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 비 내리는데, 가톨릭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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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에 비 내리는데, 가톨릭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8.1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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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3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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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공일(空日)

비가 온 산을 적신다. 비가 오면 온 산이 제 빛깔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산길을 걷는 이의 마음마저 투명하게 적신다.

배추밭에 산책 삼아 다녀왔다. 오줌이라도 거름으로 내야 할 판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게으른 농부의 살림살이가 늘 그러하다. 좀 전에는 아랫동네 사시는 허병섭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이렇게 비오는 날 무얼 하느냐는 것이다. 내려와서 화투도 치고 차도 마시고 맘 편히 한가로움을 즐기자는 초대였다.

마침 아내는 아래윗집 처자들과 함께 진안에 귀농해서 살고 있는 분들의 집에 놀러 갔다. 어울려 면에 나갔다가 내친 김에 그 집에 눌러앉아 점심을 해결하고 온다는 통보가 온 지 오래지만 아내는 소식이 없다. 꽤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양이다. 저녁에라도 마음이 맞으면 놀러 와도 좋다는 목사님의 마음이 고맙다. 이런 날이면 서울이고 어디고 떠나 온 도시의 벗들이 그 리워지게 마련이다.

임길택의 시집 <똥 누고 가는 새>를 읽다보니, 「겨울밤」이란 시가 퍼뜩 눈에 들어온다. 잠시 전에 나 역시 이부자리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었을까. 이제 겨울이라 해야 할 만큼 추워서 점심나절 에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들어온 탓일까.

이부자리 펴놓은 곳만 따뜻하게 불 지펴
그 속에 발 묻고서 책을 봅니다
책을 읽다 눈 시려 고개를 들면
바람소리
방 밖에 가득합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평온한 그림이다. 그럼 나는 누워서 빗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방 밖에 가득한 늦가을 빗소리에 머리를 헹구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긴긴 겨울날 구들방 맛에 겨워 나 역시 산중에 살기를 희망했던 것일까.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하여간 지금은 그런 대로 이런 대로 좋은 한때다.

이렇게 평온한 밤, 비오는 공일(空日)을 맞이하기 위해서 거치는 길이 있다. 무심한 노동이다. 다시 임길택의 다른 시를 찾아 읽는다. 「해 떨 어지면」이란 시편이다.

몇 시인지 묻는 이 없고
며칠인지 알고 싶어하는 이 없어요
이름 누가 묻지도 않고 나이 알아갈 이도 없어요
일하다 배고프면 먹고 일하다 해 떨어지면 잠들고

이 정도의 도력(道力)을 쌓으려면 난 아직 멀었다. 그리고 그런 도력을 꼭 쌓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사람들 속에서 너무 심하게 가슴 앓이하지 않고, 함부로 부대끼지 않을 만큼만 의식이 성장했으면 좋겠다. ‘마음공부’라는 말이 저자에서도 흥건하게 흘러넘치는 요즘, 그 정도 마음공부 정도는 해야 이 거친 세상에서 상처를 덜 받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현주 목사(사진출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현주 목사(사진출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강진: 이현주 목사를 만나다

얼마 전에는 가톨릭노동운동을 함께하던 식구들이 산중엘 다녀 갔다. 난방 보일러도 순간온수기도 없는 추운 집에서 조금은 불편했을 텐데, 무조건 ‘좋다’는 것이다. 거친 일─경험컨대 노동운동은 다른 어떤 운동권보다도 분위기가 드셌다─에서 물러나 있는 처지에 서 보면, 못내 그 선배들에게서 빚지고 있다는 느낌도 떨쳐 버릴 수 없다.

마침 아랫집 처자가 민간요법을 공부하고 있는 덕분에, 찾아온 우리 선배들의 몸 상태도 봐 주고 몇 가지 조언도 해주었다. 모두 한 군데씩은 고장이 난 몸을 갖고 있었다. 불량한 식사와 과도한 활동, 그리고 스트레스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니면 마음의 병인지도 모른다. 사회운동을 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의 상처가 많아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고난 받고 있는 자매형제들 사이에서 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가련한 신세가 됨으로써 구원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아니던가. 그리고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마음의 상처는 매번 덧나게 마련이다. 치유할 책무는 늘 앞을 다투지만, 자신을 치유해 줄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없다는 게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이들의 어려움이다.

