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한 신자들의 무신론, 거래하는 종교
상태바
열심한 신자들의 무신론, 거래하는 종교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5.23 08: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원의 역사: 신앙의 진전-3]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에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해 내신 하느님을 믿고 모세를 따라 사막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선택받은 백성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선조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을 따라 걸으며 야훼께서 자신들을 선택했음을 믿었다. 그러나 야훼는 그들을 좀더 깊은 믿음으로 이끌고 싶어하셨고 사막에 있던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구약시대의 사랑, 거래와 계약을 통하여 

다시 한번, 후세에 와서 돌이켜 보면, 하느님은 계약으로 맺어진 믿음 그 이상의 것을 원하셨지만 그 당시 그들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이 그것 밖에 안되었으며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 그들의 수준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였으나 그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약의 일종, 거래의 형식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조건이 없으셨으나 그들은 어떤 조건의 형식을 빌렸을 때 그 사랑을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들 중 자신들이 지켜야 할 부분을 성실히 지킨다면 야훼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약속한 땅으로 그들을 이끌고 들어가실 것이다. 그것이 거래의 내용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그것이 그들이 알아들은 대목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당신은 자신이 할 몫을 수행하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역할을 하실 것이라는 일종의 계약을 믿는 셈이다. 당신이 계약을 지키면 하느님이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분은 당신을 벌하실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 주면 하나 받는 방식이다.

당신은 자신이 선하면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당신이 악하면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과 천국의 포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여기며 도덕성이란 결국 공로를 많이 쌓고 죄를 피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죽고 난 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로는 규칙에 합당한 선한 일을 함으로써 쌓을 수 있다; 규칙을 위반하고 죄를 짓게 되면 공로를 잃게 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나에게만 관심 갖는 신앙

이런 식의 믿음은 굉장히 개인주의적이며 자기 중심적이 될 우려가 있다.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사제들 역시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을 도우라고 배웠다. 천국에 가기 위해 그들이 어떻게 했겠는가? 그들은 계명을 지키고, 규칙을 따라 살았고, 완전함을 추구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나는 프란치스코회의 신참 수사로 있을 때 완벽해짐으로써 내 영혼을 구하려고 하였다! 장상들의 눈에 나는 그야말로 완벽한 신참이었다. 나는 모든 규칙을 글자 그대로 지켰다. 나는 식사 시간에 절대로 늦지 않았다. 나는 기도시간에도 절대 늦지 않았다. 나는 서야 할 때 섰으며 무릎을 꿇어야 할 때 꿇었다. 절을 할때면 나는 배운대로 정확히 따라 했다. 완벽한 신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가 착실하게 살고 있다는 뿌듯함을 안겨 주었다. 내가 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독선적이 되어 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것은 그때 당시 내 관심은 내 자신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주님께 의탁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구원을 벌으려고 했다. 나는 아직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놔두는 법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이 뜻하는 바도 모르고 있었다. 예수는 “야훼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종교 생활을 하는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태도로 죄를 짓고 이 상태로 고착되어 버렸다.

규칙을 따르는 순종의 종교

분명한 것은 이 단계의 가장 중요한 덕이 순종이라는 것이다: 계명에 대한 순종, 규칙에 대한 순종, 장상들에 대한 순종. 구약성서상에서 이 현상은 유대교의 후반기로 갈수록 수 많은 계명이 난무했던 것으로 증명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계명이라면 흔히 10개만을 떠올리지만 유대교 후반에 들어서 율법학자들이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쭉 늘어 세운게 613가지에나 이른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법의 사소한 모든 것까지 지키게 되면 완벽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마치 내가 수도회의 가장 작은 규칙까지 완벽하게 지키려 했던 것과 같았다.

오늘날 많은 가톨릭 신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하고 교회의 모든 법을 지켜야 하고 사제가 말하는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순종의 종교일 뿐이다. 그것은 바리사이인들의 종교다. 기도, 고통과 자비는 실제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나는 그 시기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발달 단계 동안 많이 성장했다. 모든 아이들 역시 심리적 종교적인 발달단계에서 그런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들은 규칙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그들은 아이들의 장난을 좋아한다; 규칙에 따라 배우고 노는 것은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다른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면 그들은 절망하고 심지어 분노한다; 그들은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사진출처=pixabay.com

이 단계의 종교는 규칙을 배우고 따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삶에 있어 기본적인 규칙, 법을 존중하는 법과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우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무질서해지고 무법천지가 되며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그 이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누구나 한번은 꼭 거쳐야 하는 단계이며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 시켜야만 하는 단계이다.

