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 동안 화물차를 타고 다녔다. ‘포터 슈퍼캡 초장축’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상관없이 그 차는 좀더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도록 화물칸을 길게 늘여서 만든 짐자동차였다. 시골에서 살자 하니, 화물차가 가장 요긴하였다. 퇴비를 실어 나르고, 이삿짐을 옮겨주고, 때로는 화물칸에 아이들도 잔뜩 태우고 다녔다. 자동차에 흠집이 생겨도 ‘이건 화물차니까!’하는 생각에 마음 쓰이지 않았다. 문짝은 한 번에 한 짝씩 농로에 받혀둔 경운기에 긁어먹었다.
그 화물차를 타고 어지간히 돌아다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강원도 홍천에서 전라도 해남, 강진까지 우리 국토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여름엔 영덕에서 폭우 속을 뚫고 집으로 돌아왔고, 겨울엔 함박눈을 맞으며 부안까지 다녀왔다. 무주 광대정 집 앞의 비포장도로를 오르내리느라고 자동차는 한정 없이 덜컹거렸고, 거친 길을 오가는 신세라서 바퀴는 1년 만에 한 번씩 새것으로 바꾸어 주어야 했다.
이 중고 화물차를 사서 끌던 초창기에 자동차에 문외한이던 나는 냉각기에 물이 떨어진 것을 모르고 달리다가 엔진을 망가뜨려 새로 해 넣은 적도 있었다. 미숙한 주인을 만나 자동차가 고생이 많았다. 막판엔 창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재떨이는 부러졌다. 청주에선 얼음판에 미끄러져 도로변 수로에 자동차 이마를 처박은 적도 있었고, 언양에선 빗길에 제멋대로 돌다가 가드레일에 기대어 멈추어 선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셈인데, 그래도 중간에 새로 바꾼 엔진 때문인지 여전히 도로에선 잘 달려 주었다. 지난 겨울에 바퀴를 바꾸어 아직도 발톱이 성성한 자동차를 처분하는 게 아쉬워 경주로 이사한 뒤로도 내내 아껴가며 타고 다녔다.
지난 학기 내내 김해대학을 오고가는 출퇴근용으로 사용한 것도 이 화물차였다. 학교에서 화물차를 타고 다니는 교수(사실상 강사)는 당연히 나 혼자 뿐이었다. 농사일이나 목수일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고 ‘예술심리 치료’를 한다는 교수가 화물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이색적이었을 것이다. 양복을 입고 교단에 선 적이 없는 교수였기에 학생들에겐 내가 화물차를 몰고 다닌다는 게 납득할 만한 무엇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 사람이니까 저런 차를 타고 다니지!’ 하는 분위기였다. 언젠가 학생들을 몇 사람 자동차에 태운 적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하는 말, “그런데 이 차 굴러가긴 굴러가요?” 좀 불안하다는 뜻이었을 테고, 그 말을 듣기에 충분할 만큼 내 차는 낡고 허름하였다. 그래도 강의가 비는 시간에는 썰렁한 외래강사 대기실에 들어가 있기보다 이 자동차에 앉아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다.
얼마 전에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괘릉에 혼자서 간 적이 있다. 멀리 토함산을 바라보고 있는 얕은 구릉에 자리 잡은 괘릉은 비교적 한적하였고, 매표소가 있기는 하나, 입장료는 500원이고, 매표원은 의자에 걸터앉아 손님 하나 없는 능을 등지고 책을 읽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능 입구 한구석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연신 어디론가 타전하고 있었다. 신라 38대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에는 무덤 앞에 무인석(武人石)과 문인석(文人石)이 한 쌍씩, 그리고 사자상(獅子像) 두 쌍이 세워져 있었다. 특히 괘릉의 무인석은 그 모습이 서역인을 닮았다 하여 유명해졌는데, 처용도 서역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석상에는 돌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돌이 습기를 머금고 이끼가 오르면서 맺어진 꽃망울일까.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기고 있는 석상을 어루만지면서 묘한 감흥이 일었다. 무인의 손도 잡아보 고, 돌사자의 패인 귀도 만져 보았다. 능 앞에 앉아서 오랜만에 맑게 갠 높푸른 하늘을 보았다. 가을이다. 먼 나라에서 신라 땅에 귀화하여 살았던 서역인들의 흔적이 비와 바람을 뚫고 지금까지 남아서 내 손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오래된 영혼’에 관한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수십 번의 전생(前生)을 지닌 낡은 영혼이 지혜를 전해준다는데, 내 곁에 그런 오래된 영혼이 있다면 물을 게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괘릉을 돌아 나오는데, 검표원은 아직도 전화중이다.