예전에 보은에 사는 어느 젊은 목사의 시골 교회에 가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신자라야 몇 사람 되지 않지만 활력이 있었다. 마침 단식 겸 수양회를 하는 모양이던데, 김복관 선생이 오셔서 단식을 지도하고 계셨다. 키가 작달막하신 분이 눈빛이 맑고 심성이 부드러워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개신교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선 무척 존경받는 어른이라고 했다. 내놓고 사회운동을 하시던 분은 아니었지만, 기독교 정신에 따라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조심스레 사는 분이라 하였다.

몇 해 전에 강진에 사는 역시 젊은 목사의 초청을 받아 남도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이의 첫 아들이 세례를 받는 날이었고, 이현주 목사가 예배 때 말씀을 나누어 주셨다. 이현주 목사라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라든가 <어둠 속에 갇힌 불꽃> 등 요수아 헤셀의 책들을 번역하신 분으로 지면을 통해 이미 잘 알던 분이었는데, 직접 뵙기는 처음이었다.

내 인상으로 이현주 목사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남아 있다. 깊고 오묘한 이치를 알기 쉽게 우리말로 풀어내시는 이야기꾼, 글쟁이였다. 하지만 그분은 글쟁이, 이야기꾼이기 전에 삶으로써 후배 목사들이나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김복관 선생도 마찬가지지만,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몸이 허락하는 대로 찾아가 주시는 분이다.

이런 자리에 가면 늘 허기가 돈다. 그래서인지 나를 보고 ‘샘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도 이런 어른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몰라서 그렇지 덕 있는 어른들이 우리 교회 안에도 계실 테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그다지 없다. 가끔 서울에 가서 사회운동을 하는 동료와 후배들을 만나 보면 대체로 건조하고 지친 표정들이다. 아직도 논쟁에 휘말리기 쉽고, 의도와 상관없이 한번 마음이 엉키면 도무지 풀어지지 않는다. 생각이 다르면 인간적인 실망도 따라오곤 하는 것 같다.

친구처럼, 선배처럼, 누이처럼, 그리운 스승 또는 도반

이럴 때 모두가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선배나 어른이 주변에 계신다면 문제가 많이 풀릴 것 같다. 삶에 에너지를 주는 분, 세월이 주는 지혜를 젊은이들의 활력으로 바꾸어 주는 분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오기백 신부나 미카엘 신부가 내게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고갈되지 않는 샘물 같은 분들이다. 십수 년을 만나면서 도무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떤 힘이 그분들을 듬직하게 잡아 주고 있는 것일까. 쉽게 말하자면 ‘하느님’이라 하겠지만, ‘기도’의 힘이라 하겠지만, 정작 다른 긴요한 비결이 있다면 배우고 싶다.

이참에 생각나는, 그래서 그립고 고마운 어른들을 떠올려 본다면, 많이 만나 뵐 기회는 없었지만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하유설 신부님,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서 로벨또 신부님. 인성회(지금은 가톨릭사회복지협 의회로 개칭되면서 복지적 분야에 한정된 활동을 하고 있다)에서 일하던 최재선 선생이나 한현 선생 등이 될 것이다. 한현 선생이 편집하신 <참사람 되어>는 일종의 초대였다. 성령의 흐름에 몸을 맡겨 투신하라는 거룩 한 초대였다.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이 너무 답답하고 좁다고 생각하지 않니
사람은 어느 곳에나 있지, 하느님처럼.
특히 걸음이 빠르지 못한 사람들,
어수룩한 사람들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꺼야.

그냥 사람소리가, 숨소리가 듣고 싶어 기다리고 있어.
크고 밝고 화려한 데로 가지 말고
기가 죽은 곳으로 더 쭉쭉 뻗어가 보자.
별취미라고
아니야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야
그렇게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야
우린 숨을 쉴 수 있어.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와 있는지 깨달을 수 있어.

함께 가지 않을래
(<참사람 되어>, 1994년 5월)

그리고 아, 그분, 가톨릭농민회를 하시면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의장도 맡아 주셨던, 지금은 괴산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는 김상덕 어르신. 이분들처럼 분명한 철학을 갖고 계시면서도 성령처럼 자유자재한 성품을 지녀야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버티게 해줄 만한 힘이 생긴다.

지금 교회 안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분들을 어른으로 모시고 영적 자문을 얻고 있는지 궁금하다. 예전엔 다들 친구처럼, 선배처럼, 누이처럼 가까이 계시며 정담을 나누었는데 말이다. 지금 우리 가톨릭 사회운동권에 지장(智將)은 누구이며, 덕장(德將)은 또 누구인가.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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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 필요하다고?

