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통련은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직후 내부 논의에 들어갔다. 4월 13일부터 20일에 이르는 동안 민통련은 어떻게 전선을 만들고 상황을 돌파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3대 기본원칙’을 작성했다. 3대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동시다발 시위를 한다.
둘째, 대연합전선을 형성한다. 즉, 재야, 정치권, 종교계의 3자가 대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저 수준의 행동강령을 내세워야 한다.
이해찬 기획실장이 기본원칙을 제시하고, 성유보, 이명준, 이명식, 박우섭, 김부겸, 권형택 등이 의견을 통일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대중적 시위가 가능하다고 결론짓고, 이러한 취지를 종교계와 정치권을 설득하기로 하였다.
1986년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싸움에 함께 대처하던 민통련, 종교계, 정계의 실무 책임자들이 다시 모였다. 4월 19일의 수유리 집회로 민통련 간부들이 수배되는 바람에 NCC 인권위원회(총무 김동완 목사) 사무실이나 사선 이길재 사무실이 아닌 수유리 ‘개나리산장’을 비롯한 여러 비밀 장소에서 모였다.
민통련의 성유보 사무처장과 이해찬 기획실장, 천주교계의 이명준, 개신교계의 황인성, 민중불교운동연합의 고광진, 언론 부문의 정상모, 문화 부문의 김용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인재근과 유시춘, 상도동계의 김도현, 동교동계의 설훈과 한영애 등이 모였다.
최저 수준의 행동강령에는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불끄기, 경적, 종치기(천주교는 오후 6시 ‘만종’을 치기 때문에 이명준의 제의로 집어 넣었다.) 등 큰 이의 없이 합의되었다. 1986년 필리핀의 ‘2월혁명’의 일반시민 참여 성공 사례와 신민당 개헌현판식 때의 시민 참여를 고려하여 쉽게 정리되었다. 전국 동시다발도 쉽게 합의되었다. 동시다발은 1985년과 1986년 가톨릭농민회의 소몰이 싸움과 수입 농축산물 반대 투쟁에서 나온 경험을 참조하였다. 이 싸움을 주도한 가농은 이후 국본의 전국 지방 조직 건설의 실제적인 원동력이었고, 각 지역에서 진행되는 동시다발 대회를 이끄는 주력부대 역할을 했다.
민통련, ‘지역운동협의회’와 학생운동 조직은 이 전략을 빨리 이해하고 큰 이의 없이 준비하였다. 6월항쟁의 승리의 관건이었던 전국 동시다발 투쟁의 성공은 당연히 지역에서 풀뿌리를 내린 지역의 활동가들 그리고 두려움 없이 참여한 일반 시민들이 만든 쾌거였다.
“양김과 손을 잡아야 한다”
당시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할 때 벌어진 첨예한 논쟁 중의 하나가 정치권의 참여 문제였다. 김대중(DJ)과 김영삼(YS)으로 대표되는 정치권과 함께 할 것인지, 정치권은 빼고 민통련과 종교계만 할 것인지의 문제로 지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우선 개신교는 물론이고 사제단부터 정치 단체와는 함께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민추협이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천주교 사제단의 입장은 DJ와 YS를 빼고 비정치적인 세력만 연대하자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이 참여하면 운동이 변질되어버린다는 논리였다. 민통련에서는 “그렇게 하면 대중적 시위의 한계가 있다. 정치권, 특히 DJ와 YS를 꼭 합류시켜야 한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천주교계 인사들은 정치권의 참여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제단을 설득하는 것이 최대 관건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정치권과의 연대 문제를 두고 천주교 진영의 긴박했던 논의 과정이 있었다. 국본을 만드는 논의가 한창이던 87년 5월 어느 날, 민추협에서 일하고 있던 동교동계의 설훈이 명동 가톨릭회관의 6층 구석방으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던 문국주를 찾아 왔다. 이명준과 문국주를 두고 설훈은 “동교동계는 국본에 무조건 참여하지만 YS가 주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였다. 민추협의 한 축을 이끌고 있던 YS는 연대 활동은 하더라도 조직적인 참여까지는 안 하려고 한다는 게 골자였다.
당시의 운동권의 모습을 볼 때 제도 정치권이 재야세력과 연대를 주저할 요인들이 있었다. 1986년 5월 3일 인천의 개헌현판식 가투, 건대사태 같은 대규모 시위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정치권 인사들에게는 남아 있었다. 물론 운동권 내부에서도 많은 반성과 새로운 모색을 준비하고 있었다. 5·3인천사태의 경우 과격한 시위로 인해 피해가 엄청났고, 정권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운동권이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YS처럼 제도권 정치인들 사이에는 재야세력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주저하는 경향이 강하게 존재했다.
