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연습-김선애]
저는 봉사하는 삶이 좋습니다. 제 어릴 때 꿈은 보육원 원장이었어요.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항상 마음이 쓰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약자에게 유난히 관심을 갖는 것은 타고난 기질 같습니다. 빗대어 말하자면, 저는 성모님보다 요셉 성인을 더 좋아하고, 김대건 신부님보다 최양업 신부님을 더 좋아합니다. 두 분 다 앞의 분한테 가려서 조명을 덜 받는 게 마음에 걸렸나봅니다.
저는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해요. 가족행사가 있으면 사진촬영을 늘 제가 맡곤 했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좋아서 계속 하다보니 집안 전속사진사가 되어버렸어요. 지금까지 조카 열 명이 결혼식을 치뤘는데요, 식전 하객들 맞이하는 장면부터 식중은 물론이고 폐백 후 식당에서 손님들에게 인사드리는 모습까지 다 담았습니다. 식장에서는 셔터 누르느라 분주하고, 집에 돌아와선 일일이 전송하느라 바쁘죠. 몸은 힘들어도 가족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그것으로 피로가 씻겨나갑니다. 저한테는 보람있고 즐거운 봉사니까요.
내 인생의 전환점, 세월호
저는 이십 대 초반에 스스로 성당 찾아가 세례 받고, 후반엔 꾸르실료 하면서 하느님이 제게 뭘 원하시는지 확인했습니다. 그참에 하느님께 오롯이 일생을 바치겠다며 보따리 하나 들고 대구를 떠났습니다. 서울 난지도로 찾아가 탁아소 <애기들의 집>에 첫 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어요, 교회 안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 탁아시설, 수도공동체, 양로원, 중증 장애아시설, 꽃동네, 피정센터. 30여 년 동안 제가 거쳐온 곳입니다.
제 인생에 굵직한 전환점이 십 년 주기로 세 번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물 아홉 살에 경북의 어느 평복수도공동체에 입회했습니다. 동료자매와 갈등이 있었고 공동체 내분까지 겹쳐 9년만에 결국 거기서 나왔습니다. 서른 아홉 살엔 양산의 피정센터에 취직했습니다. 제 집처럼 여기고 열심히 일했죠. 그러다 관장 신부님과 마찰이 생겼습니다. ‘피정자들에게 난방을 해주느냐, 마느냐’하는 데서 의견이 엇갈렸어요. 난방을 해야 할 시기였는데, 신부님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죠.
결정권을 갖고 있는 신부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제 주장을 내세우는 바람에 보름 뒤 해고되었습니다. 마흔 아홉 살에요. 퇴직금도 못 받았네요. 세상물정에 너무 어두웠고, 그런 걸 청구할 권리가 제게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토록 어리숙하니, 하느님이 저를 세상에 내보내지 않고 교회 안에 붙잡아 놓으셨겠죠. 그러다 이곳 강화까지 흘러 들어왔습니다.
교회가 제 생활반경의 전부인 줄만 알고 살아가던 어느 날, 한 사건이 불쑥 제게 들이닥쳤어요. 제 잠자던 의식을 흔들어 깨운 세월호 참사!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안산분향소로 향했습니다. 광화문에 나가기 시작했구요. 거리행진을 하고, 유가족들과 물대포도 함께 맞았습니다.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리며 힘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정치가 우리 삶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제가 변하기 시작했답니다. 대중교통으로 왕복 7~8시간 거리를 힘든 줄 모르고 쫓아다녔습니다. 동료직원들이 저더러, 서울만 다녀오면 얼굴에 생기가 돈다고 했어요. 식사시간에 늘 정치얘기만 하니까, 저를 국회에 보내야 된다고도 했고요. 그런 활동적인 모습에 저 자신도 놀랐죠. 어디에 이런 에너지가 숨어있었나 싶었어요.
새로운 영에 떠밀려 거리로, 광장으로
제 안에는 많은 기질이 잠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정도 나이 드니까 그게 느껴지네요. 표현을 제대로 안 하고 사신 부모님 영향인지, 저는 욕구를 맘껏 표출하지 못하고 억누르며 살았습니다. 거기다 40년 가까이 교회권력에 순종하며 지냈구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도 못한 채 무조건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지요. 그러던 제가 새로운 영에 떠밀려 거리로 나가 교회 밖의 세상, 그 가운데서도 여러 소수 약자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거리에 서 있을 때마다 그곳의 기운들이 저의 막힌 곳을 뚫어준 것 같아요. 그렇게 광화문에서 매번 살아있는 기운을 받아안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세월호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그만큼 제 삶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유가족들처럼 저도 생의 끝날까지 그들을 품어안고 갈 것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저도 살면서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번 거쳤습니다. 시련 속에 하느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이제 압니다. 우리가 헤쳐온 시간들 중에 무의미한 시간은 없고, 우리가 겪은 사건들 중에 불필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고라는 큰일을 겪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계속 한쪽 귀퉁이에 밀쳐놓고 일을 제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았을 것입니다. 십 년 동안 헛살았다고 눈물로 통회하며 주님을 새롭게 만나지 못했겠지요.
그렇게 세상으로 나온 저는, ‘삶의 현장체험’을 한다며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밀감농장과 콩나물공장에서 일했죠. 4개월 짧은 기간이었지만, 노동의 고단함과 휴식의 소중함을 경험했던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하느님의 뜻이 가장 크게 와닿은 것은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수많은 국민을 촛불집회로 이끌었고,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정권을 바꾸었고, 남북을 다시 연결시켰습니다. 저는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나라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네비게이션, 가톨릭일꾼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합니다. 이 때쯤이면 모두들 한 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요. 한평생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서약했지만, 그 약속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혼자 봉헌생활하는 게 무척 힘드네요. 옆에 누가 없으니 쉽게 나태해져요. 같은 길을 가는 이가 함께 있으면 훨씬 더 힘을 받을 수 있을텐데요.
또 하나 갈등을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이 그러셨죠. 부끄러운 고백인데, 전 지금 재물 쪽에 더 마음이 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물론 돈이 필요하지만, 재물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면 안되겠지요. 기준을 잡아줄 네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일꾼’이 네비와 공동체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합니다.
우리 함께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봅시다. 지금 있는 제 자리에서 작은 일부터, 가능한 일부터 시작하면 되겠지요. 저는 제가 일하는 건물에 층층마다 노란리본을 갖다놓습니다. <가톨릭일꾼> 신문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둡니다. 그 메시지가 어느 날, 누군가의 마음에 꽂히겠죠.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라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1989)
이처럼, 제 작은 행동 하나가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선애 에밀리아나
가톨릭일꾼 글쓰기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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