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튀게 될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누차에 걸쳐 자신에게 말해 왔다. 미래에 대하여 명확한 청사진을 갖고 살지 말자고. 나의 미래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믿고, 생의 어느 한 부분은 더 큰 어떤 흐름에 맡겨놓고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세상사가 제 맘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미래는 언제나 예기치 못했던 곳으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짐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예전에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라 해서 우린 그것을 ‘새롭다’ 말할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길은 그렇게 새롭고 걱정스러우면서도 흥미롭다.
나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과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전혀 낯선 사람들 속에서 각별한 인연을 새로이 맺고, 거기서 내가 머물 곳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스치고 지나간 뒤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기에, 진지하게 몸과 마음을 싣는 일이 된다.
전북 무주의 작은 산골에 터 잡고 살며 농사를 배우고 글도 쓰고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지 6년째 접어든다.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을 뒤에 두고 ‘이사(移徙)’하기로 했다. 먼저 갈 곳을 정하고 집을 내놓을 생각이었는데, 주변에서 먼저 집부터 내놓아야 제때에 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우리 생각에도 집을 내놓아야 지지부진하게 눌러앉지 않고 서둘러 갈 곳을 정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소문을 내었더니, 당장에 임자가 나타났다. 살던 집을 계약하고 나니 마음이 갑자기 황망해지고, 그날 밤 이웃을 불러 술을 마셨다.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될 줄 몰랐다. 숱하게 손을 봤던 집이기에 이젠 이 집에 묵은 정을 떼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집에 대한 미안한 감정마저 일었다. 아마 집 구석구석에 밴 자취를 온전히 비우고 떠나지는 못하리라 예감한다.
경남 김해의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이사 갈 계획은 진작 있었는데, 지난 2월에 갑작스레 김해에 자리가 생겨서, 아무래도 그 근방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엔 강원도 원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원주는 이모저모 마음이 끌리는 도시였던 까닭이다. 지학순 주교도 계셨고, 장일순 선생이 평생을 보내셨고, 박경리 선생이 자리 잡고 계신 땅이다. 사람의 앞일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김해가 얼마나 긴 세월을 내 삶에서 버티어 줄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부르고 있으니 응답할 뿐이다.
김해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를 물색하면서도, 살 집으로 정작 김해를 맘에 두지 않는 것은 무슨 심사인지 모르겠다. 아내와 나는 예전부터 ‘한 번쯤 살고 싶은 곳’으로 경주와 제주도를 떠올리곤 했는데, 이참에 경주에서 한번 살아 보자고 생각을 모았다. 그제야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고 놀란 것은 지금껏 경주가 경상남도인 줄 알았는데 경상북도라는 사실이다. 도로가 막히지만 않는다면 김해까지 자동차로 1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대구였다.
생각하면, 김해도 경주도 참 묘한 인연이 있는 도시였다. 김해대학은 첫 강의가 있는 날 가서 보니, 위암으로 몇해 전 이승을 떠난 둘째형이 살던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 집에서, 형수와 조카들이 마음 다독이며 살고 있다.
김해가 가야(伽倻)의 고도(古都)라면, 경주는 신라의 고도인데, 불국사를 보려고 예전에 두어 번 경주에 가 본 적이 있다. 아내의 친정 친척의 결혼식 때문에 포항에 갔다가 경주엘 들렀는데, 불국사에서 아내는 처음으로 아이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다음해에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8년 만에 딸아이를 얻었다. 그리고 경주에서 포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둘째형이 묻힌 묘소가 있다. 우연이겠지만, 결국 김해나 경주나 죽은 둘째형과 이렇게 저렇게 연루된 장소라는 점에서 이것도 미리 예정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먼저 경주로 인연을 찾아가 보았다. 대전에 사는 한 친구가 소개해 준 분에게 전화를 해서 다음날쯤 만나 보았으면 한다고 이야기하자, 내일은 마침 대전에 일이 있으니 밤이 늦더라도 지금 오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김해에서 야간 수업을 마치고 그 밤에 차를 달려 경주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마중 나온 그분을 따라서 간 곳은 경주시 내남면하고도 산골에 자리 잡은 수통골이다. 예전에 스님들이 여럿 살면서 ‘닦아서 통한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란다. 이를테면 도(道) 닦기 좋은 곳이란 말이겠다. 시골집을 고쳐서 살고 있는 그분은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한옥을 짓는 목수일로 밥을 먹는 젊은이였다. 건강하고 다부지면서 성품이 부드러웠다. 차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방에 딸린 목공실에서 밤새 생쥐가 빠그락거렸다.