이명준 등 천주교 쪽 인사들은 개헌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반드시 들어와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천주교 사제단을 먼저 설득하면 이를 토대로 정치권 참여에 반대하는 개신교계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해방 전 신간회가 좌우를 넘어 공동전선을 펼쳤듯이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하나로 뭉치는 ‘제2의 신간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는 민중민주주의 논쟁 등으로 이념적으로 경도된 운동권과 5·3시위 이후 과격한 선도투쟁으로 궤멸적 수준으로 타격을 입은 운동권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명준 등은 서울대교구 사제단의 대표격인 송진 신부를 통해 긴급하게 전국사제단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이명준은 YS 참여의 해법이 사제단과 목회자협회 등을 설득하여 종교계가 민추협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며 관건이라고 판단하였다. 준 정당의 성격을 가진 조직인 민추협을 인정하게 되면, 이 조직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DJ와 YS가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이명준은 신부들에게 호소하듯 설득했다. “민추협은 정치단체가 아니다. 정치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화를 위한 운동단체로 봐야 한다”, “양 김을 묶어내야 한다. 양 김을 엮어야 대중투쟁이 폭발력 있게 성공시킬 수 있다. 그 민추협과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면 우리 진영이 굉장히 왜소해진다”, “친위 쿠데타 설이 팽배한데, 정치권과 분리되면 우리만으로는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 어떻게든 함께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사제단이 고민 끝에 가까스로 민추협의 참여를 받아들이면서,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의 한 장애물이 어렵게 해결되었다.
사제단 회의에서 국본에서의 실질적인 협상과 전권을 위임받은 이명준은 이후 민통련의 ‘3대 기본원칙’에 대해 지방교구 사제단의 동의를 모아 전국사제단 대표인 김승훈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와 활동 방향에 대한 천주교 내부 논의는 천사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명준 전국사제단 간사, 천사협 제정구 의장, 가톨릭노동사목 윤순녀 대표, 이길재 사선 총무, 명동성당청년회 기춘 회장, 김지현 전 회장, 문국주 정의평화위원회 간사 등이 주요 참석자들이었다. 천사협이 민통련 관련 논의를 하는 민통련의 당사자는 주로 이해찬이었다. 민통련에 이미 적극 참여하고 있던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은 별다른 이견 없이 국본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천주교계가 참여하게 됨으로써 다음 노력이 향할 곳은 개신교 쪽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개신교계를 통해 YS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이명준은 천주교와 개신교, 특히 민통련과 개신교계의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던 이길재 사선 총무와 논의를 하였다. 이길재 총무는 개신교 쪽과 논의를 거듭하였다. 이길재 총무는 김동완 목사, 인명진 목사, 오충일 목사 등 개신교의 중진 목회자들에게 “이번에 대연합을 못하면 신구교 에큐머니컬 운동도 결딴난다”고 설득하였다.
이명준도 김동완, 오충일 목사 등을 만나 “사제단은 민추협과 함께 하기로 합의했다. ‘목협’도 인정 안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냐?” 등의 설득을 했다. 그리고 개신교 쪽을 통한 YS의 참여를 이끌어 내려고 많은 노력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에서 당시 국본 참여를 주저하고 있던 YS와 개신교계가 다양한 논의들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알려진 바가 아직 없다.
마침내 DJ와 YS가 참여하기로 했는데도 개신교 측의 적극적인 참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해찬은 “이렇게 되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DJ와 YS를 선택하고 5가는 빠져라. 개신교의 참여가 꼭 필요하지만, 꼭 정치권하고 못하겠다면 민통련은 오히려 야당과 연대해서 문제를 풀어가겠다. 5가 때문에 정치권을 빼지 못하겠다. 1986년 개헌현판식 때 민통련은 민추협과 여러 번 연대를 한 경험이 있다. 민통련의 지도부도 굉장한 분들이지만 DJ와 YS의 대중적 영향력이 훨씬 큰 것이 현실이다”라고 개신교 측에 항의성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당시 민통련은 전선의 성격이 민중운동의 성격보다는, 민주화운동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았다. 민중운동으로 가면 소수 선도투쟁으로 갈 것이며, 당시는 대중투쟁의 시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후 황인성 등이 개신교 원로들을 설득해서 개신교 쪽도 이후 적극적으로 국본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NL이니 PD니 하면서 매우 관념화되고 있었고, 재야운동권은 도덕적 순결성 때문에 정치권하고는 연합을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 분위기를 깨고 대연합전선을 이루는 데 민통련이 앞장섰다. 학생, 시민단체 등 조직 기반을 갖춘 여러 부문운동과 지역운동의 연합체인 민통련, 도덕적 기반의 종교계, 대중정치 세력인 야당이라는 ‘3대 세력연합’으로 국본이 탄생하게 되는 데는 민통련의 정확한 판단과 노력들이 있었다. 천주교계는 이러한 과정에서 민통련의 가장 든든한 지원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본이 명실공히 실질적인 전선운동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보탰다.
6월항쟁의 성공 동인을 꼽는다면, 물론 전 국민적 민주화의 열망과 참여가 가장 큰 힘이었다. 하지만 국민적 저항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까지 이를 준비하고 만들어가는 여러 계기들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신구교 양대 종교 진영으로 하여금 국본에 조직적이고 통일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또 하나가 양 김을 축으로 한 정치권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양 김의 국본 참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만들어가는 데는 드러나지 않지만 다양한 역할들이 있었다. 그들의 물밑 노력 또한 6월항쟁 성공에 밑돌이 되었다.
국본을 중심으로 양대 종교계와 양 김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주교계의 역할이 선도적이었다면, 아울러 국본의 지역조직 활동에도 천주교계의 활동은 주도적이었다. 지역 국본 조직의 대표단을 대부분 종교인들로 세웠다. 정권의 탄압과 시위투쟁에서의 방패 역할을 종교인들에게 맡긴 것이다. 지역의 대표들 면면을 보면 사제단 신부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부 조직만이 아니라 하부조직은 가농의 탄탄한 조직이 주력부대로 포진되어 있었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