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밤새 신열을 앓고 있는 목숨들에 대한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밤새 아픈 것들이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이윽고 그 신열을 앓고 난 뒤에 병색을 여의고 환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네들이 아파하는 동안에 나 역시 밤새 옆구리가 결리고 겨드랑이가 쑤신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바로 꽃나무 한그루와 내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연대감이다. 혈육처럼 만져지는 꽃망울과 더불어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더할 나위 없이 알 길 없이 다가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이러한 공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 아, 좋다! 하는 탄성이 입가로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다. 하느님께서 처음 하늘을 여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에도 그러한 전율과 긴장감이 충일했을 것이다. 아하, 조것들! 하였을 것이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고 질렀던 탄성은 하느님께서 느꼈을 탄성을 닮아 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3, 23) 인간과 자연은 하느님이 물질성을 획득한 것이며, 육화 신비를 통해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에 대한 감각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영적 감각으로 건너간다.
어둠에도 무늬가 있다
1999년에 서울을 탈출하여 무주의 오백 고지 산간마을에 자리 잡으면서 아이도 생기고, 내 삶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그중에서도 산골생활이 주는 가장 충일한 경험 가운데 하나는 ‘밤’에 관한 감각이었다.
도시는 사람들이 바다를 밀어내고 간척지를 개척하는 것처럼 밤을 밀어내고 어둠을 잠식해 들어가지만, 산골엔 여전히 밤이 살아 있다. 밤은 어둠인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어둠에 친숙해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심연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어둠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지 않는다. 그 한밤에도 생동하는 목숨들이 있으며, 그 밤에도 어둠은 검정색 크레파스로 가득 채운 도화지처럼 단조롭지 않다. 수묵화를 보듯이 어둠에도 무늬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한낮에는 도무지 감지되지 않았던 세계가 열리고 그 세계 안에서 우리는 적묘한 평화를 느낀다.
달과 별은 대낮의 해처럼 어둠을 밀어내지 않는 빛이다. 해처럼 눈부시지 않아서 오래 바라볼 수 있을뿐더러 보면 볼수록 친밀한 정서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 우리 삶의 언저리에서 떠나보내지 않아도 좋을 동무처럼 느껴진다.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어둠, 나의 어설픈 발걸음과 흠집 많은 생애를 있는 그대로 부끄럼 없이 받아줄 것 같은 빛이다. 그래서 밤은 편안하다. 자비하신 하느님도 그러하지 않을까. 생동감 있는 하루분의 노동을 다하고 난 뒤에 열뜬 근육을 식히며 내면의 깊은 그늘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은 밤으로부터 온다. 이런 점에서 도시의 대낮 같은 밤은 어둠이 주는 축복의 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
내면의 깊은 빛이 하늘의 높은 별빛과 조응하여
보안등도 없는 산골에 살면서, 서울에 다녀올라치면 그믐밤 별빛 조차 없는 산길 초입에서 길이 어둠에 묻혀버린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길을 찾아야 산속에 자리한 ‘집’으로 갈 수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둠만으로 자욱한 눈앞을 눈 뜨고 바라보다 보면, 이윽고 눈이 열려 길이 자신을 드러낸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빛이 어두운 앞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그믐밤에 대한 경험은 천공의 별빛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그 빛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세상의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때에 신체에 갇혀 있는 내면의 깊은 빛이 하늘의 높은 별빛과 조응하는 것이다.
오감(五感)이 열리면, 그 열린 감각으로 다른 살아 있는 생명을 느끼기 시작한다. 산골생활은 아침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몸을 뒤틀고 있는 자연사물과 작물들의 소리 없는 생명력을 알아차리게 한다. 눈곱을 떼기도 전에 헐렁한 옷차림으로 건들거리는 바람을 저고리 사이로 느끼며 가까운 밭으로 향한다. 발끝으로 풀잎 끝에 영글어 있는 이슬을 털며, 문득 그 이슬을 주시하며, 특별히 마음을 담아 키우는 작물에게로 가는 것이다. 여름이면 한낮의 열기로 처져 있던 작물들이 밤새 몸을 추슬러 새벽엔 제 몸을 곧추세우고 있다. 그 팽팽한 생명력. 우리도 그렇게 생생한 목숨을 나누어 갖고 있는 것이다. 매일 하루를 내 생애의 첫날처럼 맞이하라던 어느 현자의 말이 떠오른다.
