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일반적 태도는 민주주의로 반공하는 것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대구교구의 태도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경향은 아니었다. 적어도 군사정권 초기에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박정희 정권에 부응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경험하고, 1967년 강화 심도직물 사건과 원주 문화방송 부정부패 사건 등을 경험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실상을 접하고 다른 차원의 정치적 참여를 모색하고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보여준 교회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민중의 고난에 참여하는 방식의 사회참여였다. 즉, 반공주의와 민주주의를 똑같은 무게의 상수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장면의 정치적 계보를 계승하는 것으로, 한국교회 안에서는 김대중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이효상을 앞세운 대구교구는 교구에서 소유한 언론 등을 통해 사사건건 교회의 이러한 흐름을 가로막고 나섰다.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있었다. 특히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는 1971년 12월 5일 성탄 교서를 통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불의와 과감히 투쟁할 것을 선포했다. 그러자 <가톨릭시보>는 이례적으로 주교의 교서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교서는 신앙과 도덕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리고 신앙과 도덕에 입각해서 활동하고 생활하도록 가르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지 주교의 교서는 교서라기보다 격문으로 느껴진다. 어딘가 선의(善意)가 결핍돼 있고 양순하고 겸손함이 결핍돼 있으며 정치적인 요소가 다분히 섞여 있다. 교서가 지녀야 할 품위보다 행동을 위한 선동이 앞서는 것이 지 주교의 교서인 것 같다.”(가톨릭시보 1971년 12월 19일자)
이러한 교회 안의 서로 다른 태도는 1971년 4월 17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가시화되었다. 그해 3월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 경남지부 연차대회에서 이효상은 “이러한 시국에 대통령으로 모실 분은 박정희씨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면서, “후진국에 있어서 군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엔 흔히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국가의 지도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도 그릇된 판단이 아닌 줄 안다.”고 말했다.
또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은 1963년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감정을 유도하며 “경상도에서 전라도 표를 맞먹고도 백만 표를 더 박 대통령에게 주자”고 공공연히 연설했다. 이는 김대중과 교감을 나누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이나 지학순 주교의 입장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선거에는 5명의 후보가 나섰지만, 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 공화당과 신민당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월 28일에는 김대중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으며, 1월 28일에는 그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한편 선거가 끝난 뒤에 선거감시활동을 벌여온 ‘민주수호 기독청년협의회’가 보고대회를 통해 4.27 대통령선거가 공포 분위기 속에 치러진 관권선거였으며, 국민의 혈세가 국민의 주권을 매수하는데 남용된 입체적인 부정선거였다고 규탄했다. 이날 대회에 참석한 함석헌은 경상도의 표차가 8:2로 나타났다며, 이는 아직도 경상도 사람들이 부족사회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권력의 편에 서 있던 대구교구는 온전했지만 군사정권에 도전하는 한국교회 자체는 탄압에 직면해 있었다.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던 월간잡지 <창조>가 1972년 4월호에 김지하의 장시 ‘비어(蜚語)’를 25페이지에 걸쳐 실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와 경찰에 의해 판매금지당하고 편집인쇄인인 유봉준 신부 등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72년에 유신체제가 들어선 뒤에, 1973년에는 야당 지도자였던 천주교 신자였던 김대중이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되어 죽음 직전에 구출되는 사건이 터졌고,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 치사된 사건도 발생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1973년 2월에는 전국 19개 수녀회의 장상들이 ‘사회의식계발세미나’를 열면서 “복음정신에 입각한 참다운 수도자로서의 기도생활과 함께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수녀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재확인” 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재야인사 30여 명이 시국수습 건의문을 채택하면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정식으로 전개했다. 광주대건신학 신학생들도 11월 18일 사회정의를 요구하며 전교생 1백 64명이 삭발하고 교회 안팎의 불의를 고발하고 부정타파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개헌청원운동과 민주화에 대한 교회 안팎의 열망이 들끓자 1974년 1월 1일 서정길 대주교는 교구 사목협의회 주최 신년교례회에서 “현 시국은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도 난국을 헤쳐나가기가 어려운 때”라면서, 최근 일부에서 주장하는 반체제 개헌 논의 등은 결국 혼란을 초래할 뿐이고, “정부와 국민이 서로 믿고 합심 협력할 때 이 나라에 안정과 번영이 온다”고 말했다. 이어 서 대주교는 유신체제가 출범한 지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에 대한 공과를 논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몰아붙였다.(가톨릭시보 1974일 1월 13일자 참조) 그러나 이미 그때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지 13년이나 흐른 뒤였다.
한국천주교회 민주화 운동의 브레이크, 대구교구
그동안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을 볼모 삼아 박정희 정권은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며 헌정질서를 뒤집고, 대학에는 군인들이 진을 치고, 언론은 재갈이 물렸다.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감옥에 보내며 박정희 정권은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74년에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까지 나왔다.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을 통해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1974년 7월 10일 주교단은 성명서를 통해 “지 주교님과 같이 우리나라가 참으로 훌륭한 국가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이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데 완전히 뜻을 같이하며 이를 가르치고 증진하는 것은 바로 주교들의 의무로 자각하고 있다”고 밝히며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촉구했다.
그러나 대구교구의 <가톨릭시보>는 지주교가 아시아 주교회의에 참석차 출국했다가 돌아와 현재 서울 성모병원 621호실에 입원 중이라는 사실만 보도했을뿐, 양심선언이나 그 뒤로 이어진 시국기도회는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벨기에 대사, 심지어 교황청까지 나서서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지만 <가톨릭시보>는 유신정권의 발표 내용 외에는 사실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8월 27일 ‘가톨릭청년회’는 선언문을 통해 “가톨릭시보는 한국 가톨릭의 신문이다. 운영자인 대구교구 주교나 주간은 사견(私見)을 배제하고 한국 가톨릭의 의견과 특히 주교회의의 참뜻을 보도하는데 충실하고, 교회에 대해서 겸손하라”고 규탄했다.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해 연이어 ‘민주회복을 위한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어, 이 자리에서 7명의 천주교 신부와 문익환,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이효상은 이 명동사건에 대해서도 “만일 존엄한 지성소가 정치의 선전장 혹은 정치의 소굴이 되었다면 이것은 간단히 묵과할 문제이겠는가?”고 물었다. 그는 1975년 2월 28일에 주교단에서 발표한 성명을 인용하며 “우리의 기도가 이웃을 비난하거나 고발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되겠고, 오직 스스로의 가슴을 치며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겸손된 기도의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고 지침 제1항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의에 찬 반정부적 설교와 소위 현실고발이라 하여 현정권을 비난하는 언사를 농했다는 것은 심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며 주교단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효상은 명동사건의 주동자들이 “꾸준히 기회를 엿보고 음모한 결과 이런 사건을 지지른” 상습범이며, “우리나라 신부 중 1.2%밖에 되지 않는 신부들이 전교회의 명성을 이렇게 무너뜨릴 수가 있던 말인가?”하고 비난했다. 아울러 “나는 반공이 우리 대한민국의 최우선 공동선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선을 위하여 당분간 김일성이가 무력남침을 포기할 때가지 우리의 자유의 일부를 애국으로 유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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