사실 그분들뿐 아니라 예전에 천주교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던 선배들과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역사성 있는’ 단절이 안타까운 현실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왜 과거로부터 배울 수 없을까. 왜 항상 매 순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고단한 일이다. 가톨릭만큼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종교 집단이 없건만, 선배들의 경험을 계승하고 그 자비의 바다를 넘나들지 못하는 현실을 우린 가슴 아파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 이것은 사람의 문제이기 전에 ‘영성(靈性)’의 문제라는 지적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 안에서 영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 되었다. 지금 자료를 들치고 있을 겨를은 없지만, 처음에 영성에 관한 논의가 나타난 것은 천주교 사회운동이 신자 대중 안에 파고들기 위해 방법적으로 채택된 구호였다.

영성이란 말은 독실한 신심이나 신학적 언어 구사력과 상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한 축인 신학적 관심은 결국 ‘우리신학연구소’와 같이 신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연구그룹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신학은 영성과 관련이 깊으면서도 꼭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일상을 돌보는 신앙이 사회적으로 관철될 때, 사회의 성화(聖化)는 시작된다. 즉 투신하는 자의 성화가 곧 사회운동을 거룩한 신앙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바람직한 이념(신학)은 있을 수 있어도, 바람직한 인간(삶)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간이란 영물(靈物)이어서 배우지 않아도 영적으로 고양된 영혼을 알아보게 마련이다. 또한 사회성을 뛰어넘는 매력이 발산되어야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여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여기서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단순히 조직확장이 아님은 분명하다. 복음적 진실을 온몸으로 살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연결되고 각처에서 제 나름대로 원칙을 갖고 복음을 실천한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우물에서 물을 마셔야 한다는데..수입된 영성, 대안은?

이런 점에서 뜻있는 가톨릭 활동가들의 영성을 고양시키는 데 알게 모르게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은 예전에 인성회에서 발간하던 소책자들일 것이다. 인성회는 세상과 교회의 담장을 헐어버리고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하였던 지학순 주교가 만든 것으로, 운동과 복지의 통합을 요청하였다. 즉, 사회 변혁과 당장에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혁명과 자선, 구조적 사랑과 일상적 사랑을 통합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많은 문건이 제출되었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갈증을 채워 주고 마음의 방향을 돌보아 주었다.

그러나 이 영성적 견해들은 대부분 수입된 영성이었다. 가톨릭교회야말로 보편적인 진리를 설파한다고 자부하는 집단이기에, 진리는 어딜 가나 진리라는 의미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에서 다루고, 우리의 영성을 우리 조상들과 자신들의 지혜에서 퍼오고, 우리들의 언어로 풀이되어 있는 영적 지침이 생산되었다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 한국교회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열거한 바 있지만, 예전에 우리가 영적 스승으로 경험하였던 이들은 대부분 외국 선교사들이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연대감을 느끼던 한국 신부들은 많았지만, 영적인 빛의 통로가 되어 주었던, 그래서 상처받은 활동가들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목자들은 그렇게 흔치 않았다. 그러니 자연 영성적 측면은 다른 아시아 교회나 유럽에서 수입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깊이 있고 좋은 영적 담화이긴 한데, 정서상 확 와 닿지는 않는 그런 이른바 ‘해방의 영성’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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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영성이 왜 없겠는가

마치 실천하기도 바쁜데 이론을 정립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시각 때문인지 개신교에서 민중신학이 발전된 데 비하여 한국 가톨릭교회는 그저 수입된 중남미 해방신학에 의존한 채 고유한 진보적 신학을 제출하지 못했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신학의 경우는 다른 많은 이유가 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만으로 사회적 실천의 이론적 뒷받침은 충분했다는 점, 중남미 해방신학이 우리처럼 군사독재의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에 유효적절한 신학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만큼 신학자의 숫자가 많이 없었다는 점 등.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평신도들도 대체로 외래 신학을 학습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지 나름의 신학적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영성을 다루는 일에서야 우린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떼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여전히 영성은 구호에만 그치고 일상과 활동을 규정하는 준칙이 되지 못한다. 실상 영성은 운동의 방책이 아니라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럼 우리에게 영성이 없는가. 왜 없겠는가. 다만 그러한 영적 체험들이 만인에게 나누어질 만한 언어를 얻고 있지 못한 것뿐일 것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텐데, 그 언어를 얻지 못한 까닭에 스승이나 선배들의 영적 체험이 다른 세대들이나 진지하게 투신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새로이 영성신학을 공부한다고 이런 언어를 획득하는 것은 아닐 성싶다. 개개의 활동가들이, 또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고비고비마다 얻어 누리는 은총의 순간들을 깊이 묵상 하고,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일례로 생활글 쓰기 운동을 벌여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일상과 운동의 맥락을 적어가되 성서의 빛,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적어 보면 어떨까.

