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바버러 쿠니의 '미스 럼피우스'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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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바버러 쿠니의 '미스 럼피우스'를 생각하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07.1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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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미스 럼피우스, 바버러 쿠니, 시공주니어. 1996
미스 럼피우스, 바버러 쿠니, 시공주니어. 1996

내가 사는 아파트가 이렇게 예쁜 줄 올해 처음 알았다. 관리하시는 분들이 주차장에 떨어진 담배꽁초만 줍는 줄 알았는데, 원예 솜씨도 있었다. 사철나무를 둥그렇게 다듬어 놓고, 관리실 뒤편 화단에는 고추며 방울토마토, 가지도 심으셨다. 공동주택에 살다보면, 내 집만 청소하고 꾸미지, 바깥 화단을 돌볼 마음을 내지 못한다.

이따금 맨 아래층에 사는 분 중에 화단을 성심껏 제 정원처럼 가꾸는 분들이 있다. 407동에 사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그런 ‘사람’이다. 꽃 피는 시기를 고려해서 모종을 심고, 줄줄이 다른 꽃나무를 기르고, 늘 모종삽으로 흙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신다. 팔순을 훌쩍 넘기셨다는 그 어르신은, 시내 로터리 근처 시에서 조경사업으로 심어놓은 꽃들이 시들어 씨앗이 맺히면 그것을 훑어오는데, 씨앗을 여기저기 뿌려놓으면 싹이 트는 게 있다고 했다.

한사코 존댓말을 포기하지 않는 그분은 “이 나이에 무슨 꽃이냐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누군가 그 꽃을 볼 테니 심어두는 거죠. 따로 할 일도 없고…”라고 하신다. 자녀들을 다 키운 어르신은, 이제는 꽃을 키우는 모양이다.

흙만 보이면 작물을 심는 어르신들을 가끔 본다.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심고 가꾸는 것도 좋을 테지만, 때로는 낯선 행인들도 기분 좋게 만드는 꽃을 심는 사람의 마음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흙에서 흙 너머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게 없어도, 남의 눈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문득 바버러 쿠니의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가 생각난다. 미스 럼피우스는 집을 떠나 먼 도시에 살기도 하고, 열대 섬에 가기도 하고, 만년설이 덮인 봉우리도 오르고, 정글과 사막을 횡단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마을에 살게 된 럼피우스는 루핀 꽃씨를 잔뜩 사서 들고, 들판이며 언덕에 뿌리고 다녔다. 몇몇 사람이 “정신 나간 늙은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이듬해엔 들판도, 언덕도, 도랑도, 돌담도 푸른빛, 보랏빛, 장밋빛 루핀 꽃들로 뒤덮였다. 아이들은 물론 온 마을 사람들이 행복해 했다. 그 후 사람들은 럼피우스를 ‘루핀 부인’이라 불렀다. 루핀 부인은 평생 세 가지 소원을 품고 살았다. 크면 머나먼 세계로 가는 것, 나중엔 돌아와 바닷가에 있는 집을 사는 것,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훗날 우리가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물으시겠지만,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듯이’ 다른 이에게 ‘장미를 주었는지’도 물으실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했다. 지금 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기다리는 그분이 문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은 천주교 수원교구 주보 7월 7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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