내가 항상 말했듯이 보수적인 태도로 시작하는 것은 좋으나 신앙은 당신을 그 상태로 머물러 있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신앙은 지나치게 자기 방어적이고 자기 만족적이어서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성장하는 신앙은 현재의 상태에 대한 만족을 기반으로 보수주의를 거쳐 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법을 지키려는 사람과 부자들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하신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 차원에서 우리는 이 단계의 종교가 순종과 관습의 문제로 집약됨을 알 수 있다. 규범은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일러주며 항상 그 규범에 맞추어 생활하다 보면 우리의 행동은 관습이 된다. 관습에는 세세한 것과 포괄적인 것, 덜 중요한 것과 좀더 중요한 것이 있다.

도덕성에 관한 사회적인 의식이 있고 전례와 관련된 기도의식이 있다. 도덕성과 관련되어 자그마한 규범을 어기는 것은 비교적 가벼운 죄가 된다; 더 중요한 윤리적인 규범을 어기면 그것은 대죄가 된다. 교회법에 의하면 전례 예식을 편의에 따라 바꾸는 것은 그 전례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전례에 관한 중요한 교회 규범을 어기면 그 전례는 교회법상 부당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규범과 의식들은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다 같이 일치하여 기도를 드리기 위해 그것들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규범을 의식한다거나 그 단계에 고착되어 버리면, 우리의 도덕의식은 율법주의로 변질되고 우리의 예배는 의식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우리가 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여기거나 의식의 규범들을 지킴으로써 은총을 얻는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덫에 갇혀 버리게 된다.

우리의 교회 역사를 보면, 이 단계에 있는 종교는 덫에 걸려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을 믿음과 동일시하고 의식을 정확히 행하는 것을 합당한 경배와 동일시한다. 우리와 다른 규범이나 우리와 다른 예식을 지내는 사람들은 4세기 전 가톨릭이 개신교를 파문했던 것처럼 회피와 파문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전체 그리스도계의 교회가 되기 보다는 유럽의 제한된 일부 지역에만 한정되는 지역주의적인 교회가 되어버렸다. 생각 해보라: 지역주의적 가톨릭시즘.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의 독선은 지역주의를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내가 수도회에 있을 당시 내 개인주의에서 경험한 것과 똑같은 독선이다.

가톨릭이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 이런 종교는 실질적인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정상적인 가톨릭 신자이고 문화적으로도 가톨릭적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다. 그들은 주님을 사실상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구하고, 스스로의 영혼을 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족적인 종교 관습에 얽매여 있으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문화적인 편견에 사로 잡혀 있다.

이런 관습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고, 일체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들은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고, 헌금 바구니에 돈을 넣고 다른 좋은 일을 하면서 자신이 선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것은 올바른 교회에 다니고 그들의 자녀들을 바른 학교에 보내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면서 오는 가짜 일체감이다.

그것은 아주 편안한 형태의 그리스도교이며, 매우 자족적인 가톨릭시즘이다. 그것이 옳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탈피하라고 부르시는 하느님, 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알아보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이 단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그 분은 판단과 명령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 분은 하늘에 계신 위대한 경찰 같은 분으로, 사람들이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추적하시는 분이실 것이다. 그 분은 복수의 하느님, 전쟁의 하느님이실 것이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을 벌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에게 내린 고통을 승인하실 분이시다.

어떤 이는 이런 하느님이라도 계시는 게 아예 안 계시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더 나쁜 상황이다. 최악의 부패는 늘상 가장 지독한 법이다. 이들의 신앙을 예언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과 예수님께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과 비교하면 그것은 거짓투성이의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그것은 우상이다. 주님이신 하느님, 진정 하느님이신 하느님은 더 깊은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분이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