더 가깝게는 그런 방식으로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가급적 자 주, 더불어 활동하는 동료들에게 편지를 쓰자. 가장 위대한 방식으로 드러난 편지가 ‘바오로 서간’이 아니던가. 동료들에게 삶의 내밀한 맥락을 하소연하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위로를 주는 답장을 적어 내려 간다면, 이 글들이 모여서 ‘우리시대의 복음서’가 되고 살아 있는 텍스트(경전)가 될 것이다. 바오로 서간에 등장하는 내용이 모두 시공을 초월하여 진리가 아니듯이, 꼭 이 편지글이 완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한계 안에서 드러난 진지한 사색의 결과라면, 거기서 감동이 발생하고 읽는 사람의 영혼을 고양시킬 것이다.

우리의 신뢰를 부족한 채로 소박하게 담아내는 그릇

그리고 이러한 사색의 결과가 만인에게 나누어질 수 있는 매체가 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그런 역할이 월간으로 발행되던 <참사람 되어>에서 부담 없이 행해졌지만, 이제 그 잡지는 그동안의 성과를 모아서 단행본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미 한 단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발간한 토마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이란 책자는 “신앙은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모든 삶, 모든 진리, 모든 희망, 모든 현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하고 찾기 위함”이라고 말하는데, <참사람 되어>는 이처럼 거룩함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한다.

거룩함으로의 길은 신뢰와 사랑의 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 살고 거룩한 은총이라는 숨겨진 샘물을 매순간 마시되 복잡하고 부수적인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본질에 관심을 둔다. 자주 단순한 기도와 신앙에로 나아가며, 하느님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에 사랑을 다해 순종하며, 특히 자신의 본분이 요구하는 의무에 있어서 그러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서 자신의 이웃과 형제를 사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얻기까지 치러야 할 생활적 과정 역시 여전히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이력을 따지지 않는 선언은 그야말로 선언에 그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이 책에서도 밝히듯이, “도덕적인 약함을 이겨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비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력한 일상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하느님께 대 한 우리의 신뢰를 부족한 채로 소박하게 담아내는 그릇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민해 목사가 지인들과 더불어 발행하는 월간지 <풍경소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풍경소리>는 “좋은 것을 나누는 데 힘써라”는 옛 어른의 말씀을 거울삼아 발행하는데, 알음알이로 개신교 독자들에게 주로 알려져 있다. 소박한 편집으로 정선된 읽을거리를 원하는 이들에게 구독료 없이 제공하고 있다.

매호마다 제작비와 발송료, 그리고 작업비 등을 밝히고, 후원 받은 발간 비용마저 소상히 밝히고 있다. 돈 문제에 있어서의 투명성과 가장 소박한 형식을 취한 것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원고마저도 한 쪽짜리부터 장문의 글까지, 삶의 현장에서 낚아 올린 소중한 체험과 성찰이 담겨져 있 었다. 물론 번역도 다수 있지만 아시아인의 영성을 훔쳐보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졌다. 잡지 형식으로 나오던 <참사람 되어>를 다시 보는 것 같아 반가웠고, 소박하고 진지한 영혼을 보는 맛으로 흐뭇했다. 편집자의 글을 하나 읽어 본다.

가을 아침 햇살은 시방 저에게 내리는 은총입니다. 악몽 같은 지난 밤 일을 다 감싸 줍니다. 상큼한 순간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어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 봅니다. 그저 기도하고픈 마음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회의 은총이다. 그 밖에도 최완택 목사가 이끄는 구로동의 <민들레교회 주보>도 마찬가지이지만, 상업적으로 대량 발간하지 않고 소수의 독자들이 독자로, 필자로 참여하면서 만들어 가는 글모음들은 적은 비용으로 자본주의의 바다 속에 떠 있는 희망의 섬이 된다. 이렇게 먼저 생각한 사람이 먼저 움직임으로써 세상에 축복을 주는 게 살아 있는 영성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대의는 먼저 일상에서 실천되어야  

한때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일상사는 무시해도 욕먹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목적이 좋다면 방법은 어떠해도 좋다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자본 중심의 세계에 저항하는 혁명을 노래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생활 습성과 물량주의를 의심하지 않았던 시대, 폭력을 몰아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던 시대가 있었다.

