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교회와 카리스마적 교회 사이에서,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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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교회와 카리스마적 교회 사이에서, 성령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10.11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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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28

선사의 설법

-고정희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이운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15-26)

수에넨스 추기경은 “내가 아직 젊었을 시절에는, 교회는 법적으로 완벽하고 법적 정관(定款)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리고 있는 위계(位階)적 사회로만 소개되어 있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교회를 위계제도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는 교회가 제도화되던 시대의 사회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교회의 이미지는 심지어 군국주의적인 색채마저 띠게 되었다.

피라미드식의 계급제도 아래서 군대처럼 획일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을 이상적이라 여기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생활을 교회법에서 낱낱이 정해놓고 통제하면서, 성직자들에게 관료적인 노예근성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이런 위계 중심의 교회였다. 이 시대에 살던 주교는 무슨 일이든 간에 로마 교황청의 허락을 청해야 했다. 예를 들면 교구내의 어느 수녀가 자신의 유언장 내용을 변경한다거나, 몸져 누운 어느 사제가 자기 병실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도 정식으로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제도와 제도 밖의 갈등

교종 비오 12세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교서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신비체로서의 교회’를 다시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나그네길을 걸어가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세상에 봉사하는 백성임을 강조하였다. <교회헌장>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례의 중요성을 제일 먼저 강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근본적인 평등을 부르짖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러한 생각은 이른바 ‘피라미드 교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었다. 여기서 성직자들은 피라미드의 상층에 있는 계급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교회에 봉사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현재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는 ‘제도적인 교회’에 충실히 머물고 있는 신자들과 제도적인 교회에 영향을 주고받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복음 안에만 머물고 싶어하는 신자들이 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이겨내고 일치를 이루어 주실 분은 오직 성령 뿐이시다. 이른바 ‘정통파’라고 일컫는 신자 대중들은 교계제도와 전례, 신학과 교회법 등과 같이 볼 수 있는 표현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고자 노력한다.

한편 소수이기는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른바 ‘반동분자들’이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생활 여건과 사건에서 출발하여 ‘기성교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혹은 그 교회의 의견을 거의 참조하는 일 없이 복음만을 오늘을 사는 지침서로 재해석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아마도 제도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한다.”던 간디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의 많은 젊은이들이 제도상의 테두리를 거부하고 있으며, 불행히도 교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제도보다 자유를 더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와 자유가 서로를 밀어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성령으로 묶여져 있다. 성령은 이미 그 본질부터 ‘일치의 끈’이며 서로 말을 잇게 하는 다리[橋]이시기 때문이다.

제도교회와 카리스마적 교회

우리가 흔히 ‘제도로서의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사회조직과 같이 다양한 직분과 신분상의 구별, 공통 의식(전례)과 공통 신념(교리)을 갖고 있으며 입교예식을 통하여 구성원(신자)을 늘려가며 한 백성에서 다른 백성에게로 번져가는 동안, 또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서 여러 가지 특징을 띠게 되는 그런 교회이다.

교회는 우리와 예수님 사이의 중재자로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현실에 맞게 해석하여 여러 세대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으며 이 복음 전달을 위해서도 제도가 요청된다. 그러나 교회 역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적 약점이나 돌발적 사건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교회는 성령에게서 생명력을 받고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입고 있으며 성령께서 보장하신 성실성을 담보로 잡고 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들이 전해준 교회이며, 교회의 성장과정에서 얻은 제도상의 질서를 갖게 된다. 우리는 성서에서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열정적으로 따르고 기도와 성찬 모임을 갖고 여러 가지 직책을 수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공동체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다른 공동체와 도타운 유대를 가지려고 애쓰는 책임자들의 지도를 따르며, 서로 일치하여 형제적 공동체 안에 살면서 전해 받은 신앙 내용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제도적 구조는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사도들이 복음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명령을 예수님께 받았듯이 비록 교회가 조직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교회법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성령의 뜻을 헤아려야만 한다. 성령이야말로 교회의 영혼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시오.”라는 말은 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사람 누구에게나 가장 중대한 최초의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주교서품 예식 가운데 영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구절들은 분명히 밝힌다.