작물을 키운다는 것은 지상을 순례하는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깨닫게 하는 놀라운 경험으로 이끈다. 씨를 뿌리고, 땅속에 묻혀 있는 씨앗이 발아하여 싹을 틔우고, 연둣빛 어린 작물이 성장하면서 이윽고 푸르청청한 ‘무엇’이 된다. 그리고 열매를 맺고 그 생애를 남김없이 버린다. 한 생명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사람의 공력뿐 아니라 온갖 자연의 은총 안에 있어야 한다. 제때에 비가 내리고 제때에 햇볕을 쪼여야 한다. 땅속의 미물들이 활동하고 신선한 바람이 잎사귀를 뒤집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 는 사이에 ‘그분’께서 우리의 삶에 참여하신다. 자비하신 그분과 그분이 창조하신 자연에 힘입어 우리는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서로 기대어 살고 있으며, 그 자비의 원천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 생애에 밤낮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덥고 추운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목마르거나 눅신하게 젖어 있는 나날도 있다. 생산적인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는 때가 있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휴식의 때도 주어진다. 태풍에 뿌리마저 뽑히는 목숨도 있고, 그 바람에 사정없이 몸을 흔들어대야 하는 시간도 있다. 늙은 농부의 이 맛살처럼 고랑 깊이 파인 주름처럼 생애는 때로 가혹하고 때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 푸르고 넓은 호박잎조차도 늦가을 된서리에 온전히 목숨을 맡기듯이, 작물들은 때가 되면 아낌없이 제 목숨을 자연에 상 납한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깊이 있게 만든다. 우리의 죽음조차 하느님 섭리 안에 안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시골에서 산다는 것: 자립생활
도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뿐이다. 돈은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의식주와 문화)을 제공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시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돈을 버는 일이다. 우리가 표현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기실 우리 활동의 근본적인 동기는 ‘돈벌이’에 있다. 돈을 벌어야 벌거벗지 않고 치장하며, 굶주리지 않고 맛난 것을 먹을 수 있으며, 컴컴 한 굴속에서 쾌적한 아파트로 보금자리를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이 갈망하는 문화적 욕구를 채울 수 있으며 세상의 주류에 합류 할수 있다. 돈은 우리에게 소속감을 주고, 관계망을 넓혀 주며,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전기가 끊어진 채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처럼, 돈이 없다면 우린 절망하면서 당장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긴박감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산골생활은 자력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다시 조직할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돈의 영향을 줄여가면서 자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도시에서 옷은 실내복과 외출복으로 나뉜다. 한편 시골에서는 작업복이 추가된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값이 비싼 외출복의 사용빈도가 거의 없고 사실상 작업복의 용도가 많게 되는데, 작업복으로 쓸 만한 옷은 구하기 쉬울뿐더러 튼튼하기만 하다면 언제까지라도 사용할 수 있다. 한편 간단한 봉제기술을 익힌다면 손수 만들어 입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먹을거리 문제는 그야말로 웰빙 차원에서 깨끗한 먹을거리를 직접 기르거나 채취하여 먹을 수 있느니만큼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작물을 키우는 일이나 산에서 채취하러 발품을 파는 것 자체가 가장 아름답고 확실한 운동이 된다. 그리고 잉여농산물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이보다 소중한 선물이 없을 것이다. 집 문제는 애초에 농가주택을 얻거나 새 집을 짓거나 할 것 없이 시골생활은 그 생활을 지속하는 동안에 집을 보수하거나 덧대거나 주변을 가꾸어 나가는 과정에서 주거에 대한 창조적 발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결국 손수 망치를 쥐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 기계와 연장 사용, 손노동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시골에서는 가장 자연친화적인 생활방식이 가장 저렴한 비용을 치르게 할 것이다. 손수 짓고 만들고 꾸미는 가운데 우리의 감각은 더욱 발달하고 우리의 뇌는 더욱 활성화되며 우리의 정신은 더욱 창조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실제적인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작물을 잘 키우고 쓸모 있게 집을 짓고 살뜰하게 옷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경험과 식견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실생활에 직접 적용되는 것이기에 호기심을 자극하며, 일상적인 것뿐 아니라 터 잡고 사는 주변의 자연환경에 자극을 받아 세상과 우주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지혜가 확장될 것이다. 눈앞에 만져지는 사물을 직접 보면서 책을 펼쳐 이해를 돕는 것은 인터넷이나 책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와 사뭇 다르고 더욱 생생한 배움의 기쁨을 낳게 마련이다.
