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이들이 죽고 있다. 몇 만 명이 죽은 나라도 있고 10만이 넘는 사람이 죽은 나라도 있다. 비록 수가 적을 뿐, 우리도 결코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다. 불안이 커지면 이상한 소문도 커진다. 까닭 없는 재앙은 더 불안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탓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조금은 더 편한 모양이다. 누군가는 중국 탓이라 하고 누군가는 아시아 사람들 탓이라 한다. 길을 걷던 아시아 사람 중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봉변을 당하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세계 지성의 기준을 자처(自處)하던 이들이 이젠 그 무너짐을 아시아 사람의 탓이라 한다.
과거 흑사병이 유럽을 흔들던 시기가 있었다. 인구 3분의 1이 죽었다. 당시 성당은 흑사병 환자의 공간, 즉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다리는 공간이었다. 병원을 의미하는 영어 호스피틀(hospital)은 라틴어 호스피탈레(hospitale)에서 왔다. 호스피탈레는 ‘손님의 공간’이다. 전염으로 가족과 있을 수도 없고 마을에 그대로 있을 수도 없는 이들이 성당의 그 공간에 찾아와 사제와 수도자와 더불어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렸다. 의사의 수가 한 참 모자란 시기이니 치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외로이 홀로 된 죽음을 기다리는 기도와 더불어 있는 죽음의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14세기 흑사병의 공포는 유럽의 수많은 민중과 교회를 흔들었다. 세상 힘과 거리가 먼 작은 본당과 수도원의 사제와 수도자는 민중의 아픔에 고개 돌리지 않고, 그들을 자신들의 손님으로 받아드렸다.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오히려 안아주며 그 외로운 아픔과 더불어 있었다. 당시 많은 수도자와 신자들이 간호를 위하여 그 아픔의 자리로 달려갔다. 돌림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사랑이 더 컸다. 그렇게 그들과 더불어 있기 위해, 외로운 죽음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당시 교회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의 세상이 그런 것일까? 외로운 아픔의 옆에서 그들과 더불어 죽어가던 사제와 수도자가 있다면, 그 근처에 다가가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제와 수도자도 있었다. 치료법도 없이 사흘이면 죽어버리던 병이 주는 공포와 불안 앞에서 그들도 죽음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 아픔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고 유다인은 탓으로 돌렸다. 하느님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분노하셨기에 이제까지 보다 더욱 더 크고 성대한 참회의 행사를 해야 한다 주장했다. 그리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인 일이다. 돌림병이 돌고 있는데, 하느님의 탓이며 하느님의 화를 풀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대로변에 나와 십자가와 촛대를 들고 행진하였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말이다. 심지어 하루 두 번 상의를 벗고 바늘이 달린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내리쳤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돌림병이 돌고 있는 곳에 십자가를 들고 성가를 부르며 떼를 지어 행진했다.
1326년에서 1361년 사이 기록된 장 르 벨(Jean le Bel, 1290-1370)의 <참된 연대기(Vrayes Chroniques)> 속 기록은 참으로 서글픈 종교의 현실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고, 하느님 앞에 낮은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피나도록 때리며 떼를 지어 행진하는 그 잔혹한 광기가 가능했던 것은 모두가 종교의 힘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런 참회의 일로 흑사병과 죽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유다인이 그리스도교인을 죽이기 위해 독을 넣어 죽이고 자신들이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대재앙이란 소문이 돌았다. 이제 이 소문으로 분노한 사람들은 지방 영주와 재판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참회의 행위를 하고 곳곳에서 유다인을 잡아 화형시켰다. 불에 타는 그들을 보면서, 결혼식장 구경을 가듯이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쁜 마음으로 그 죽음을 구경하였다.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유다인에게 강요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겐 강제로 세례를 주려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그 신앙을 지켰다.”(<참된 연대기>에서 발췌)
이젠 유다인의 탓이라며 그들을 죽었다.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때리고 몸에 불을 지르고 죽였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구경했다. 하지만 유럽 인구의 3분의 1, 그 많은 이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히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탓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느님의 탓이라 생각했고, 유다인의 탓이라 생각했다. 하느님의 화를 풀어줄 눈에 보이는 거대한 참회 행사와 유다인을 향한 잔혹한 폭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그 고난의 순간 어떤 ‘뜻’도 일구지 못했다. 오히려 그 시간, ‘뜻’을 일군 공간은 거대한 광장도 높은 성직자와 권력자의 자리도 아니었다.
마을 성당과 수도원에서 외로이 죽어갈 이들을 기다리며 그들과 함께 죽어간 이들의 자리였다. 더불어 죽은 이들의 자리였다. 누구의 탓을 따지지 않고, 지금 아파하는 그 외로운 죽음, 그 죽음으로 달려간 이들의 자리였다. 그들과 더불어 있었던 이들의 자리였다. 그 외로움 앞에서 ‘남’이라 부르지 않고 ‘우리’라 부르며 달려간 이들의 자리였다. 이들의 그 헌신과 죽음이 머물던 ‘손님의 공간(hospitale)’, 그 ‘환대(hospitality)의 공간’, 그 헌신과 자기 내어줌의 공간에서 뜻은 힘겹게 발하고 있었다.
굳이 흑사병이나 코로나19와 같은 돌림병이 아니라도, 성당과 교회는 아프고 힘든 손님을 위한 환대의 공간이어야 한다. 홀로 외로이 살고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이 외롭지 않게 돌보는 공간이어야 한다. 중세 흑사병을 대하는 그 따스함과 차가움, 그 사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도 홀로 외로이 살다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은 멈추지 않고 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저서에 <대한민국철학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