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에서 전국 동시다발 시위는 매우 위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전국 조직을 갖추고 있던 가농의 조직 역량이 큰 힘이 되었다. 가농은 1985년부터 외국 농축산물 반대투쟁과 소싸움을 전국적 동시다발 투쟁으로 이끈 투쟁 경험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일례로 1986년 한미통상협상이 타결된 이후 양담배가 시판된 9월 1일을 기해 가농은 전국 36개 군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미국 농축산물 수입저지 실천대회를 열고 가두시위와 농성투쟁을 치루기도 했다. 이렇게 훈련된 대중투쟁 역량을 가지고 있던 가농은 1986년 농민생존권과 민주헌법쟁취 활동, 미국 농축산물 수입저지투쟁에서 마련된 조직과 역량을 바탕으로 6월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가농은 오랜 기간 군 단위협의회의 활동 강화를 통해 군 단위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1986년경 가농은 전국적으로 60개 군의 조직 역량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조직적 힘으로 연이은 지역별 대중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일련의 싸움은 군 단위 조직을 강화하는 요체이기도 했다. 결국 가농은 2·7추모집회, 3·3국민대행진, 6·10국민대회, 6·26국민대회 등 전국 동시다발 투쟁의 주력을 이루며, 지역과 현장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가농은 국본 결성과 운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농에서는 국본에 서경원 전국회장을 공동대표로, 정성헌 사무국장을 상임집행위원으로, 이병철 조사부장을 조직국장으로 파견하였으며, 전임 회장이었던 이길재 회장이 국본 사무처장을 맡았다. 특히 이병철이 조직국장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본의 지역조직을 조직하는 데 가농의 조직력이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가농은 6월 10일 가농의 이름으로 <천만 농민이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대열로 하나 되어 나아갑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인 동시다발 투쟁을 독려하였다. 당시 가농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동시다발 투쟁 지역은 강원도 춘성, 춘천, 홍천, 원주, 원성, 횡성, 경기도 수원, 안성, 화성, 충남 천안, 당진, 서천, 청양, 대전, 충북 청주, 제천, 전북 전주, 완주, 진안, 군산, 이리, 정읍, 전남 함평, 무안, 구례, 보성, 나주, 광주, 목포, 여수, 순천, 완도, 경남 고성, 진주, 진양, 거창, 마산, 울산, 울주, 경북 경주, 포항, 김천, 안동, 예천, 의성, 영양, 청송, 상주, 대구 등이었다.
가농은 이후 국본의 농민위원회 결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아울러 국본의 시군구 지부, 읍면동 위원회 등의 기초 조직 건설에도 적극적으로 조직 역량을 투입하였다. 가농의 이러한 참여는 대도시 중심의 학생과 재야인사, 정치권의 투쟁 일변도에서 기층 민중들의 투쟁으로 변화시키는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이러한 6월항쟁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주장하는 민주화운동이 민중들의 생존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투쟁과제라는 인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