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 신앙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평신도 영성운동, 즉 퀘이커 신앙운동과 만나면서 그 평화주의적 실천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퀘이커들도 재세례파 교도와 유사한 핍박을 받았으나 순교적 차원까지 고된 고난은 겪지 않았다. 그들은 국왕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국가주의나 애국주의의 폭력성과 전체성을 거부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투옥되는 역경을 겪었다. 이는 18세기 계몽이후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평화사상을 지켜나간 운동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만일 이들도 16세기에 태동되었다면 무수한 순교의 반열에 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2005/6년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퀘이커 수도원에서 9개월 동안 지내면서 퀘이커 평화운동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 그 곳을 거쳐 간 인물로서는 함석헌 선생, 한명숙 전총리/박성준 교수 부부,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해온 박성룡 박사, 그리고 정지석 박사가 있다. 재세례파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후터리안, 형제단, 아미쉬 공동체 등과 더불어 퀘이커 교도 또한 이 세상에 흔한 ‘폭력의 평화’를 거부한다.
폭력의 평화를 거부한다는 것은 모든 양태의 폭력을 포기하는 것의 일환이다. 폭력의 길은 예수의 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길을 일러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할 원수와 적이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문화와 그리스도: 평화주의 전통
에른스트 트뢸취는 소종파 유형, 신비주의 유형, 그리고 교회 유형의 신앙 운동 중에서 교회유형을 선호했다. 교회 유형을 선호하는 이는 정당한 전쟁 이론을 수용하며, 국가주의에도 얼마만큼 헌신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기호에 맞는 행위를 선택한다. 교회 유형은 대중을 끌어 모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중과 함께 권력과 물질적 부유함도 누린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번영과 위세 등등함을 생각해보면 된다. 나는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이런 평가가 틀렸다는 것을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유형의 기독교는 유럽에서 미주에서 쇠퇴일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트뢸취의 제자격인 헬무트 리챠드 니버는 그의 <문화와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에서 트뢸취와는 달리 기독교 역사를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상관적 관점에서 문화의 그리스도,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적대적인 그리스도, 문화와 갈등하는 그리스도, 문화를 개혁하는 그리스도라는 다섯 유형론으로 분류하고 초기 기독교와 재세례파 운동을 문화에 적대적인 그리스도 유형으로 규정했다.
자연 위에 인위를 섞어 이룩한 모든 제도와 문명 구조를 문화라 한다면 소종파 신앙운동은 이 모든 문화를, 특히 탐욕과 폭력 문화를 누리기보다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성향을 가진다. 이는 소종파 신앙 운동이 죄의 구조를 피하여 분리주의적 원칙(Separation Principle)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리챠드 니버가 선호하는 유형이 칼뱅적인 개혁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평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평화주의 유산을 재평가한 베인튼(Roland Bainton)은 그의 책 <Christian Attitudes Toward War and Peace>(1960)에서 구약 성서적 ‘샬롬’과 신약 성서의 ‘에이레네‘, 예수의 평화적 가르침을 지켜온 전통이 기독교 신앙의 초기부터 연연히 흘러오고 있다는 것을 규명했다.
이에 앞서 1947년 평화 연구가들도 인류의 평화주의적 유산에는 예수의 평화주의 전통이 깊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근대 이후에는 반전평화주의 운동에 크게 기여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 교회의 종교문화 속에는 권력정치와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 유산이 생략된 기독교 변종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선교적 호전성과 더불어 정치권력과 연대하는 종교유산만 팽배하다.
이런 현실은 한반도의 평화를 지체시키고 반평화적인 군사주의와 권력정치를 지지 후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역사가 예수의 평화적 가르침을 따라 신앙 양심적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을 되례 교회가 외면하게 하거나 핍박하는 교회 문화를 낳았다.
