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명청과 광주항쟁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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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명청과 광주항쟁 비디오
  • 이명준
  • 승인 2018.04.0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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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에 시작된 명동성당 농성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시위대가 경찰의 봉쇄에 갇혀 철야농성을 할 때만 해도 다음날 자연스럽게 해산될 일시적인 농성투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정권의 강경 진압 기조에도 불구하고 그 투쟁이 시민들의 폭발적인 참여와 함께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자, 농성의 장기화는 기정사실화되고, 명동성당은 6월항쟁의 거점이자 진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자연스레 명동성당도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하지만 명동성당이 6·10투쟁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된 것은 단순히 돌발적인 사건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천주교계의 사회운동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꾸준하게 이어져 왔던 반독재투쟁의 과정에서 명동성당을 공간과 상징성 모두에서 근거지로 활용해 왔다. 명동성당은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모든 시위의 마지막 집결지였고, 이미 민주화운동의 성지의 기반을 서서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6월 10일 당일만 해도 명동성당에서는 1986년 말부터 200여 명의 상계동 철거민들이 강제 철거에 항의하는 천막농성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발돋움하는 데는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이하 명청)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다. 명청은 명동성당에서의 다양한 시위 집회에서 교회와 외부에서 진입한 시위 농성자들, 기층운동권, 정치권 사이에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는 조력자의 훌륭한 역할을 오랫동안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사진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명청이라는 자발적 청년조직은 1970년대 말부터 사회운동에 눈뜨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 초부터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쳐 가기 위해 다양한 학생운동 출신들과 협력 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춘, 이대훈, 김대영 등 많은 학생운동 출신들이 명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명청 지도부는 철저히 대중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운동권의 다양한 분파들이 명청에 들어와 활동을 하였음에도, 명청에서 정치적 분파활동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명청은 자발적인 대중들의 신앙적 양심, 정의감이 밑바탕이 되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의 명청 회원들은 500여 명 정도였는데, 대개가 명동에 직장을 가진 직장인들이었다. 회원들은 대부분이 변호사 사무실 직원, 금융권 회사의 직원, 간호사, 꽃집 주인, 인쇄소 사장, 상가의 직원, 교사, 학생 등등 명동에 일터를 둔 직업군들이었다.

명청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연합회와 3개 부서, 5개 위원회, 20개 단체, 총 800여 명의 회원을 포괄하고 있었는데, 단위 본당으로서는 최대의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명청은 매년 일반 직장인 200여 명 이상이 참가하는 여름 농촌활동과 봄·가을 청년대회, 매월 시민 시사교양강좌인 푸른마당, 신입회원 연합교육인 사도학당 등을 진행하고 있었다.

1985년 2월에 한 사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명동성당 마당과 들머리는 민주화의 열망을 가진 시민들의 발길로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명청이 필리핀 2월혁명의 사진들을 모아 명동성당 마당에서 ‘피플 파워 사진 전시회’ 연 것이다. 당시 이명준 등이 필리핀 정의평화위원회 등을 통해 구해온 사진들이었다. 사진전은 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마크코스를 몰아내고 아키노 정권을 세운 필리핀 국민들의 민주화 성공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까닭이었다.

이를 계기로 명청은 우리나라 5월 광주의 진실도 사진전으로 알리자고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85년 5월에 처음으로 광주항쟁 사진 및 비디오 전시회를 열었다. 광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의 김양래 사무국장 등에게서 받은 5월항쟁 관련 필름을 인화하여 판넬에 전시하였다. 사진들은 명청 회원 사진작가 석동일의 집에서 화장실을 암실로 만들어 몰래 인화작업을 하여 준비하였다. 광주항쟁 관련 도서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광주 사진집 등도 함께 전시하여 판매하였다.

광주항쟁 비디오는 여러 개의 판본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오전 10시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상영했다. 광주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해 받은 독일판, 일본판, 캐나다판 광주항쟁 관련 영상자료들이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상영되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광주 실상을 알리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으나, 참혹한 광주의 실상의 일면을 영상으로 시내 한복판에서 일반인들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비디오 상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TV 모니터 한 대로 보여주던 것을 6대로 늘려 증폭기로 연결하고 하루 종일 틀게 되는 상황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동안 군부 독재정권의 공포정치로 인해 감추어졌던 광주학살 만행과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 시민들의 뜨거운 분노를 일깨우며 확산되는 일대 쾌거였다. 광주항쟁 비디오 상영이 되면 매회 명동성당 문화관이 정원을 훌쩍 뛰어넘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를 지켜보던 사법당국이 명청을 사법 처리할 것이란 소문이 무성하였으나, 그 자체가 불법적인 것이 아니었고, 성당이라는 울타리의 힘에 의해 사법처리는 없었다.