너무나 눈앞의 현실이 엄혹하고 절실했기 때문이라면 그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중에 하나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몸에서 나온다. 예수가 스스로 못박히지 않았다면, 누가 예수, 곧 진리를 위하여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가 인간적으로 매력을 발산하지 않았다면 어떤 제자가 세상에 어리석게 보일 그의 부활을 선포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거부하는 사회체제와 관행을 살펴보고, 또 자신이 그렇게 만사 제쳐놓고 이루려고 하는 사회체제와 삶의 태도를 성찰해 보면 어떨까.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체제의 메커니즘을 생활 속에선 순응하고 있지 않은지, 또 우리가 대적하고 있는 세력처럼 조직과 힘에 의존하여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우리가 하는 운동이 근본혁명이 되도록 꿈 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혁명을 달성하는 방법 또한 혁명적으로 재구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집단적으로 힘들다면 개인이 먼저 해내고, 여지가 생긴다면 몸담고 있는 조직 자체의 운영 시스템을 대안적으로 바꾸어 볼 의향은 없는지.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천주교운동의 정체성

이참에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천주교 사회운동의 신원에 대한 것이다. 우선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지칭하고 있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의 효시는 말할 것도 없이 1974년에 창립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이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온 운동은 1984년에 창립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로 이어졌다. 이후 평신도 연합단체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으로 바뀌었다. 명칭이라는 것은 역사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바꾸거나 훼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묵은 것을 떠나 보내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게 나의 소신이다.

이들 단체의 명칭에서 드러나는 신원은 ‘사회정의구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단체라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사회적 불의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불행한 시대를 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운동을 ‘사회정의구현’으로 한정하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의 징표를 따라 읽지 못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명칭만 그렇지 실상은 더 광범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명칭의 상징성이 주는 효과는 우리들의 변명을 항상 넘어서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들은 오늘날 시대의 징표를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에서 찾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적어도 현실 판단을 해볼 때, 우리 운동이 지향하는 것이 반(反)자본주의인 것은 분명하지만, 생활현장에서는 탈(脫)자본주의가 선행되어야 희망의 한끝이나마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대항하여 전투적으로 저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자본주의적 가치와 생활양식을 일상 속에서 거부하고, 소박하며 공동체적인 삶을 먼저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서 비(非)자본주의를 사는 것, 삶의 혁명을 징검다리로 하여 체제의 혁명을 희망하는 것이 요긴하다는 뜻이다. 그 고리를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또는 공동체적 이상에서 엿볼 수 있기에, 이러한 시대적 징표는 희망의 실마리로 여겨 마땅 하다.

또한 편의상 말하자면, 조직적 측면에서도 과거 사회운동에 투신하던 이들이 사실상 수없이 존재이전을 하는 과정에서 생태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실이다. 우리 운동이 왜 과거의 환경사제단이나 지금의 생태주의자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것일까. 언뜻 생각건대 과거 역사에서 교조적 마르크시스트들이 아나키스트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배척했던 아픈 역사를 보는 것 같다. <랜드 오브 프리덤>(Land of Freedom)이란 영화에서 보듯이, 스페인 내란 당시에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의용군 사이에서도 노선적 갈등으로 총격전이 오고갔음을 서글프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비약하는 것 같지만, 작은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운동을 왜소화시키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도망간 원수는 구조적 불의만이 아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 또는 이기적인 근성(根性) 또한 우리의 원수이다. 그래서 안팎의 혁명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이에 적절한 신원의식이 필요하고, 이를 담는 새로운 그릇도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운동의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항상 우리는 우리 운동의 목적만을 명시하지, 우리 운동의 원천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고 솔직히 고백하여야 한다. 앞서 이 문제를 ‘영성의 문제’라고 이야기한 바 있지만, 우리 운동의 원천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운동은 언제든지 우리가 미워하는 원수를 닮아갈 위험이 있다. 박노해 시인이 키 큰 나무 사이를 지나가노라니 내 몸이 어느새 커졌다고 했는데, 적과 싸우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적을 닮아갈 위험은 어떤 인간과 조직에도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 운동의 원천이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분의 생사고락(生死苦樂)에 견주어 보지 않는 운동은 이미 가톨릭운동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 많은 운동진영 중에서 유독 가톨릭운동이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면, 아마도 운동의 목적 자체가 ‘사회적 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도록 자극하고 격려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운동일 것이다. 아니면 누구 말대로, 사람이 더 쉽게 착해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게 우리의 목적일 것이다. 그래서 우린 우리 운동을 구태여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자니, 탐욕적 세계관을 바탕으 로 하는 자본주의는 성서의 맘몬(財物神)처럼 폐기해야 할 표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하는 그룹 자체가 이미 거룩한 사람들(聖徒)들이며, 그들이 모인 곳이 곧 거룩함을 경축하는 ‘교회(엑클레시아)’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의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바오로 사도가 서로 다른 노선을 가지고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였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새로운 가톨릭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우리 운동의 원천에 대한 묵상을 선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명칭 자체를 이에 걸맞게 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가톨릭운동연합과 같은 포괄적 함의를 갖는 명칭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보다 광범위하게 운동진영을 확장하기 위하여 ‘가톨릭 활성가 네트워크’의 형식을 빌려 와도 좋을 것이다. 실상 우리 교회가 복음이 주는 탄력성을 잃어버리고 완고한 권위주의의 늪에 빠져든 것은 ‘조직의 비대화’ 때문이었음을 기억한다면, 그 제도교회의 대안으로 마련되어야 할 새로운 교회 공동체는 조직의 형태보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결사의 형식을 가진 네트 워크 방식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원칙적으로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은 결코 대중운동일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전위(前衛)’이다. 신도들 각자가 자신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使徒)’로서의 자의식을 가져야 하는 까닭이다. 교회 안에 ‘대중’이란 없다. 구태여 대중을 찾자면,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나라 운동의 전위로서, 사도로서 세상을 좀 더 신명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활성가(Animater)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서와 교부들의 사상을 공부하고, 이 빛에 비추어 세상을 읽고 변화시킬 방법을 탐구하면 어떨까.