“주여, 그(주교)가 언행을 통하여 화해의 직책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리고 그가 징표와 기적의 능력으로 그 직책을 다하게 하소서.” 이처럼 교회는 제도상의 조직과 성령의 은사 안에 동시에 있다. 이 교회는 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볼 수 있는 제도적인 교회가 있고 또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적인 교회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성령께만 충실한 ‘영적인 교회’와 어느 정도 외부장치와 동일시되는 ‘제도적 교회’를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카리스마’라는 용어는 특수한 은총, 성령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게 ‘카리스마’는 가장 종교적이고도 신비적인 성격을 띤 ‘영적 은사’를 가리킬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탁월하게 볼 수 있는 사도직 · 교도직 · 통치능력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카리스마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교회 자체가 전혀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을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이 카리스마적 차원을 떨쳐버린다면 그것은 단순히 교회를 메마르게 하는 잘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이 된다. 그러므로 제도교회와 영적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태도도 잘못된 것이지만 카리스마 없이 제도교회의 유일성만을 강조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복음적 비판과 성령께 개방적인 교회

한편 교회는 역사적 실재이며 교회 밖의 세상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관계 맺음으로써 성령께서 이끄시는 끊임없는 반성과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 사실상 교회는 본디 결함투성이의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들 가운데 봉사직에 부름받은 자들이 많을 것이기에 복음에 어긋나게 살아갈 위험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에 대한 비판은 안팎 어디서나 올 수 있다. 때로는 교회의 반대자에게서도 경청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제도적 교회가 사회적 차원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그리고 교회의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죄악을 불러왔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교회에 대한 자녀다운 사랑에 입각한 건설적인 비판은, 그 방법이 복음의 요구에 부합할 때 교회 안에서 엄연히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바오로 6세는 어느날 교황청 요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유하였다.

“여러분은 겸손과 감사의 정으로 비판을 받아들이고 반성해야 합니다. 로마는 자기에게 들려오는 정직한 목소리에 귀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옹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친구이자 형제의 목소리일진대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제도교회 역시 사람의 아들,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머무를 집을 서둘러 찾거나 안락한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그 동안 복음적 진리와 성령이 주시는 생기는 사라진다. 교회 제도는 항상 종말론적 긴장 속에 살아가면서 ‘나그네길을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도록 재촉하고 있는 성령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곧 나그네길을 계속 걷게 해주는 기본적인 제도 자체를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제도의 갱신을 뜻할 뿐이다.

교종 비오 9세가 주관하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가 개최되고 있던 때의 일이었다.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군대가 피아 성문을 통해 교황의 도시로 몰려들어왔고 교황 국가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교황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주아브 병사들은 참으로 용감하게 투쟁하다가 살해당했다. 그 당시 병사들은 자신들이 교황의 수위권과 자유롭고 자주적인 수행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오늘의 역사가들은 교황 국가의 소멸이 오히려 교회와 교황에게 아주 중요한 ‘정신적 자유’를 가능케 했다고 평가한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영적 ·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세상의 군주들처럼 영토를 지니고 무력으로 권위를 내세워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볼 수 있는 실재이기 때문에 제도와 기구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법이나 법 제정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율법주의나 법제일주의(法第一主義)를 피해야 한다. 교회법은 항상 성령께 열려 있어야 하며 그분으로부터 활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복음이야말로 최고의 법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성령께서 교회에 절대통치권을 행사하신다. 모든 교계제도는 이분들을 종의 자세로 섬겨야 한다. 그런데 교회의 중앙권력이 세계적 차원에서 지역 교회의 작은 문제까지 낱낱이 법 제정을 시도할 때마다 율법주의의 위험은 커진다. 이같은 권력의 휴혹은 교회의 일치를 법령이나 법조문을 통해 추구해 보려는 어리석음에서 생겨난다. 사실 그들은 일치와 획일성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동방교회에 율법주의의 휴혹을 크게 경고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교회가 마치 무슨 조직인 양 다루었다. 이 조직을 굳히기에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이제 교회는 제대로 모든 기능이 잘 굴러가는 단계가 되었고, 제법 잘되어 가는 편이다. 그러나 사실은 잘 안 되는 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교회의 기능이 기계장치처럼 움직일 뿐이지 결코 생명체로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수에넨스, ⌜성령은 나의 희망⌟, 분도출판사, 19-39쪽 참조).

사진출처=pixabay.com

성령의 약속

교회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간직하고, 그 복음적 활력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리의 성령 때문이다. 예수님 생전에는, 죽어 있는 사해(死海)와 같은 이스라엘에 새로운 기운을 예수께서 ‘직접’ 불어넣어 주셨다. 그 제자들은 때때로 야단맞으면서 또한 위로받으면서 그분과 함께 갈릴래아의 호숫가를 거닐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생애를 준비하시면서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분이 곧 복음 선포자들의 협력자인 진리의 성령이라는 것이다(요한 14,16).

성령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들과 함께 계시는 방편이기도 하다(14,18).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시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 역시 제자들 안에 계실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원천이 된다. 그분이 아니고서야 누가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분을 우리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도 성령이 요청된다. 그러나 이 성령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14,24).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과 계명을 따라 살며 그럴 때 예수님도 그 사람 안에 사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항상 새롭게 깨닫도록 도우시는 성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기억시킴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신다. 복음적 원천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우리 죄 많은 교회는 때때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잃기 쉽다. 그러나 제도와 카리스마의 균형을 잡아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갱신된 제도와 카리스마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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