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교수대에서 영원한 길 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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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교수대에서 영원한 길 위에 서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7.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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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고백에서 저항으로-4

전쟁과 조국

1937년 히틀러가 군 장성들을 모아놓고 전쟁계획을 설명하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장성들의 쿠데타 모의가 시작되었다. 군 최고사령관 베르너 프라이헤르 프리치 장군조차 전쟁에 반대하자, 히틀러는 그를 밀어내고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신설한 뒤 자신이 직접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제국교회 새 감독인 프리드리히 베르너 박사는 총통 생일인 4월 20일에 독일의 모든 목사들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해야 한다는 포괄적 법령을 발표했다. 당시 히틀러를 메시아로 여기는 태도가 두루 퍼졌고, 누구도 거기에 맞서지 못할 때 고백교회 목사들은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의 조상에 절하기를 거부했듯이, 유대인이 느부갓네살의 동상에 절하기를 거부했듯이, 그들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했다.

한편 1939년 본회퍼에게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본회퍼는 침략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민이 깊어졌다. 친분이 있던 런던의 벨 주교와도 의논하고, 라인홀드 니부어와 친구 폴 레만, 에큐메니컬 협의회의 라이퍼 등의 도움으로 유니언신학교의 초대장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본회퍼는 미국으로 가는 동안 베트게에게 수많은 엽서와 편지를 부쳤는데, 깊은 갈등 속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오오 주님, 처음과 나중은 당신의 것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짧은 생은 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 저 자신을 찾지 못했지만,
오오 주님, 명료함이 당신과 함께 있고, 빛은 당신의 집입니다.
잠시만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온갖 버둥거림도 잠잠해져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생명의 물로 기운을 회복하여
예수와 영원토록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1939년 6월 12일 뉴욕에 도착한 본회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믿는 사람은 달아나지 않는다”(사무 28,16)는 구절을 묵상하며 고국에 다시 돌아갈 생각을 접을 수 없었다. 미국에 머무는 것이 달아나는 행위와 다름없고, 미국에서 도망치는 것이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길이라고 느꼈다. 6월 26일 일기에는 “그대는 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2티모 4,21)라는 구절을 읽고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그는 뉴욕에서 꼬박 스무엿새 지내고 안전한 미국을 떠나 독일의 불구덩이 속으로 돌아갔다. 9월 1일 새벽 독일군이 폴란드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히틀러 암살 모의-고백에서 저항으로

본회퍼는 나치 친위대들이 폴란드인 50명을 다리 복구사업에 투입하고, 완료되자 유대교 회당에 몰아넣고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폴란드 총독이 된 한스 프랑크는 “폴란드인은 독일 제국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상당수 장성들은 나치 친위대의 사악한 만행에 제정신을 잃고 격분했다. 히틀러는 T-4 안락사 프로그램을 가동해 유전적 결함을 안고 태어난 독일의 어린이들과 심신장애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서부전선으로 확대되어 1940년 5월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6월 14일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승전소식에 독일 시민들은 열광했지만, 본회퍼와 동료들은 딱정벌레처럼 긴장했다.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입은 불치의 병을 치료해주고 파산한 독일을 예전의 위대한 독일로 회복시켰다고 믿는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구원자로 찬양하였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그가 모든 것을 새롭게 했다”고 믿었다. 이 시기에 본회퍼는 <윤리학>을 집필하면서 군중이 떠받드는 성공에 대해 비판했다.

“성공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고 성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세계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달린 이의 모습은 낯선 사람일 뿐이며, 기껏해야 연민의 대상일 뿐이다. ... 역사는 지상의 어떤 권력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 솔직함과 냉정함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격언을 주장한다. 바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 십자가에 달린 이의 모습은 성공을 기준으로 삼는 모든 사고를 무력하게 만든다.”

독일의 저항세력에게는 우울한 시기였지만, 이들은 히틀러가 성공을 통해, 끊임없이 달아오르는 이기주의와 자기숭배의 축제를 통해 독일을 파멸시킬 것이라 염려했다. 한편 병역소집을 피하고 게슈타포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본회퍼는 매형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nanyi)의 주선으로 국방정보국(Abwehr)의 첩보원으로 위장하기로 결정했다. 카나리스와 오스터 장군 등이 이끄는 국방정보국은 반나치운동의 새로운 구심이었다.

본회퍼는 런던과 스위스를 오가며 독일에도 저항세력이 있음을 알렸다. 이 무렵 본회퍼는 국방정보국의 요청으로 7명의 유대인을 스위스로 탈출시키는 ‘U7’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스위스는 중립국이었기에 독일계 유대인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 유대인들의 체류비용을 요구했다. 그 비용을 스위스로 보내는 과정에서 전시 외화 밀반출이 나중에 게슈타포에 적발되어 본회퍼의 체포로 이어졌다.

