발전되었다. 저자가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며 자신이 유물론자임을 굽히지 않았던 서준식에게서 예수의 영성을 확인한 건 오늘 우리의 진보 진영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시켜도 그것이 단절이나 소외가 아니라 부활이며 생명이 될 수 있는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이 진보의 영성이다. 진보에서 심장의 떨림과 영혼의 파장을 못 느끼는 것은 그들이 영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일, 노동절에 가두행진을 하며 피킷을 들고 수많은 구호를 쏟아내는 노동조합 연맹원들에게서 아무런 감흥을 못 느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 시대의 잘 나간다는 교회들에서 느끼는 감정도 그와 같다. 나 혼자 열심을 내어 은혜 받고 구원받는다는 분열된 자아들은 역사에 대한 믿음도 책임감도 없기 때문이다. 24시간 예수만 생각하고 나 혼자 골방에서 영성일기를 쓰는 것으로 가는 천국이라면, 그것은 천국이라는 이름의 고시원 쪽방일 것이다. 영성 없는 천국, 쪽방 같은 그 천국엔 가고 싶지 않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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