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교님은 비폭력의 방법이 성공했던 경우를 알고 계십니까?
책과 신문에서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전쟁과 폭력 혁명의 역사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폭력을 쓰지 않고 억압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있습니다.
19세기에 헝가리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하에서 시민불복종운동과 납세거부운동으로 자치권을 얻었습니다. 20세기초에 핀란드 사람들은 조직화된 불복종운동으로 러시아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1920년에 독일인들은 불법적인 권력에 파업으로 항거하며 군사쿠데타를 전복시키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중 덴마크인들은 유대인 몰살을 꾀하던 나치 친위대를 공동체적인 행동으로 저지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저 샤베츠는 미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려고 긴 비폭력 투쟁을 계속해 왔습니다.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으로 항거했고 폴란드, 칠레 그리고 파키스탄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폭력 저항운동이 성공했었던 사례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해방이 증오와 폭력이 없는 싸움으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저항은 어떤 규칙이 있습니까? 그 규칙은 어떤 것일까요?
중요한 규칙은 물론, 사람들의 생명이나 존엄성을 해치는 어떠한 폭력도 행하기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폭력적 행동에는 전략이 있습니다. 이 전략은 갈등의 본질이나 대항하는 불의한 권력의 양상에 따라 융통성있게 조절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비폭력 저항의 전략은 불의한 권력의 근거를 파악함으로써 그것을 쓰러뜨리는데 있습니다. 억압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은 사람들의 양보, 타협, 복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비폭력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권력에 협력하지 않고 불복종하도록 조직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권력도, 그것을 유지시키는 무력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힘을 인정하려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지탱될 수 없습니다. 전략은 또한 불의한 권력체제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지칠 줄 모르는 대화를 함으로써 그들이 정의 편에 함께 서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비폭력항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이 적당한가, 다시 말하자면 효과적인 조건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공부합니다. 그리고 나서 현실에 적용시켜 보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 효과적인 비폭력 저항의 조건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주교님은 도덕적인 원칙 때문에 비폭력성을 주장하십니까? 아니면 단순히 전략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에 비폭력을 선호하십니까?
나는 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억압에 맞서 싸울 때에 적극적인 비폭력 행동보다 무력에 더 신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양심을 갖고 그러한 선택을 했다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건대 그 선택은 제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이름으로, 나는 어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내 자신이 수 천번 죽기를 더 바랍니다. 오늘날 군수산업에 맞서려고 무기를 제조하는 경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 싸움에 이긴다 하더라도 그 승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력을 또 증강시킬 수밖에 없으니 그것은 평화나 자유와는 상관없는, 참다운 승리가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 이유 때문에 또한 매우 자주 종교적 이유로 인해 비폭력을 택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습니다. 즉, 지금 당장은 비효과적으로 보이지만 무력을 사용치 않고 정의와 자유, 평화를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가기 위하여 비폭력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산상수훈과 그리스도의 모범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해방시키는 유일하고도 효과적이며 가능한 방법이 비폭력이기 때문에 택합니다. 인도에서 간디는, 모든 사람들이 비폭력의 필요성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면 자신이 그렇게까지 극단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말합니다. 우리는 도덕성과 효과성을 서로 반대의 위치에 놓아서는 안됩니다. 역사를 만들기 위한 행동에 무관심한 비폭력은 아무리 위대한 원칙과 고귀한 감정으로 덮혀졌다 하더라도 패배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나라에서는 대화에 대한 응답이 오로지 탄압뿐입니다. 이런 경우 가난한 사람들이 폭력을 쓰지 않고 자신들의 존엄성을 유지키 위한 싸움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제3세계에서 폭력 말고 해방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습니까? 불의한 권력을 제지시킬 수 있는 길이 폭력이외에 있을까요?
이미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극심한 탄압의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무릅쓰는 것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고 감히 판정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따라 선택한 것에 대해 아무도 판정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능한한 비폭력적으로 항거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 상황에서 우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폭력의 길로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거나 실천해 보기도 전에 미리 비폭력적 행동의 효과에 한계를 긋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비폭력 저항의 희생자들 이야기를 듣고 비폭력이 실패하거나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생명을 함부로 내놓아서는 안됩니다. 비폭력은 상대방을 희생시키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비폭력은 상대방을 그들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비폭력 행동을 신중하고도 심각하게 계획하고 준비하고 추진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첫번째 부딪침 이후 비폭력적 행동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희생없이 불의한 구조와 억압은 무너질 수 없습니다. 비폭력에 따르는 희생은 폭력 때문에 강요되는 희생에 비해 미래와 화해를 위한 더 좋은 준비가 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비폭력 저항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세계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통로는 없을까요?
나는 이미 적극적인 비폭력 저항을 통해 정의와 평화운동을 하는 국제적인 모임 세곳에 참석했습니다(네덜란드, 아일랜드, 벨지움). 이러한 모임에서 보면 비폭력 저항은 이미 신중히 고려해볼 만한 힘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모든 그룹의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화하고 움직이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룹들은 각각 목표와 지도자 그리고 명칭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언젠가 해결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능동적인 비폭력 저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고 황홀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책임은 세상 속에서 있는 상황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비폭력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행동으로 바로 나서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요. 비폭력적 저항의 목표는 폭력적인 적수까지도 양보시키는 힘입니다. 비폭력은 상상력과 용기 그리고 엄청난 연대감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비폭력은 여러분의 적수가 비폭력에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폭력은 지금, 이순간, 오늘을 위한 것이며 내일 실천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출처] <까마라 할아버지와의 대화: 고통 한 가운데에서 희망을>, 참사람되어 1993년 3월호
돔 헬더 카마라(Dom Helder Camara)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는 말로 유명한 브라질교회의 대주교.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산실인 브라질 레시페 신학교 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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