혈족처럼 평생 그리운 것들
아름다운 생활은 ‘자연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이고 혈족적인 관계’ 를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음식에서부터 옷이나 마당에 있는 돌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세계와도 사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보살핌과 애정으로 만든 것들이 우리 주변을 둘러싸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 집에도 시골에 있을 때 내가 직접 만든 책장이 하나 있는데, 그 느낌은 남다르다. 내가 지은 곡식 역시 내 생명을 나누어 갖고 있으므로 돈으로 환산하기가 참 어렵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고향에 대하여 갖는 마음도 이러할 것이다. 추억이 담겨 있는 숲과 오솔길과 마을, 그리고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이 모든 것은 그 사람과 사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마음에서 일렁이는 혈족이 된다. 평생 그리운 것들이 된다.
시골에 살면서 농사만 아니라 좀 더 예술적인, 그러나 생활에 밀착 된 손노동을 시도해 보는 것도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 할 것이다. 이를테면 산책하다가 주운 나뭇가지를 깎아서 숟가락이며 젓가락을 만들어보고, 넓은 마당 한편에 작업실을 만들어 널판을 쌓아놓고 책상이며 의자, 책꽂이, 다탁(茶卓) 등 생활소품들을 직접 만들어 보아도 좋다. 우편함도 만들고, 마당엔 돌탑을 쌓고, 꽃밭을 가꾸어도 좋다. 그리고 요즘은 시골일수록 지역사회마다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이 많으므로, 틈틈이 배워서 도자기도 만들어보고, 아니면 풍물이나 다른 악기 하나쯤 배워 볼 만하다. 어떤 이들은 취미로 시작했으나, 배우는 과정에서 숨어 있는 재능이 솟아나 훌륭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경우도 많다.
축구를 보는 것보다 어설프더라도 직접 공을 차는 게 낫다. 그처럼 남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어설프더라도 제가 만든 작품을 간직하고 즐기는 기쁨이 더 크다. 그러한 방식으로 내 혼이 이승에 묻어나고, 내 에너지가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러면 내 살아 있는 재능이 축복 가운데 확장되고 꽃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신성의 불꽃이 내 육신을 통하여 몸을 얻는 것이다.
내가 오늘 냇가에서 주워온 돌 하나에도 내 손끝을 통해 묻어난 혼이 담겨 있다. 하물며 내가 직접 만든 물건이야 오죽하겠는가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게 아니라, 본래 내 안에 있던 것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새겨져 있었던 것을 의식 밖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 자신을 통하여 현양된다.
아이들은 무엇을 먼저 발음할까?
