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이사야 예언서의 작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로, 첫번째 이사야서 작자의 여자 제자로 추정된다. 40에서 55장까지는 바빌로니아 유배 기간 동안 쓰여진 것으로 이스라엘 위로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이사야 40,1-2)
이스라엘 사람들은 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처벌의 시간은 끝났다. 이전까지는 자만심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죄가 되었다; 이제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다른 증거인 절망이 죄가 되었다. 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그 분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하고자 원하시기 때문에 예언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서 40,27-41)
이렇게 이스라엘은 배워 나간다. 예언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지 않고 점차 하느님의 사도, 종이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종의 노래’ 네 곡이 우리가 언젠가 보게 될 새 이스라엘을 그리고 있다: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
주 야훼께서 나의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이사야 50,4-6)
수세기 후 이 고통 받는 종의 노래를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안에서 고통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새 이스라엘이었으며 여전히 그러하시기 때문에 예언자의 말은 그 분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예언자의 메시지가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으며 그로부터 이사야서의 이 문장은 매년 성주간의 전례 때 봉독 되었다.
예언자들은 점차 이스라엘의 희망을 앞으로 올 날들에 두게 되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의 몰락을 보았고 그의 동족과 함께 유배를 갔다. 그의 예언자적 사명은 두 시기 모두에 걸쳐 이루어졌다. 몰락 직전의 그는 예레미야처럼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자 그는 전혀 다른 어조로 앞으로 다가올 희망에 대해 얘기 했다. 그는 예언자적 직감으로 새로운 예루살렘과 새로운 계약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 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키엘 36,24-27)
에제키엘 16장에는 -여기서 인용하기엔 좀 긴- 이스라엘을 비유로 든 아주 긴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것은 예언자가 사람들에게 예견한 미래를 비롯해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온 이스라엘 전 역사를 아름답게 요약한 것이다. 쉽게 풀고 좀 줄이면 다음과 같다:
[네 족보를 캐어 보면 너는 가나안 출신이다; 너의 부모는 우상을 숭배했다. 네가 태어나던 날 아무도 너를 돌보지 않았다. 따뜻한 포대기에 싸 줄 사람도 없었다. 너는 사랑 받지 못하고 들판에 내버린 개구멍받이 신세였다. 그때 내가 지나가다 피투성이로 발버둥치는 너를 보았다. 나는 너를 집어 올려 너의 피를 닦아주고 돌봐 줄 사람을 찾았다. 너는 날씬하고 아름답게 자랐다. 나중에 그 길을 다시 지나다가 네가 꽃다운 한창 나이가 된 것을 보았다. 나는 내 겉옷을 너에게 주고 너와 계약을 맺고 결혼하기로 맹세를 했다. 나는 너에게 선물-은과 금, 비단과 린넨, 보석과 향수-을 갖다 주었고 너는 왕비 같았다.
그러나 너는 너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었다. 너는 나 대신 내가 준 선물만 좋아했다. 너는 다른 남자들을 쫓아 다녔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 몸을 팔았다. 너는 내가 준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고 너의 영혼을 주었다. 네 마음 속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나는 너를 네가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맡겼다. 나는 내 힘으로 보호하지 않고 그들에게 너를 맡겼다. 그러나 그들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너를 강간했다. 그들은 너의 보물을 뺏어갔고 자기들의 쾌락을 위해 발가벗은 너의 몸을 구타했다. 너에게 싫증이 나자 그들은 네 집을 약탈했고 불살라 버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밝혀지고 행해지면 나는 네게 적합한 대접을 해 주겠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너에게 적당하다고 여기는 대접과는 다르다. 나는 네가 아직 어렸을 적에 너와 약혼했던 것을 생각하고 네가 한 짓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다시 친절을 베풀리라. 너와 맺은 계약을 존중하고 너와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 나는 너를 다시 사랑할 것이다. 너는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모자람이 없다. 그 분의 사랑은 용서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우리 보다 더 빨리 잊으신다. 은총은 실로 놀라운 것이며 변화시키는 힘이 있고 풍요롭다. 하느님은 노예로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살리셨다. 그녀는 아름다워졌고, 자기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은총의 다른 말인 선물을 주셨고, 사랑은 그녀를 더욱더 아름답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자주 깨닫지 못하듯이 이스라엘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하느님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다. 우리의 과거는 지나간 그대로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그 분의 용서와 새로움이 뚫고 들어올 여지를 제공하는 한 주님과 그 분의 은총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에제키엘은 그에게로 온 하느님의 말씀을 회개와 새로운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전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이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는 형상을 보았고 그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느님의 영광이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 아름다운 장면은 유배 후에 등장한 예언자들에 의해 한층 더 발전한다: 즈가리야, 오바디야, 요엘, 하깨와 이사야서의 세번째 작가가 바로 그들이다. 예언자들이 본 그 장면은 후에 신약성서의 묵시록에 다시 등장한다. 예언자는 말하자면 낡은 도시, 황폐해진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라.
모두 너에게 모여 오고 있지 않느냐?
너의 아들들이 먼 데서 오고,
너의 딸들도 품에 안겨 온다.
이것을 보는 네 얼굴에 웃음의 꽃이 피리라.
너의 가슴은 벅차 올라 부풀리라;
바다의 보물이 너에게로 흘러 오고
뭇 민족의 재물이 너에게로 밀려오리라;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아니하고
너의 달이 다시는 스러지지 아니하리라.
야훼가 너의 영원한 빛이 되고
너의 하느님이 너의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곡하는 날이 오지 아니하리라.
너의 백성은 모두 올바르게 살아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라.
너의 백성은 내가 심은 나무에서 돋은 햇손이요
내가 손수 만든 나의 자랑거리다."
(이사야 60,4-5. 20-21)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