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모린은 도로시 데이와 함께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이며, 이 운동의 예언자적 특성을 유지시켰다. 모린은 1877년 5월 9일 남프랑스의 랑그독 지역의 한 소작농가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생활의 단순함, 경건함,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는 교육수도회였던 ‘그리스도인형제회’(Christian Brothers)에 입회하였다. 모린은 공동체생활을 잠시 접고 1898년부터 2년 동안 군복무를 하면서, 종교와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다. 1902년 프랑스 정부가 많은 종교계 학교들을 폐교시키자, 피터 모린은 수도회를 나와 ‘그리스도교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가톨릭 평신도운동 조직인 르 셀롱(Le Sellon)에서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1908년 이 운동이 점점 정치적 색채가 강해지자 환멸을 느껴 조직을 떠난다.
1909년 그는 징병제가 없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2년 동안 캐나다 서부 서스캐처원에서 농사를 짓다가, 이후에는 캐나다, 그리고 미국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수로를 파고, 돌을 캐고, 밀을 수확하고, 목재를 자르고, 선로를 놓았다. 그는 벽돌공장, 제철소와 탄광에서도 일했다. 때때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생필품을 얻기도 했다. 한때 방랑자라는 이유로, 또는 기차표 없이 열차에 오르다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였다. 피터 모린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1932년 뉴욕주 북부에 있는 가톨릭소년단 야영장에서 잡일을 하며 식사를 제공받았고, 지도신부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축사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이어갔다.
복음적 사회질서를 고민하는 예언자
한편으로는 교회문헌과 교부들의 사상을 탐구하고 다른 한편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피터 모린은 가난이야말로 하느님에게 받은 ‘선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소박하게 생계를 유지할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공부하고 기도할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들을 통해 복음의 기본가치들이 서서히 스며든 사회질서, “사람들이 선하기 쉬운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꼴을 갖추게 되었다.
일이 허용하는 한 종종 그는 뉴욕 바우어리 가에 있는 값싼 여인숙에 머물며,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길에서 만난 관심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스스로 거리의 사람이었고, 생기 있고 통찰력이 있으며 유머감각이 뛰어난 교사로서, 그 거리에서 청중들을 찾아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공공복지>(Commonweal)라는 잡지 편집자인 죠지 슈스터다. 그가 피터 모린에게 당시 기자이며 가톨릭 개종자였던 도로시 데이의 주소를 건네주었다. 모린이 도로시 데이를 찾아간 것은 1932년 12월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피터 모린을 단지 한 명의 길모퉁이 예언자로 보았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모린을 보자마자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모린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도로시 데이는 그때 막 자신의 재능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원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모린은 도로시 데이를 중세 개혁가이며 평화 협상가였던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인과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모린은 도로시 데이가 산을 옮길 수 있으며, 세속적으로나 영적으로 정부에 영향력을 끼치리라 믿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에게는 먼저 가톨릭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다. 모린은 나라의 흥망성쇠에 관심을 갖기 보다, “성인의 삶에 중심을 두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바라보라고 도로시에게 말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거룩함”이며, 어떠한 사회변화의 프로그램도 거룩함과 공동체를 위해서 실행되어야 한다고 도로시에게 가르쳤다.
푸른혁명을 위한 가톨릭일꾼운동
“남자가 제안하고 결정은 여자가”
피터 모린은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을 전파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신문을 만들자고 도로시 데이에게 제안했다. 도로시는 신문제작을 위해 필요한 돈이 없다고 걱정했지만, 모린은 도로시 데이에게 이렇게 확신시켰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 얻어집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당신에게 보내주십니다. 인쇄비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단지 성인의 생애를 읽으십시오.”
모린이 제안한 신문 이름은 “가톨릭급진주의” 였다. 개인과 사회문제에 대한 겉치레 해결책에 안주하지 않고, 그 뿌리까지 찾아보는 신문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신문 이름이, 이 신문을 읽을 독자층을 가리켜야만 한다고 느껴 “가톨릭 일꾼”라고 이름 지었다. 모린은 “남자가 제안하고 최종적인 결정은 여자가 하지요.”라며 순순히 따랐다.