자녀교육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흔히 유치원생 때부터 시작되는 제도교육의 틀 안팎에서 입시 위주의 장구한 교육 여정에 나서게 된다고 믿는다. 아이들은 한 글자라도 더 배우기 위해 미사 참례마저 상대화시키는 융통성을 발휘한다. ‘공부’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아이들은 물론 부모까지 동원령에 부응하며,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렇다,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아이들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호기심과 판단과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알아야 한다고 사회가 정한 내용을 답습하고, 입시에 나올 만한 주제에 관하여 학습하고, 본인의 창조성은 제한된 영역 에서만 허용된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교육은 모태에서, 돌잔치 상 앞에서, 아이의 첫 발음에서 이미 시작된다. 부모에 의해 선택된 언어, 환경에 의해 걸러진 이야기가 주입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생애의 초기부터 상당한 시간 동안 특정한 영향을 받은 아이의 인성이 평생을 가름하 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말을 처음 배울 때 어떤 단어를 발음하는가 그들의 장난감은 엄마, 아빠를 발음하고 나면 대번에 텔레비전, 핸드폰, 햄버거……를 연발한다. 슬픈 현실이다.
나머지 그 아이들이 배우는 낱말들은 동물이나 식물, 과일 이름 등인데, 그들이 발음한 동식물은 주로 동물원에 갇혀 있거나 꽃집에 있거나 대형마트에 있다.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물을 보고 익히고 발음하기란 도시생활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이 어찌 삶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까? 무수히 죽어가는 군상들을 컴퓨터 게임과 텔레비전에서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눈앞에서 실제로 상처받고 있는 생명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아이들은 체질적으로 사이버 공간과 실제상황을 헛갈리기 쉽다.
우리의 첫 아이를 시골에 내려온 뒤에 얻게 된 것을 나는 축복으로 생각한다. 아이는 자기가 본 것을 발음한다. 이거 저거, 하다가 사물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한다. 나비와 풀, 하늘과 구름, 비와 물, 그리고 고추와 상추, 접시꽃과 백일홍을 발음한다. 마당에서도 놀고 밭에서도 논다. 지렁이를 만지고 흙을 밟는다. 어느 날은 아이가 죽은 쥐를 손에 들고 와서 “불쌍해, 불쌍해!”하면서 울먹여서 우리를 놀라게 한 적 도 있었다.
“나무야 사랑해!”
익명의 다수를 만날 기회는 별로 없지만 시골에서는 구체적 개인 을 만난다. 그들은 손님이고 이웃이고 우리 가족과 마음이 오가는 사람들이다. 호감을 느끼는 이들 속에서 아이는 세상을 ‘안전하다’고 여기게 된다. 자신을 품어주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제 집처럼 지내고, 살아 있는 것에 민감하다. “나무야 사랑해!”하고 우리가 나무를 끌어안 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도시의 가로수라도 끌어안고 애정고백을 하곤 한다. 아름답다. 생애의 초기 3년, 길게 잡아 5년 안에 한 사람의 자아가 완성된다고 발달심리학에서는 말한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 아이들은 본래 자연에서 왔으므로.
우리는 ‘오래된 미래’란 말을 요즘 흔히 듣곤 한다. 노르베지 호지란 여성이 쓴 책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출판사도 있다. 시골생활은 오래되었으나 오늘날 새롭게 조명된다. 미래란 ‘바람직한 내일’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그 정신과 방법을 ‘바람직한 어제’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흙에서 온전히 떠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휴일이면 강으로 산으로 고향으로 가려 하고, 나 늙으면 ‘이니스프리의 호숫가’로 가리라 마음먹는다. 그러므로 흙은 인간의 과거이면서 인간의 미래가 된다. 그러나 한번 흙을 떠난 사람이 인간의 미래를 찾기란 쉽지 않다. 관성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얻어질 수 있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미래에서 손짓하시는 하느님을 오늘 이 시간으로 불러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의 생생함을 오늘 생생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길과 방법은 다양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번 문턱을 넘어서면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주변을 잘 살피고 가능한 한 무리 없이 다음 세계로 건너갈 준비를 하는 게 필요하겠다. 여기서부터 생활양식을 점검해 보고, 마음자리를 살필 일이다. 그 모든 과정이 이승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