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일어나 툇마루를 딛고 마당에 내려서니 서편 하늘에 초승달이 말갛게 떠 있다. 조만간 숲을 넘어갈 기세다. 귓불이 쟁쟁하게 차가울수록 날렵한 초승달의 한끝이 더 날카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리 눈썹같이 가는 달이라도 그믐밤에 비하면 세상은 그 덕에 여지없이 밝아진다. 문득 저녁참에 아궁이에 지핀 장작불이 그처럼 고마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간하는 《사목》이란 잡지가 있었다. 예전에 그곳 편집부에서 내게 어떤 신학 방법론을 갖고 있는지 묻는 전화가 온 적이 있다. 가톨릭교회 안의 평신도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주된 관심 주제와 연구 방법론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따로 방법론이 없어요. 그리고 한 가지 방법론을 고집해야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주제와 상황에 따라서 방법도 달라져야 하겠지요. 그래도 꼭 집어서 말해야 한다면, 방법론보다 세상과 인간을 보는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연민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떤 방법론이든 다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요.”
그 당시 나는 교회단체를 통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함께 일하던 수녀님들의 권유로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처음엔 노동신학을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 걸음이었는데, 거기서 생태신학이란 것도 처음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교수님이 강의 중에 그 잡지에 실린 내 인터뷰 내용을 읽어 주셨다. 이른바 진보적인 신학을 탐구하던 다른 평신도 신학자들은 대개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제시하였고, 나처럼 방법론 자체를 뒷전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시선이란 곧 인생을 대하는 태도이며, 사물을 보는 관점이다. 나는 그 시선이 제대로 잡혀야 뭐든지 제대로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것 이다.
예전에 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큰 지진이 발생하여 무수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 우리나라의 어느 목사님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내린 심판이라고 ‘신학적으로’ 해석하였다. 그 종파주의적 편견은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한편 바티칸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고난을 겪는 재해 지역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온 교회가 나서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두 사람이 보내는 눈길은 사뭇 다르다. 가엾은 여성들을 마녀로 화형에 처했던 종교 재판관의 눈길과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못박은 위대한 목수였던 예수의 눈길이 서로 다르듯이 말이다.
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0년 프랑스 리지외의 대성당 앞 광장에서 10만이 넘는 순례자들에게 ‘성인(聖人)’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성인들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제의 남자와 여자가 아니며, 결코 과거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항상 내일의 남자이며 여자입니다. 복음서가 약속한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다가오는 세상의 증인들입니다.” 교황이 말한 성인이란 사실 특별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다. 세상과 인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았던 종교적 천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리지외의 대성당은 스물넷의 나이에 요절한 한 여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인데, 그 여성은 바로 백여 년 전에 죽은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다. 그녀는 종교적 천재들에게만 빠끔히 열려 있던 성인의 길을 모든 이들에게 활짝 개방하였다.
위대한 성인들과 나를 비교할 때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들 성인이 걸어간 길을 나는 결코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엄격한 고행을 할 수 없으며 은수자처럼 사막으로 갈 수도 없고 교회학자들처럼 박식한 책을 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이교도의 나라로 갈 수도 없었다. 성인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분들을 구름까지 치솟은 산이라고 한다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둔덕과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큰일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용기를 잃지는 않았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모든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주어져야 한다.’ 나는 작고 약하다. 나는 지금의 나보다 크고 강할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며 수많은 불완전함과 일상적 의무를 실행하는 데 평범함을 수용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과 동료 수녀님들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내적으로 얼마나 빨리 화를 내며……, 집안과 정원에서 일할 때는 얼마나 느리고 서투른지……, 그리고 성당에서 기도할 때는 왜 그렇게도 조는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작고 곧고 짧으면 서도 간단한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것은 모든 이를 위한 길이 어야 한다.
─ 「장미비, 스물넷의 약속」, 모니카 마리아 슈퇴거, 바오로딸
소화 데레사는 “사랑은 사랑을 유혹한다”고 말했다. 사랑이 사랑을 불러들이는 그 길을 ‘작은 길’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필요한 것은 특별한 능력이나 지식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뤄지는 ‘크고 강하고 성실한 사랑’뿐이라고 말한다. 주방의 냄비 옆에서 또는 외양간에서, 환자를 간호하든 또는 환자가 되어 누워 있든, ‘작은 길’ 위에서는 사람이 땅바닥에서 바늘을 주워 올리든 황금성전을 짓든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거창한 행동을 보지 않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만을 보신다는 것이다.
데레사가 수녀원에서 지낼 때 참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수녀님이 있었다 한다. 그녀의 말과 행동, 성격 등 모든 게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데레사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웃으며 행동하려고 애썼다. 어떤 예술가도 자기 작품을 아끼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 역시 하느님의 작품이므로. 그러던 어느 날 그 수녀님이 “내 어디가 당신 마음에 들기에 항상 나를 볼 때마다 웃느냐?”고 물어왔다. 데레사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당신을 보는 게 기쁘기 때문이죠.” 데레사를 매혹시킨 것은 사실 그녀 안에 숨어 계신 예수였다.
겉사람을 보지 않고 신성의 불꽃을 간직한 속사람을 보게 되면, 누구나 성인의 씨앗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고, 그 사람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스스로도 소중한 인격임을 보증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처럼, 모든 사람이 ‘하늘’임을 알아채라는 전갈이다. 그러므 로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아울러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응답해야 한다. 사랑과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되, 그 안에 깃든 신성(神性, 하느님의 모상성)을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세상과 인간이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영등포 역전에서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 남루한 사람들에게 “내 형제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고, 죄 많은 인생을 가련하게 여기며 “내 자매여!”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전철을 타기 위해 아침마다 뜀박질하는 가장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고도 사랑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부추기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거룩함을 통해 타인 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나아가 게으른 자의 얼굴에서도 ‘사랑스러운’ 그 무엇을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눈길을 두고 우리는 ‘심안(心眼)’이란 표현을 쓴다. 마음의 눈이란 결국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줄 아는 눈이다. 그 눈길을 돌려 섬돌 위에 얹힌 신발을 보거나 내 방에 놓여 있는 가구를 보아도 다정(多情)이 느껴지고 내 영혼의 확장임을 느낀다. 벽에 붙여 놓은 종이 쪽지 하나에도 내 혼이 담겨 있고, 그 자체로 나 없이 나를 드러낸다.
마당에 돋은 풀이며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나 자신과 공명(共鳴)하기를 갈망하는 의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을 내 피붙이 살붙이처럼 여길 수 있다면 나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성인이란 먼저 자기 일상을 거룩하게 재조직하는 사람을 말한다. 내 눈빛을 부드럽게 하여, 나와 친해지고 싶어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에게 부드럽게 말 건네는 사람이다. 특별난 일을 하여 신문기사를 장식하지 않더라도 숨어서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리지외의 데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하여 어느 신부가 가르멜 수녀원에 찾아왔을 때, 원장수녀는 “그렇다면, 많은 다른 가르멜 수녀들도 성인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함께 살 던 공동체에서조차 평범하게 여겨졌던 여성이 프랑스 교회의 주보성 인이 되었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에서 다른 눈빛을 갖 는 영성이 우리에게 희망이 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