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나라는 올 수 있을 뿐, 세워질 수 없다
상태바
하느님나라는 올 수 있을 뿐, 세워질 수 없다
  • 앨버트 노울런
  • 승인 2018.10.29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수와 임박한 전쟁-4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 절름발이, 가난한 자, 찢긴 마음, 포로, 옥에 갇힌 자, 짓밟힌 자들이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달리 부르는 말들일 뿐이다. 따라서 치유, 시력과 청력의 회복, 기쁨의 재래, 석방, 자유나 희년의 선포, 복음의 전달들은 해방을 여러 가지로 달리 묘사하는 방식들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해방의 한 형태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특별히 뜻깊은 일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란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적이며 고무적인 소식이다.

예수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좋은 소식은 하나의 예언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될 미래의 일을 예언했다. 이 미래 사건은 그저 하느님나라의 도래가 아니라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나라의 도래였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21)라고.

예수는 자신의 해방활동을 사탄과의 일종의 세력다툼으로(마르 3,27), 온갖 양상과 형태를 띤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의 전쟁으로 보았다. 궁극에는 선이 악보다 강한 법이다. 예수는 하느님나라가 필경은 사탄의 나라를 이길 것이며 이 지상에서 그 나라를 대신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나라가 커다란 파멸 후에 오리라고 예상했던가, 혹은 파멸 대신에 하나의 희망적인 선택의 가능성으로 다가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가? 다시 말하면 예수는 파멸이 다가오는 가운데에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이다.

 

Modern Coptic icon of Jesus Christ, by the nuns of St. Demiana Monastery, El Barary, Egypt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다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나라는 올 수 있을 뿐,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저러한 지배형태에서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을 강제로 자유롭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자유를 선택한다면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조건들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나라 자체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선물로서.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의 나라가 올 수 있게 하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었다.

예수는 그 나라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마르 1,15). 이 고을 저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고(마르 1,38 : 루카 4,43), 하느님나라에 대한 믿음을 더욱 더 퍼뜨리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여 가르치도록 하였다(마르 3,14; 6,7 : 마태 10,7 : 루카 9,2; 10,9. 1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온 세계에 선포되면 곧 그 나라가 임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마르 13,10). 설교없이 믿음이 없으며(로마 10,17) 믿음이 세상에서 충분히 강한 힘을 발휘할 때에야 그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믿음은 자기 삶의 방향의 근본적 재정립이다. 거기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반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상전을 섬길 수 없다. 그 나라와 그 나라의 가치들을 삶의 기본방향으로 삼느냐 삼지 않느냐, 그 나라를 인류의 최종 목적지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으냐 둘 중의 하나이다. 신앙은 결단인 것이다.

그런데 참 믿음은 연민 없이 있을 수 없다. 예수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던 나라는 사랑과 봉사의 나라이다. 사람마다 사람이기에 사랑받고 존중되는 인간적 형재애의 나라다. 같은 인간에게 연민의 정이 깊게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런 나라를 믿고 바랄 수 없다. 하느님은 자신을 연민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였다. 하느님의 힘은 연민의 힘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연민은 하느님나라의 기적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하느님의 힘을 이 세상에 방출시킨다.

그러나 그 나라의 도래가 인간의 믿음, 희망과 연민을 내포하는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 그 나라가 도래할 만큼 넉넉한 믿음이 있게 되기 전에 파국이 오지 않을까? 또 설사 그 파국이 지연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가 설교한 그런 종류의 나라를 믿을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보장이라도 있을까? 어떻든 예수는 그 나라가 오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인간의 미련한 불신 때문에 그 도래가 지연될 수도 있겠지만(루카 13,6-9), 그러나 필경은 오고야 말리라. 파국이 먼저 올 수도 있겠지만, 여러 번 먼저 올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끝내 하느님의 나라는 오고야 말리라(마르 13,7-8).

반드시 오고야 말 하느님 나라

빠르게 든 늦게 든 인간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올 것이다. 왜? 하느님을 믿음이란 선이 악보다 강하며 참이 거짓보다 힘차다는 것을 믿음이다. 결국은 선과 참이 악과 거짓을 이기리라는, 하느님이 사탄을 정복하시리라는 것을 믿음이다. 이것을 굳게 믿지 않는다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선을 지지하는 힘이 엄존한다. 인간 안에서 그리고 자연 안에서 깊디 깊은 욕구로 나타나서 활동하는 힘, 결국에 가서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힘, 그런 힘이 엄존한다. 예수가 만일 그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리라. 하느님나라에 대한 확산되는 믿음은 하느님나라의 도래처럼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느님나라를 믿음이란 그러므로 단순히 그 나라의 가치들을 지지하고 언젠가는 이 지상에 그 나라가 도래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희망이나 한 번 걸어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나라는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참이기에 바로 이 확신의 힘으로 그 나라는 올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그러나 그 나라가 곧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예수 자신은 그 나라가 곧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마르 1,15 : 마태 4,17 : 루카 10,9-11 : 마태 10,23; 13,30).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는 그 나라가 다가왔음을 주장하고 있었던가? 당시대인들처럼 예수는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하느님의 어떤 개입이 임박했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희망과 기대들이 전례 없이 극렬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상황은 유동적이었고 로마와의 전쟁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로마를 타도하게 될까? 메시아가 오실까? 세상은 끝장이 나려는가 그렇지만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예수는 로마와의 대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멸망이 박두했다고 믿고 있었다. 파국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몇 사람들을 회개의 세례로 건지고자 했다.

예수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때는 진리의 순간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기회였다. 전멸이라는 위기 앞에서 예수는 즉각적이며 근본적인 회개를 호소할 절호의 기회를 보았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5)라고, 회개하면, 진정으로 믿으면 파국대신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리라고.

이 미증유의 위기가 사람들에게 하느님나라냐 파국이냐를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예수의 여러 비유의 주제다. 약은 청지기의 비유(루카 16,1-8), 잠들어 있는 집주인(마태 24,43), 모래 위에 지은 집(마태 7,24-27), 보물, 값진 진주, 큰 잔치(마태 13,44-46: 루카 14,15-24)의 비유들은 이런 때에 머뭇거린다는 것은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칠 위험을 무릅쓰는 셈이다. 내일이면 늦으리라.

하느님나라의 박두는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기회였다. 파국이냐 하느님나라이냐, 이것이 가까운 장래에 올 확실한 것이었다. 예수에게 있어 임박한 하느님의 행동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건이었다. 바로 이 점이 예수의 때를 결단과 행동의 때로, 유일한 기회로 특징짓고 결정짓는 셈이었다.

복음서들에는 포교를 위한 긴급한 요청의 주제가 많이 나온다(루카 9,59-62 : 마르 1,20). 이것은 이스라엘에 파멸이 박두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파멸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근본적인 회개, 파멸 대신에 하느님나라를 오게 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므로 잠시라도 버릴 시간이 없었다.

예수의 사명이 그처럼 긴급한 까닭은 비단 많은 사람들에게 인격적인 파국이 닥쳐올 위험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에 다가오는 사회적 정치적 파국은 누구나 -유죄, 무죄를 가리지 않고- 집어 삼킬 참이었다(마르 13,14-20). 잠시도 지체하지 말라고 재촉을 한 까닭은 바로 이 ‘비극’을 막자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나라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잡을 기회를 포착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도래한 것은 파국이었고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었다. 70년에 로마인들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했다. 135년에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고 유다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추방함으로써 그 비극은 끝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인명손실을 낳은 대참사였다.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