1933년 5월 1일 창간호 배포 준비를 마쳤을 때 모린은 실망하여 편집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빼주길 청했다. 도로시 데이가 편집한 신문에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사상이나, 원칙, 방법론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피터 모린이 쓴 <쉬운 에세이>와 몇몇 성경구절, 교황의 회칙들을 제외하고는, 이 신문이 그저 정부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다른 신문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모린은 급진주의자들 중에 급진주의자였다. 그는 “항의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업은 내 관심을 사로잡지 못한다.” 그는 낡은 제도는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면 죽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사회에 대한 비전이고, 이 비전의 조각들을 각 개인이 삶에서 실현하기 시작하도록 돕는 건설적인 단계별 프로그램이라고 보았다. 가톨릭일꾼운동은 단지 또 하나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집단이어서는 안 되고, 이 신문은 그가 “푸른혁명”(Green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린은 노동 자체가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는 곳에서 더 나은 노동시간과 급료를 위해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이제 “고용주들을 해고시켜야 하는”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어디로 갈 수 있나? 어떻게 살아가나? 라는 질문할지 모른다. 모린은 “땅에는 실업이 없다.”고 대답한다. 가톨릭일꾼은 강요보다는 협동을 강조하는 비중앙집권적인 사회, 공예가들과 장인 노동자 자신이 주인인 작은 공장과 농경공동체로 이루어진 사회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농경공동체 안에 모여 학자와 노동자가 통합되어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기도하는 사회공동체를 꿈꾸었다.
일꾼신문과 환대의 집, 농경공동체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의 대사다”
피터 모린은 과거지향적인 이상적 낭만주의자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대량생산을 위한 조립라인 문명에 대한 모린의 비판에 점점 더 마음의 문을 열어, 개선된 노동조합이 결성된 산업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모린의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모린이 꿈꾸는 공동체가 대량사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모린은 <가톨릭일꾼> 신문을 통해 고대교회가 행한 ‘환대’의 기풍을 부활시키라고 주장했다. 모린은 곤궁에 처해 있으면서 구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부자들에게 오히려 ‘순수한 선’을 행할 기회를 준다고 믿었다. 현대사회는 구걸하는 사람을 ‘부랑자’나 ‘거지’라고 부르며 무가치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곤궁에 처한 사람을 ‘하느님의 대사’라고 말하곤 하였다.
“설혹 그대들이 부랑자나 거지로 불릴지라도 그대들은 사실 하느님의 대사다. 하느님의 대사로서 그대들은 베풀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들로부터 음식, 옷, 안식처를 제공받아야 한다.”
모린은 모든 집이 “그리스도의 방”을 마련해야 하고, 모든 교구는 “하느님의 대사”를 영접할 환대의 집을 갖고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설립한지 1년이 되기 전에 가톨릭일꾼운동은 <가톨릭일꾼>신문만큼이나 ‘환대의 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대화를 통한 교육의 신봉자였던 모린은 “생각의 명료함을 위한 원탁토론”을 주창하였다. 금요일 밤 대화모임은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전통이 되었다.
또한 가톨릭일꾼운동은 모린이 ‘농경대학’이라고 부른 농경생활공동체를 받아들였다. 1938년에 펜실베니아의 이스턴 지방에 처음으로 메리 농장이 설립되었다. 불행히도 그곳에는 들에 나가 일을 하거나 돌쩌귀를 수리하는 것보다는 신학이나 정치에 대해 토론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항상 더 많았다. 도로시는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적었다. 조그만 문제들도 불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모린 홀로 기본적인 농장의 잡일들을 보살피는 것 같았다. 1944년 농장의 일부가 팔렸고, 나머지도 자신들이야말로 참된 가톨릭일꾼이라고 여기는 성미 고약한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그 후로 다른 농장들이 마련되었지만, 그것은 농경공동체라기 보다는 시골에 자리 잡은 환대의 집 형태였다.
1944년 모린은 경미한 뇌졸중 쇼크로 보이는 증상이 있은 뒤 서서히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마지막 5년 동안은 뉴버러 가까이에 있는 가톨릭일꾼 메리농장 피정센터에서 조용히 겸허하게 살았다. 모린이 1949년에 죽자, <타임>지는 “모린은 버려진 옷을 입고 기부 받은 장지에 묻혔다. 기부 받은 것 말고 제 소유의 침대도 옷도 한 벌 없었던 한 사람에게 적절한 장례준비였다.”고 적었다. 모린이 죽고서 일꾼운동은 스테이튼 섬에 있던 농장 이름을 ‘피터모린 농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지금은 그 농장이 뉴욕 말버러에 있다.
출처/Catholicworker 홈페이지
번역: 유수선 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