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와서 처음 아이를 보낸 곳은 어린이집이었다. 산골 살던 아이는 한 반에 30여 명을 웃도는 집단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처음엔 호기심에 잘 다니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터 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쓰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어린이집 가기를 그만두었다. 산골에 살 때는 아이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놀면 그뿐이겠지만, 여기선 어디라도 다녀야 동무들이 생기고,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집단생활도 익혀야 한다. 결국 다시 찾아서 아이를 넣은 곳은 영지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다.
불국사 입구에서 울산 방향으로 10여 분 더 가다가 오른쪽으로 철도 건널목을 지나면 나타나는 곳이 영지(影池)다. 영지는 불국사 경내에 세워진 석가탑을 만들었던 백제의 장인 아사달과 아사녀에 관한 전설이 깃들어 있는 연못이다. 석가탑이 완성되면 그 탑이 연못의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오매불망 낭군을 기다리던 아사녀 앞에 석가탑은 끝내 연못 위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낙담한 아사녀가 연못에 몸을 던진 뒤에야 아사달은 아사녀의 소식을 듣고 영지로 달려가지만 이미 그녀는 죽고 없었다. 영지초등학교는 전교생이 40명, 유치원생은 모두 9명뿐이었다.
편안한 인상을 주는 유치원 선생님 탓인지, 예전에 살던 광대정처럼 몇 안 되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결이는 행복해 보였다. 가끔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운데 앉히고 묻곤 한다. “여기가 좋으니, 광대정이 좋으니?” 예상대로 결이는 광대정이 좋다고 말한다. 이사 온 뒤로 작년에 심어놓았던 마늘을 거두어 들인다고 광대정엘 한 번 다녀왔는데, 아빠를 따라갔던 결이는 오랜만에 만난 동무들과 신나게 놀고 아쉽게 그곳을 다시 떠나왔던 것이다. 벌써 추억이 되어 버린 산골. 장마 직후라서 그런지 잡풀이 허리께까지 웃자라 짙푸른 생기가 잔뜩 올라온 산골이었다.
아침에 가방을 메고 나가는 아이를 따라서 바깥에 나왔다가,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 잠시 자리에 주저앉아 담배를 태웠다. 이제 가을이다. 더러 구름이 끼었지만 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따뜻하다. 마음속이 허전한 것인지 고요한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 그저 잠시 먹먹한 기운으로 앉아 김남주를 생각했다. 혁명가이기 전에 시인이었던 사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10여 년 동안 정치범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가석방되어 몇 년 살지 못하고 췌장암으로 훌쩍 이승을 떠난 사내.
김남주의 평전이 출판되면서, 그이의 시로 노래를 만든 가수 안치환의 <김남주 시인 헌정앨범>에는 김남주의 육성이 녹음되어 있었다. 숨이 턱 차오르게 하는 김남주의 살아생전 목소리. 그 견고하면서 다정한 음성. 그중에서 내가 가장 애틋한 가슴으로 듣곤 하던 것이 「이 가을에 나는」이라는 시다.
......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사슬 풀고 오라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을 걷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집으로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 주지를 않는다
강을 건너 내를 끼고 땅거미가 내린 산기슭을 달린다
강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실상 그만이 푸른 옷에 갇힌 수인(囚人)이었을까 마음껏 꽃 피우지 못하는 영혼 모두가 수인이다. 세상을 온통 사방에 벽을 둘러친 감옥처럼 갑갑하고 옥죄는 심정으로 바라봐야 하는 우리네 인생들이 그이 말고 또 없겠는가 세상도 나에게 감옥이 되지만, 내가 나를 욕심 때문에 가두기도 하는 법이다. 말 그대로 ‘생존’ 때문이라면 별수 없겠지만, 턱없이 잡고 있는 욕심 때문이라면 조금씩 자기를 풀어 줄 필요도 있겠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이 들면서, 너무 높이 세워둔 꿈은 접는 연습도 해야 하겠다고 말이다. 우리말에 ‘깜냥껏 한다’는 표현이 있다. 자기 능력 안에서 다만 최선을 다하는 게 우리의 미덕이 아닐까 그래야 남겨둘 여백이 있고, 남은 힘이 있으면 발목이 시리도록 들길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목적도 없이 그저 걷다 보면 제가 인생길의 어디쯤 와 있는지, 부질없는 생각을 그만 접어두었는지, 길을 가며 상처 준 마음들은 없었는지, 그리고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길 끝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는 연기를 바라보며 이승의 끝을 생각할 것이다. 죽을 날을 헤아리며 오늘을 점검할 것이다.
김남주 시인의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집을 열어 보니, 책날개 에 ‘일념정진(一念精進)’이라고 이현주 목사님이 쓰신 먹글이 갈피에 끼어 있었다. <풍경소리>에서 몇 해 전에 보내 준 것인데, 내내 책갈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말씀이다. 아직 한 마음을 세우지 못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천명(天命)이야 알기는 해도 정성껏 온 힘으로 갈무리해 나갈 의지가 부족하다는 뜻일까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바람처럼 지나고 싶은 거리를 들판을 매만지며 지나갈 뿐, 그뿐이다. 그래서 너무 결연한 표현은 아직 부담스럽다. 김남주의 단호함보다는 김남주의 부드러움이 나를 더 끌리게 한다. 단호한 감옥에서 부드러운 햇살을 노래했던 그 사람이 아름답다.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 만큼 자라나
내 목에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저 창살에 햇살이」라는 시다. 가을날엔 유난히 햇빛도 맑게 내려앉게 마련이다. 아침녘 냉기를 머금고 오슬하게 체온이 낮아질 때,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별없는 햇살이 창으로 스밀 때, 수인의 몸에도 축복이 가라앉는다. 그 햇살만으로 충분히 고마운 아침이다. 그렇게 욕심 없이 정갈한 아침이 시인에게로 오는 것이다. 내가 그 햇살을 꿈꾸면 잘못된 욕심일까 내 몸에 담기에 과분한 바람일까 인생에서 겪어야 할 풍랑이 남아서 내 바람이 부질없는 메아리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이 가을에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사녀처럼 연못만 바라보며 석가탑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불국사로 찾아가 내 낭군의 낯이라도 잠깐 보게끔 사정이라도 해볼까.연못가에서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물에게 하소연이라도 했다면 석가탑은 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내 간절함이 석가탑을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가만히 불러 보자. 내 손등에 내려앉는 햇살에 대고, 나도 햇살이 되고 싶다, 말을 전하자. 떠듬거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조용히 말 건네 보자. 나는 네가 되고 싶다, 라고.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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