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여기 서울본부인데요. 오늘 부산 시위 상황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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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여기 서울본부인데요. 오늘 부산 시위 상황은 어떤가요?”
  • 이명준
  • 승인 2018.06.0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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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에 대한 기록은 자칫 서울의 대규모 시위나 명동성당 농성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국 방방곡곡의 동시다발 시위가 없었다면 6월항쟁의 승리는 불가능했다. 그 가운데서도 6월 18일 부산의 30만 인파의 시위는 6월항쟁의 성공을 가르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집권 세력이 그 당시 부산의 시위의 규모와 열기를 보고 6·29 항복 선언을 준비했다는 설도 있었다. 이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는 설이었고, 어쨌든 부산 시민들의 투쟁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부산 시민들의 투쟁은 6월항쟁 승리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 연장선에서 6월 18일의 30만 명 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던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도 그 의의가 재조명 되어야 한다.

 

늦은 밤까지 민주화 요구 시위를 계속하는 부산 시민들(1987.06.26)

당시 부산의 대규모 시위의 뜨거운 열기를 생생하게 조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천주교와 관련된 사항은 아니나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으로 당시 일본 교도통신사 서울지국에 근무하던 장준영(한국외국어대 일본어과 79학번, 1986년 교도통신 한국지사 기자로 입사) 기자의 경험담을 통해 6월항쟁의 부산의 한 장면을 소개한다.

“여기 서울본부인데요. 오늘 부산 시위 상황은 어떤가요?”(일본 교도<共同>통신사 서울지국의 한국인 기자)
“넵, 지금 경찰들이 시위대한테 밀리고 있어요.”(부산시경 상황실 근무자)

서울의 교도통신사 비좁은 사무실 안의 바로 옆 책상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며 전화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일본인 기자는 그 순간, 기사 송고용 원고지에 ‘프랫쉬’(フラッシュ、 Flash, 긴급기사)로 “한국 경찰, 부산에서 시위대에 밀리다!”라는 내용으로 날려 보냈다.

이 긴급기사가 전 세계로 타전되자, 그 다음날부터 일본 도쿄와 홍콩에 나가 있던 외신 기자들이 비행기를 타고 속속 서울로 밀려들어왔다. 당시 한국의 주재기자 선에서 취재하던 외신 취재라인이 대대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현장 취재를 통해서 한국의 6월항쟁 관련 기사들을 쏟아내며 전 세계로 타전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우리의 6월항쟁이 세계적인 이슈로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온갖 겁박과 회유 등으로 국내 언론에 대해 재갈을 물려놓고 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한국의 민주화항쟁 상황을 타전하는 외신 기자들까지는 통제할 수 없었다. 이런 외신의 활약에 힘입어 덩달아 국내 언론도 관련 기사들을 홍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언론 통제의 둑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교도통신의 히라이 히사시(平井久志) 지국장

6월항쟁에 대한 외신보도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사람이 있다. 바로 일본 교도통신의 히라이 히사시(平井久志) 지국장이다. 그는 국본의 이명준, 성유보 등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며 민주화운동 진영의 투쟁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고, 이를 외신을 통해 알리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6월항쟁이 해외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그의 공이 매우 컸다.

부산·경남 지역은 민주화항쟁의 ‘화약고’였다. 부마항쟁이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이 종말을 고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에, 부산은 판세를 가르는 지역으로서 기자에게는 늘 주목의 대상이었다. 외신 기자들은 ‘그날’도 서울에서 있던 대규모 시위와 명동성당 농성 취재 현장 등에서 최루탄 가스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 쓴 채, 녹초가 되어 저녁 무렵에 사무실로 들어갔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책상에 앉아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벌어지는 시위 현황을 전화로 취재하기 시작했다. 외신 기자들은 취재 인원이 적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지방까지 출장가기가 쉽지 않다.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에 있는 해당 지역 경찰 시경 상황실로 전화를 걸어 확인 작업에 나섰다.

그런데 부산에서 ‘대어’가 낚였다. 부산시경 상황실에 있던 상황병이 대형 사고(?)를 친 것이었다. “여기 서울인데요”라는 말을 전투경찰로 보인 앳된 상황병 귀에는 ‘서울’이 서울의 치안본부나 그보다도 더 높은 청와대 같은 곳에서 걸려온 전화로 착각한 듯했다. 상황병은 “서면로터리에서 밀리고 깨지고, 부산역 광장에서도 어떻고……’ 등등 친절하고도 자세히 윗선 보고(?)를 해주었다. 덕분에 가장 정확한 경찰의 현장 정보를 윗분 당국자들보다도 먼저 획득하여 자신 있게 기사를 송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젊은 부산 시경 상황병의 숨은 공로(?)가 없었더라면, 6·10민주항쟁의 귀결이 어디로 치달았을지는 오로지 하느님만 아실 것 같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그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뭘 하고 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다.

아울러 부산의 6월항쟁의 역사적 경험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실도 있다. 당신 부산 시가를 누비며 그 역사적 현장에서 주도적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두 사람, ‘부산국본’ 상임집행위원장 노무현, 집행위원 문재인은 이후 민주정부 수립의 희망을 안고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의 민주화의 분수령이 되었던 6월항쟁 참여의 경험이 그들이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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