아침녘에 일어나 보니, 벌써 여러 군데 연통을 넣어 집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된장국에 밥을 먹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 길이 바쁜 것이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라도 아침나절에 둘러볼 예정이란다. 집을 나서면서 마을 입구 언저리에 까치집을 얹고 있는 나무를 보여 주면서 말한다. “이 마을에 다섯 사람이 손을 잡고 둘러 서야 할 만큼 허리가 굵은 나무가 있었대요. 그 나무 한가운데가 비어서, 여름이면 마을 노인네들이 그 속에 들어가서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었다는데, 십수 년 전에 전라도 김제 어딘가 사는 사람에게 500만 원 받고 그 나무를 팔았다지요. 그때 이미 노인네들이 장기 두던 허당에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었는데, 본채라고 할 큰 나무가 베어지고 난 뒤에도 그 속에 뿌리 내렸던 작은 놈이 자라서 벌써 저만큼 큰 거지요.” 신라(新羅)처럼 한때 번성했을 이 산골에 서너 가구만 남아서 마을을 헐렁하게 지키고 있는 셈인데, 언젠가 그 작은 나무도 제 어미처럼 자라서 융성할 날이 있으리라 예감하지만, 글쎄, 앞일이야 누가 알겠는가, 나무의 마음이야 태곳적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련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아침녘에 두어 집 찾아보았지만 마음이 내키는 곳은 없었다. 오히려 낡은 농가주택이라면 모를까, 개량주택의 대부분이 시멘트 범벅이라 머릿속이 어수선해졌다. 고마운 그 젊은 부부는 두 아이를 데리고 대전으로 떠나며 아쉬워했고,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전 10시쯤 되었겠다. 이번엔 경주의 느낌이라도 얻어 갈까 싶었다. 그래서 방향을 잡은 곳이 남산이었다. 경주에 와서 항상 불국사 언저리만 바라보았지, 정작 경주 남산은 말로만 들었던 탓에 삼릉 입구 포석정 쪽으로 해서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산을 ‘야트막한 언덕’ 정도로 생각했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그게 아니었다. 예정에 없던 산행인지라 구두를 신은 발이 자꾸만 쓸려서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애석불 하나쯤은 보고 내려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산길을 올랐다.
남산의 정상에 이르도록 나는 한 조각의 부처 얼굴도 보지 못했다. 탑이 앉은 자리에 이르지도 못하였다. 멀리서 보면 산중턱 숲 속 어딘가에 솟아난 탑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길로 접어들어야 그 곳에 이르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진상을 알게 되겠지만, 이 산에는 유물 유적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없었다. 길을 아는 사람은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돌부처를 보겠지만, 길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상에 올라 고함 한 번 지르고 산을 내려와야 할 모양이다. 사람의 눈에 쉽게 포착되지 않는 부처의 마음(佛性)이란 그런 것인가. 길을 묻지 않는 자에게 길을 알려줄 이가 없고, 길을 모르는 손님을 맞이할 주인이 없다는 말인가.
남산은 정상으로 가는 길 자체가 사실상 가파르지 않고 누구나 오르도록 완만하게 놓여 있다. 그러나 그 길이 전혀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걸어서’ 올라야 한다. 자동차로 편히 앉아서 찾아볼 수 없는 산이 남산이다. 그리고 길은 편하나 결정적인 길목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수고롭게 길을 물어 가거나 심안으로 보아야 열리는 길인 셈이다.
나중에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지니, 남산에 관하여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절하지 않으면 불상을 세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게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釘)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를 찾아낸 것이다.”
남산 자체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문화재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제 경주에 와서 문을 두드린다. 마음으로, 정성으로 두드려야 열리는 문 앞에 서 있다. 내가 길손이라 한들 박대하지 않으리란 믿음에 패를 던지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