5년 동안 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실어다 주었던 화물차 역시 말을 할 줄 안다면, 내게 할 말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할퀴고 상처 입은 육신을 보여주면서도 아직 심장은 뜨겁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무주 산골 광대정을 오르내리며 겪은 많은 이야기들이 어쩌면 전설처럼 그 자동차의 몸 구석구석에 아픔으로 또는 희망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한 시절이 끝나고, 다음 시절을 맞이하면서 반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갔던 그 화물차를 울산의 어느 자동차매매 상인에게 넘기고,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참 적적했다. 때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고, 그 비를 흠씬 맞으며 정거장까지 걸어갔다. 미루어 두었던 과태료와 범칙금 등을 정산하니, 한 푼도 남는 돈이 없었다. 빈 바람만 손에 쥐고 그렇게 화물차를 곁에서 떠나보냈다. 그 화물차는 상인에 의해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다른 주인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처럼 다시 단장하고 매장 앞에 세워져 있던 다른 중고 자동차를 매입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여러 차례 이 차 저 차 뒤져 보다가 200만 원 주고 1997년형 ‘록스타’ 밴 차량을 샀다. 1997년에 단종된 차량이지만, 어렵게 몇 가지 부속을 구해서 갈아 넣기도 하고, 긁힌 곳을 메우고 부분 도색도 하였다. 요즘은 이 차에 정들이는 데 마음을 쓴다. 어찌 보면 장난감처럼 작은 게 내 체격에도 어울리는 것 같다. 강원도를 자주 들락거렸다는 지프 차량인데, 그런대로 쓸 만 하다.
화물차를 처음 구입했을 때도 물고 빨고 닦는다고 이웃들에게 핀잔을 들었는데, 이렇게 정들이는 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얼마간 타다가 이 차가 내 식구다 싶어지면, 그만큼 신경을 덜 쓰게 될지도 모른다. 가까울수록 고맙게 여겨야 할 법한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 못하다. 때로는 못된 짓도 많이 해서 떠날 때 후회가 많아진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처음 만났을 때 먹었던 첫마음을 유지하는 게 어려운 까닭에,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얼굴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후회를 키우는 게 아닐까 염려하는 탓이다.
엊그제 대전에서 손님들이 다니러 왔다. 어른 일곱에 아이들 일곱이 온 집안을 점령하다시피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며 쉬고 잠을 청했다. 그날 밤 ‘가톨릭일꾼운동’을 하는 후배랑 술을 마시다가, 밤이 깊어 술이 떨어졌다. 그만 마시라는 제수씨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와 그 친구는 술을 사 들고 석굴암엘 올라가게 되었다. 모두가 잠든 밤, 구름 사이로 반달이 떠서 석굴암 주차장을 비추고 있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 혼신을 다해 예수처럼 살고 싶다는 후배의 발원은 취중에도 계속되고, 술자리를 접고 나서 후배는 땅바닥에서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뭔가 간절함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영혼은 살아 있었고, 그를 지켜보는 나는 참 머쓱했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스스로 묻고 있었다.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기아자동차의 ‘록스타(Rocsta)’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뒤적거려 보았다. 그런 낱말은 없었다. 다만 로크(roc)라는 단어를 풀어놓은 말이 눈에 들어왔다. 로크는 아라비아의 신(神)인데, ‘전설에 나오는 거대한 새’란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말 그대로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새다. 새는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전령(傳令)의 상징이다. 하늘의 뜻을 마음에 새기는 땅이 없으면 전설도 없고 새도 필요없다. 그러나 하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선 언제든지 전설이 부활하고 새가 날아다닌다.
후배가 석굴암에서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어서 절을 하는 동안에도 그러한 전설이 부활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전설은 아무리 낡아 보여도 항상 새로운 것이다. 그 전설을 낳는 사람의 영혼이 새롭기 때문이다. 록스타,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그 전설의 새를 기억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항상 지상에 내려오지만 지상에 머물지 않는 로크에게서 자극을 받고 거듭 일어설 수 있기를 은밀히 소망해 본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