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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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
  • 이명준
  • 승인 2018.05.29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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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명동성당 농성이 마무리되자, 많은 이들은 6월항쟁을 이어갈 다음 계기 마련에 조바심을 갖고 있었다. 그 계기는 부산에서 마련되었다. 공교롭게도 또 천주교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바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의 농성이었다. 6월 16일 저녁 광복동과 보수동 일대에 집결한 부산의 시위대는 경찰에 쫓겨 대청동 가톨릭센터 앞까지 밀려나 물러설 곳이 없었다. 시위대의 요청에 부산 가톨릭센터 측은 문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300여 명의 시위대가 22일까지 이어간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농성을 앞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이하 ‘부산국본’)의 현장 지도부는 항쟁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명동성당의 농성 해산의 여파를 극복하고 새로운 구심을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농성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결정을 주도한 이들은 고호석 ‘부산국본’ 사무국장, 임정남 상임집행위원, 배성한 부산대총학생회 사회부장 등이었다. 이중 임정남 상임집행위원은 서울에서 천주교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부산으로 내려간 이력을 가진 대표적인 천주교 사회운동가였다.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 시위자들 (87.06.19)

부산 가톨릭센터 또한 천주교 부산교구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그간 부산의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구심 역할을 하던 상징적인 장소였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하며 5월 3일부터 시작된 부산교구 신부들의 단식기도회 장소도 가톨릭센터였다. 또한 부산 천사협과 명청 등이 주관한 광주항쟁 사진전이 열린 곳도 이곳이었다. 가톨릭센터는 부산의 민주화의 거점으로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곳이었다. 게다가 그날의 상황마저 시위대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고립되는 형국이어서 천주교회는 6월항쟁의 불길을 계속하여 지피는 일에 또다시 활용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집요하게 해산을 시도했고,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부산국본’ 지도부는 가톨릭센터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가톨릭센터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가톨릭센터 쪽에서도 비상시에는 들어와도 좋다고 승낙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부산국본’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던 박승원 신부의 적극적 역할이 있었다.

시위대는 최루가스를 뒤집어쓴 채 가톨릭센터로 들어갔다. 가톨릭센터 문을 잠근 시위대는 강당에 모여 대열을 정비하고, 농성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경찰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흩어질 것인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결론은 가톨릭센터를 사수하여, 투쟁의 중심지로 만들자는 데로 비교적 쉽게 모아졌다.

농성이 시작된 후 가톨릭센터는 부산 투쟁의 거점이 되었다.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던 시위의 종착지는 이곳이었다. 350여 명 정도의 농성단이 구성되고 3개의 조로 나누고 각 조의 대표를 뽑아 3명의 공동대표단을 구성했다. 1조는 부산대생,2조는 동아대생 그리고 3조는 다른 대학생들과 시민들로 나누었다. 이들은 이튿날 아침 엄격한 질서 유지와 흔들림 없는 투쟁을 다짐하는 4개 항의 “투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와 투쟁일정표를 내붙이고 <애국 시민들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만들어 옥상에서 뿌렸다. 그리고 17일, 농성단 대표들은 박승원 신부와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그들의 결의를 세계에 알렸다.

17일 아침부터는 명동성당의 감동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수녀원, 각 성당 등에서 순번을 정해 김밥, 주먹밥 등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인근의 국제시장 상인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자발적 성금과 기증품들도 답지하기 시작하였다. 최루탄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물안경, 치약, 랩 등을 비롯해 비옷 등 생활용품이 시민들의 격려 편지와 함께 몰려들었다.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에서 농성자들에 대한 뒷바라지는 류승렬 사무국장 등 부산 천사협에 일하는 사람들이 도맡아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 경험을 가지고 있던 서울의 천주교 인사들은 부산의 가톨릭센터 농성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지원을 하였고, 농성장에 들어와 있는 프락치들에게 대처하는 법 전수와 내부 규율을 정하는 것 등도 조언의 하나였다. 명동성당 농성을 경험한 명청 회장 기춘의 역할이 컸다.

부산의 가톨릭센터 농성은 수그러들던 항쟁의 불길을 되살리고 새로운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6월항쟁의 물줄기를 바꾼 6월 18일의 30만 명의 부산의 역사적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6월 22일 농성단이 해산을 선언하고 귀가하는 버스에 경찰이 보복성 최루탄 공격을 하여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버스에 동승했던 양요섭 신부김평겸 신부도 경찰에 집단 린치를 당했다. 24일 부산교구 사제단 80여 명은 성명을 내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 29일까지 농성을 이어갔다. 26일에도 가톨릭센터 앞에서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28일에는 중앙성당에서 폭력 종식과 인권 회복을 위한 미사 뒤 5,000여 명이 평화대행진을 했다. 6월 내내 부산 가톨릭센터는 민주화의 성화가 타오르는 성화대였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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