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11-13; 14-20)
렘브란트가 <돌아온 아들>을 그렸을 때 그는 죽음에 가까이 있었다.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그림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림에 대하여 더 읽고 더 바라볼수록 나는 이 그림이 굴곡이 많았고 고통스러웠던 삶의 마지막 선언문이라고 생각된다. 렘브란트의 미완성 작품인 <시메온과 아기 예수>와 함께, <돌아온 아들>은 나이든 자아에 관한 작가의 인식을 보여준다. 즉 신체적으로 볼 수 없는 상태와 내적으로 깊게 볼 수 있는 상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늙은 시메온이 여리고 약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과 나이든 아버지가 지친 아들을 포옹하는 모습들은 모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연상 시킨다: “너희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다.” 시메온과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는 그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신비로운 빛을 그들 안에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내적 빛으로 깊이 숨겨져 있으나, 모든 것에 스며들어 비추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반사한다.
그러나 이 내적 빛은 오랫동안 숨겨져 왔다. 수 년 동안 이 빛은 렘브란트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오직 점차적으로 그리고 많은 고통을 겪으며 렘브란트는 자기 안에 있는 빛이 그를 통하여 그림의 인물들에게 비쳐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오랫동안 자만심이 가득한 그 젊은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가진 모든 것을 챙겨서 먼 고 장으로 떠나가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렘브란트의 젊은 시절과 작은 아들
렘브란트가 생애 마지막 시기 동안 그렸고 빛나는 늙은 아버지와 늙은 시메온을 그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깊고도 내면화된 자화상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젊은 시절의 렘브란트가 돌아온 아들의 온갖 특징들을 다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건방지고, 독선적이며, 방탕하고 감각적이며 매우 호전적인 특징들을.
서른 살 때에, 렘브란트는 아내인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기를 그렸다. 윤락가에 있는 아들의 모습으로. 그 그림에서는 내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반쯤 열려진 입과 탐욕스러운 눈, 술에 취한 모습의 렘브란트는 그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는가!” 잃어버린 아들의 모습인 젊은 렘브란트의 이 감각적인 자화상을 깊이 응시하면서, 나는 이 같은 사람이 30년 후 삶의 감추어진 신비들을 그렇게 깊이 꿰뚫어보는 눈길의 자기 자신을 그렸다는 사실을 거의 믿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모든 렘브란트 전기 작가들은 그를 자만심이 강한 젊은 청년으로 묘사한다. 당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강하게 확신하고 세상이 제시 하는 모든 것들을 몹시 드러내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치를 좋아하는 외향적 사람이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무관심하다. 렘브란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가 돈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렘브란트는 돈을 많이 벌었고, 많이 썼으며, 많이 잃어버렸다. 그의 많은 에너지가 재정 안정과 은행 파산 절차를 처리하는 긴 법정싸움에 소모되었다. 20대 후반과 30대 초기에 그린 자화상들은 렘브란트를 명성과 찬사, 아첨에 굶주린 사람, 화려한 의상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여준다.
렘브란트의 급전직하의 불행
그렇지만 성공, 인기, 그리고 부의 이 짧은 기간은 이어 엄청난 슬픔, 불행, 그리고 재앙으로 이어졌다. 렘브란트의 삶이 보여주는 많은 불행들을 요약하는 일은 숨막히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것들은 돌아온 아들과 다를 바 없다. 1635년에 아들 룸바르투스를 잃었고, 1638년에는 맏딸 코르넬리아를, 1640년에는 두 번째 딸 코르넬리아를 잃었다. 렘브란트의 부인 사스키아는 남편의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았으나,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9개월 된 아들과 함께 홀로 남았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렘브란트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과 문제들로 이어진다.
이 시기 동안, 렘브란트의 작가로서의 인기는 수직강하했다. 비록 당대의 어떤 수집가들과 비판가들은 그를 위대한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계속 인정했지만. 경제문제가 더 심각해지던 1656년에 렘브란트는 지불 불능의 선고를 받았고 파산을 피하기 위하여 채권자들에게 그의 모든 재산과 그 영향권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렘브란트의 모든 소유물, 자신의 작품과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 기타 막대한 양의 소장 예술품, 암스테르담의 집과 가구가 1657년과 1658년 사이에 세 번의 경매로 모두 팔려나갔다.
원망 없는 작은 평화
비록 이 모든 처리로도 렘브란트는 빚과 채권자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었으나, 50대 초기에 그는 약간의 평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의 그림들은 따스함과 내면성이 더욱 깊어졌으며, 이로 미루어 많은 환멸들이 그에게 원망이나 분노를 남겨놓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런 경험들은 그에게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정화시켰다.
그는 인간과 자연을 더 깊이 꿰뚫어 보는 시선을 가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바깥의 광채나 과장된 전시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불행은 계속되어 1668년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티투스가 결혼하고 죽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1669년 렘브란트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그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딸 코르넬리아(렘브란트는 죽은 딸의 이름을 후처의 몸에서 난 딸에게 붙여 주었다)와 며느리 막달렌느 봔 루, 그리고 손녀 티씨아만 살아남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아버지의 가슴에 묻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한때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고 숭배를 받은 예술가가 일생 애써 모은 모든 영광이 헛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자각한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윤락가에서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젊고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던 렘브란트는 이제 낡은 바지로 그의 쇠약해진 몸을 덮고 샌들을 신고 먼 길을 오랫동안 걸어와 지치고 쓸모없는 모습의 자기를 그리고 있다.
참회하는 아들로부터 연민 가득한 아버지에게로 눈길을 돌리면서, 나는 금빛 목걸이, 마구, 투구, 초, 그리고 숨겨진 램프로부터 반사되는 번쩍이는 빛이 사라지고 노년의 내적인 빛으로 대체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한 때 부와 인기를 더 찾으라고 유혹하는 영광으로부터 인간영혼 안에 숨겨진 영광으로 가는 움직임이고 죽음을 능가하는 움직임이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