명청은 1986년부터는 아예 광주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팔았다. 당시 광주항쟁 관련 비디오 복사본을 만들어 줄 제작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디오테이프 복사는 그야말로 수공업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춘 등은 서울교구 소속 신부들을 찾아다니며 비디오 기기 30여 대를 빌렸다. 이를 이용해 당시 홍제동에 살던 석동일 명청 회원의 집에서 이들 부부와 함께 몇날 며칠을 밤새 복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 봤자 하루에 복사한 테이프 물량은 고작 200개 남짓 정도였다. 명청 회원들의 수십 일의 철야 작업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수공업적 수고를 통해 만들어진 광주 비디오테이프를 1만 원에 판매를 했는데, 당시 무려 1만여 개가 판매되었다.

명청은 한걸음 더 나갔다. 광주항쟁 관련 사진 필름을 아예 2벌을 인화하여 한 벌은 명동에서 상시 전시하고, 나머지 한 벌을 가지고 전국 성당으로 사진 전시회를 다녔다. 무려 전국의 180군데 성당을 돌면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명청 회원 3명이 1개 조로 하여 트럭에 사진과 책을 싣고 가서 비디오를 상영하며 설명하는 노력을 하면서, 반복하며 전국을 돌았다. 당시 여러 명의 명청 회원들이 이 노력을 헌신적으로 수행했고, 그 중에는 1988년 명동성당에서 투신하였던 고 조성만 열사도 있었다.

당시 비디오 판매 및 전국순회전시회를 통한 수입금이 1억 5,000만 원에 이르렀다. 이렇게 모인 자금은 상당 부분이 별도 회계로 관리되어 민통련에 천주교가 내는 분담금으로 활용되고, 이에 더하여 민통련 집회 시위 등의 자금으로 쓰였다. 이 회계는 명청 회원이자 천사협 간사로 일하던 김정표(에스텔)의 꼼꼼한 관리로 철저히 비밀리에 관리되었다. 그녀는 “이 돈은 피 묻은 돈이다”며 회식에서 소주 한 잔 사 먹지 못하게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한때 담당자가 장부를 가방에 넣고 가다가 불신검문에 걸려 빼앗긴 꼼꼼히 정리된 장부가 경찰에 넘어가기도 하였으나, 이후 전국사제단에 4,000만 원을 기부하며 이 회계는 정리되었다.

이 테이프 판매 자금 덕으로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열거나 전시회 상영 등에서 필요한 대형 스피커를 초대형 용량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장만한 대용량 스피커는 이후 명동성당 집회와 시위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한다면, 1986년 7월 경 권인숙 성고문 사건으로 고문공대위에서 명동성당 내 집회를 개최했을 때, 명동에서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가두투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 경찰은 성당과 도로를 차단하여 명동성당 진입을 차단하였는데, 성당에서의 집회는 대형 스피커를 통해 명동을 넘어 을지로까지 전파되었다. 그러자 자발적으로 일반 시민들이 을지로와 명동 시가에서 집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명동성당은 이렇듯 6월항쟁의 전조를 이미 경험하고 있었다.

이렇게 광주항쟁 사진전시 및 비디오 상영으로 인해 명동성당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이미 민주화의 성지이자 해방구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4·13호헌조치 이후 신부들이 명동성당 옆 가톨릭센터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시위가 있었다. 5월 18일에 개최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 폭로미사’는 명동성당을 다시금 집중 부각시켰고, 집회 및 시위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 과정 속에서 명동은 자연스럽게 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장소로 대중들에게 각인이 되기 시작하였다.

명동성당 주변의 시민들도 점심을 걸러 가며 비디오와 사진을 보았고, 주머니를 털어 성금을 내고 매일 매일의 집회 방송을 통해 시위문화에 친숙해져 갔다. 따라서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민들의 폭발적인 지원과 참여 속에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도 큰 힘이었겠으나, 이미 익숙하게 단련되어 왔던 명동성당 주변 시민들의 호의와 신뢰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명청 회원들은 남대문과 동대문 등지에서 장사하는 분들에게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며 접촉을 넓혀왔는데, 이 분들이 나중에 명동성당 농성이 있을 때 각종 생필품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명동 시내는 제2금융권 본사들이 있었는데,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광주 비디오를 보러 많이 왔다. 명청의 광주 비디오 상영은 이들이 이후 6월항쟁의 주역이 되는 데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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