평화주의 그룹은 언제나 소수였다
나의 입장(나는 기독교 후기, 종교 후기 시대에서의 기독교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감히 평가를 내린다면 나는 소종파 신앙인이 지니고 있는 예수의 평화사상은 시대가 변하고 바뀌어도 마르지 않는 영성의 샘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정의없는 정당한 전쟁을 뒷받침해온 국가주의와 결탁한 교파신학은 언제나 예수의 평화사상을 망각하거나 요더가 “예수의 정치“에서 언급한 바, 예수의 가르침을 이런 저런 변명을 앞세우며 규범으로 삼지 못하는 불실함을 가지고 있다. 이 그릇된 전통에 반하여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적 흐름은 여전히 미약하다.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는 한 국가의 시민이기도 하지만 세계시민이기도 하다. 1947년 평화교회 유산을 이어받은 퀘이커들은 그들이 2차 세계대전 중에 보인 평화주의적 실천으로 인류애를 증진시킨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헌신하며 애국주의자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 지평을 실천범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있어서 국가주의의 본질은 인위적인 이데올로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국가주의가 요구하는 애국주의와 군사주의가 결합하면 편협한 반평화적 충성을 유발한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종교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곳에서는 종교적 증오와 혐오가 생산되고, 국가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곳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사랑이 증발한다. 이 오류를 시정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평은 평화주의, 비폭력 무저항적 평화주의다. 요더의 표현을 빌어온다면 ‘덕스러운 소수자의 평화주의‘(Pacifism of Virtueous Minority)다.
이 평화주의를 증언하고 실천하는 것은 간혹 국가주의적 충성보다, 교파적 교리주의를 향한 충성보다 그 기여 범주에서 반지름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련의 평화주의자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들을 변명하고 해명해야 했다. 국가 권력 앞에서, 동료 신앙인 앞에서, 그리고 견해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 앞에서 왜 그들이 평화주의자로 살아야 하는 지를 해명해야 했던 것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그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평화란 오늘날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명령
지난 1983년 뱅쿠버에서 모인 세계교회협의회는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보전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고, 1990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정의, 평화, 창조 보전을 위한 제안 문서"를 냈다. 주류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1998년 하라레 총회에서는 “폭력을 극복하는 10년(The Decade to Overcome Violence)” 운동을 결정했고, 2011년 이 운동을 총 결산하면서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에큐메니칼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소수자들이 주장하던 평화가 그동안 전쟁을 지지하고, 심지어 거룩한 전쟁에 나서는 것을 독려했던 교회에서도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평화란 오늘날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명령이라는 평화주의적 가치에 더 많은 교회들이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핵무기를 수 천기 장착하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류사회는 ‘더 큰 평화’를 지향해야만 전지구적으로 모든 생명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 전쟁론, 종교 전쟁론을 외치던 교회들 속에서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 예수의 가르침을 새롭게 평가하고, 예수의 비폭력 평화가 초대교회와 중세 이후 소종파 교도들의 신념과 삶에서 참된 평화주의적 실천 지평을 찾는 일이 폭넓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 한국 사회나 교회는 남북의 적대적 대립 구조 아래 평화주의 사상보다는 정당한 전쟁론을 더욱 쉽게 수용했고, 근본주의자들은 아직도 십자군 전쟁 이념을 신앙화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의 평화주의자들 역시 지난 날 과거의 소종파 신앙인이 그러했듯이 국가 앞에서, 그리고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 앞에서 “왜 나는 평화주의자인가“를 해명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왔었다.
남북의 대결구도가 서서히 걷히고 있는 요즘, 우리 사회나 종교계 안에는 정당한 전쟁론자와 성전론자들이 한반도 반평화 세력으로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계 교회가 변하고 있듯이 한반도의 구성원들과 종교들도 서서히 기독교 평화주의 유산의 소중함을 자각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시대적 변화를 앞당기기 위하여 오늘의 평화주의자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중요한 시점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충구 교수
감신대 기독교윤리학과
저서로 <종교의 두 얼굴-평화와 폭력>, <예수의 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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