더불어 각 단체와 조직의 역량을 살피는 작업보다도 각 사도들, 활성가들의 역량을 살피는 작업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각 단체라는 경계를 넘어서 각 구성원들이 저마다 지닌 자질을 내어놓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중심을 꾸리는 사람들은 각 사람들이 지닌 자질들을 포착하여 그 자질을 필요로 하는 곳에 연결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 안의 모든 성원이 곧 나의 자산이요, 나의 자산이 곧 다른 모든 공동체 성원의 자산이라는 의식이 키워져야 한다. 그 래야 낱낱의 사람들이 가진 바가 적어도 어느 한 사람 부족할 줄 모르 고 풍요롭게 하느님의 일을 대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기사에 따르면, 제자들이 가진 바 재산을 사도들 발 앞에 내어놓고 필요한 대로 나누었기 때문에 그중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바탕을 모두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빵을 나누었다는 데서 찾는다. 즉 성령 안에서 일치하고, 구체적으로 물질마저 나누어야 새로운 하늘, 새 땅이 예기치 않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불현듯 찾아올 것이다. 이를 믿는 게 또한 신앙이 아니던가.

예전에 헨리 나웬이 쓴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사목>(분도출판사)라는 책을 감동 깊게 읽은 기억이 난다.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하려면, 그 상처의 깊이를 사목자 자신이 깊이 체험한 연후라야 제대로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민중을 고난 속에서 해방시키려면 해방자 자신이 고통의 한가운데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무력감에 빠져 있는 영혼을 구제하려면, 구출자 자신이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만신창이 되거나 허무의 심연을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너무 깊어서 치유자 자신이 아예 헤어나지 못할 지경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는 아무도 구제하지 못한 채 자신의 번뇌에 휩싸여 또 다른 나인 너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다.

우리 운동이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성원들을 서로가 치유해 줄 능력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죄로 고통 받는 이에게 사제가 고해성사를 베풂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어 주듯이, 우리 공동체 안에 백신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다면 우리 운동이 얼마나 활기차고 기쁜 투신의 자리가 될 것인가. 그런 가톨릭운동을 가능케 하는 힘은 우리 자신들의 철저하면서도 겸손한 반성에 있다. 하느님 앞에 발가벗은 중생으로 앉아 뜨거운 눈물 철철 흘리는 회심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시옵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 시편 138,1-3

이 밤에 비 그치고, 바깥은 흐린 하늘로 적막하다. 불 끄고 방문 닫아걸면 세상은 온통 칠흑이다. 밤이 이슥할 무렵에 선방(禪房)에 하나씩 불 밝혀지듯이, 이젠 우리가 가슴속에 아직도 타다 만 불덩이 하나씩 재로 남기 전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불꽃을 이루고, 그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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