1943년 4월 5일 디트리히 본회퍼는 집에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본회퍼는 테겔 군 형무소에 18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는 체포되기 몇 달 전에 나치하 자신의 경험과 배움을 담아 <10년 후: 1943년으로의 전환에 대한 해명>이라는 소론을 썼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나 신학이나 교리를 떠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너른 마음에 참여하여 위험한 순간이 닥칠 때 책임감을 가지고 거침없이 행동하고, 고통당하는 모든 이에게 진정한 자비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진정한 자비의 출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무작정 기다리며 방관하는 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자비와 행동으로 부름 받는 건 자신의 고난 때문이 아니라 동료 형제들의 고난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테겔형무소의 본회퍼 감방(하단 왼쪽)
테겔형무소의 본회퍼 감방(하단 왼쪽)

옥중서신: 세상 한복판에 계신 하느님

테겔에서 본회퍼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다정했고, 수감자들이 경멸하는 간수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었다. 본회퍼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수감자에게는 법적 도움을 주었고, 자기 변호사에게 동료 수감자의 사건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1944년 4월 30일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들에게 말로 그리스도교를 알리는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비종교적 그리스도교’를 전했다. 우리는 지금 종교 없는 시대, 지금 모습으로 더는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왔다고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주일 아침과 교회를 지나서 온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제 교회 한 구석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삶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약할 때가 아니라 힘이 있을 때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죽을 때나 죄를 지었을 때가 아니라 삶과 인간의 선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곳에, 즉 한계에 있지 않고, 마을 한복판에 있네.”

본회퍼는 <윤리학>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실에 참여함과 동시에 세상의 현실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현실은 세상의 현실을 껴안는다. 세상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현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와 연결되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저항세력들은 연합군에게서 평화협정을 약속받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던 생각을 접고 무조건 히틀러를 암살하기로 결정한다. 발키리 작전이다. 주동자였던 독일 가톨릭신자였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다. 용감하게 행동에 나서는 사람은 자신이 독일 역사에서 반역자로 쓰러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양심 앞에서 반역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1944년 7월 20일 회의석상에서 터진 폭탄은 히틀러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다. 작전이 실패하고서 국방정보원의 카나리스 제독은 체포되고, 슈타우펜베르크는 처형되었다. 본회퍼의 외삼촌 파울 폰 하제는 교수형을 당하고, 한스 폰 도나니는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본회퍼 집안에선 아들 둘과 사위 둘이 사건에 연루되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죽음, 자유에 이르는

본회퍼는 10월 8일 테겔형무소에서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게슈타포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제 국가의 관리 대상이 된 것이다. 그해 12월에 그가 약혼자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는 <선한 권능에 감싸여>라는 시가 동봉되어 있었고, 지금도 찬송가로 널리 불린다.

“선한 권능에 어린애같이 고요히 감싸여
보호와 위로를 받으니 놀라워라.
나 이날들을 그대들과 함께 살려네.
새해를 그대들과 함께 맞이하려네.
...

놀랍게도 선한 권능에 감싸여 보호를 받으니
우리는 다가올 일을 자신 있게 기다리노라.
하느님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새날에도 확실히 함께 하신다.”

 

 

by Lewis Williams OFS

다음해 2월에 본회퍼는 바이마르 근처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수감자들은 당장이라도 해방되거나 살해되리라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추위와 굶주림을 참고 견뎠다. 4월 1일에는 미군의 대포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러나 본회퍼는 다시 4월 7일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열두 시간 뒤에 발키리 작전에 연루된 카나리스, 오스터 등과 함께 약식 군사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본회퍼는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하느님이 허락하신 특권이라고 여겼다. 그날 플로센뷔르크의 소각장은 가동되지 않았다. 교수형 당한 이들의 시신은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처럼 더미로 쌓여 불살라졌다. 이 주일 뒤에 연합군이 플로센뷔르크로 진군했으며, 그로부터 한 주일 후에 히틀러가 자살하고 전쟁은 끝났다.

“어서 오라, 영원한 길 위에 있는 최고의 향연이여.
죽음이여, 덧없는 육신이 성가신 사슬을 끊고
눈먼 영혼의 벽을 허물어라.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것을 마침내 볼 수 있게.
자유여, 우리는 오랫동안 훈련하고 행동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그대를 찾아다녔노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느님의 얼굴에서 그대를 보노라.”
(본회퍼, ‘자유에 이르는 길 위의 정거장들’ 중에서)

 

[참고]

<디트리히 본회퍼>, 에릭 메택시스, 포이에마, 2018
<나를 따르라>, 본회퍼, 김순현 번역, 복있는 사람들, 2016 

 

*이 글의 축약본은 <가톨릭평론> 2020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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