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진영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며 큰 역할을 한 이들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주축인 천주교 사회운동 세력은 농민, 빈민, 노동, 청년, 학생 등 각각의 부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농민운동의 주력인 가농, 제정구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 그리고 노동운동분야의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명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각 본당의 청년회 그리고 대학생 조직인 가톨릭대학생연합회(Pax)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의 공식기구인 주교회의 산하단체 정의평화위원회의 역할도 지대하였다.
1984년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은 제반의 세력을 다 모아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이하 천사협)을 출범시켰다. 초대 의장은 빈민운동을 하고 있던 제정구 회장이었다. 천사협에는 가톨릭농민회, 윤순녀가 이끄는 노동사목, 명동성당청년회 중심으로 한 천주교 청년모임 등이 결합하였다. 한편 인권변호사로 왕성하게 일하고 있던 이돈명, 유현석, 황인철 변호사 등 쟁쟁한 변호사들이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천사협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인적으로 대오를 연결하는 과정에는 인천교구 홍보국에서 일하던 이명준과 정의평화위원회 간사로 일하고 있던 문국주, 명동성당청년회 회장 기춘의 역할이 컸다.
천사협은 전국 조직과 함께 각 교구별로 지역 천사협을 조직하고 있었다. 지역 천사협의 대표는 대부분 지역 민통련의 대표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산교구 송기인 신부, 안동교구 류강하 신부, 춘천, 원주 등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지역 천사협은 광주, 부산, 마산, 원주, 청주, 전주, 인천 등 교구별로 거의 전 지역에서 조직되었다. 일반 평신도들의 참여가 약한 지역에서는 가농 지역 사무국이 지역 천사협 사무국과 민통련 지부 사무국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전주의 경우에는 노동사목 사무국이 민통련 사무국을 함께 운영하였다.
당시 천주교계의 사회운동 세력이 공유하고 있던 하나의 공감대는 천주교계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재야운동권 연대조직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당연히 여러 시위와 집회의 경우에도 재야단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민통련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대외적인 활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의 인식과 노력은 민통련 조직의 확장과 활동력에 큰 힘이 되었다.
천사협은 초기부터 민통련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민통련에는 천주교 연합단체 천사협은 물론 가농,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이하 명청)도 함께 가입을 하고 있었다. 명청의 경우 개별 성당 청년회가 민통련에 가입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천주교를 대표하는 청년단체가 없는 상황에서 청년단체 대표성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천사협의 민통련에서의 활동 등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의 적극적인 민주화투쟁에는 이명준, 문국주, 기춘, 이길재, 제정구, 정성헌, 윤순녀, 김지현 등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다. 물론 전국사제단을 비롯한 신부들의 지원과 협력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신·구교 연대모임의 결성과 연대활동
천주교 사회운동은 그 자체적인 민주화운동의 역할도 지대했지만, 다른 부문운동을 지원하고 불씨를 살려 전체 운동전선을 확대시키는 데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 천주교회의 지원과 합법적이면서 다각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그들의 장점 때문이었다. 천주교 사회운동이 일종의 연대운동의 거점 역할을 한 것이다. 그즈음 천주교 사회운동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연대운동의 성공적 사례가 바로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이하 ‘사선’)이다.
사선은 1970년대부터 에큐메니컬 사회행동협의회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던 단체였다. 이는 신·구교 연합으로 당시로서는 유일한 연대운동체로 사회운동의 구심이자 현장 운동단체에 대한 물적 지원의 중심 역할을 했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자금이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이들의 지원을 받은 곳으로는 노동운동을 하던 인명진 목사의 영등포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가 있던 인천산업선교회 등 수도권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조직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다가 1979년 ‘YH 사건’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1980년 광주 학살이 일어난 이후에는 거의 활동을 못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조직의 주도권도 예수교장로회나 보수 교단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후 개신교와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에서 이를 다시 재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사선이 붕괴되니까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세계교회협의회 입장도 곤란하게 되었다. 거기에 계속 지원할 명분과 통로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와 맞물려 신구교 연대운동체인 사선을 다시금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사선 재건에 물꼬를 튼 것은 천주교 쪽이었다. 이명준은 우선 천주교계를 이끌어내기 위해 가농을 이끌고 있던 정호경 신부와 정성헌 그리고 이길재 등과 긴밀하게 협의를 했다. 이들은 함께 종로5가 개신교 쪽의 권호경, 김동완 목사 등과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여러 논의 끝에 청계천2가 어느 식당에서 신구교 연대운동체인 사선의 재건에 합의를 하였다. 재건된 사선의 고문에 박형규 목사와 지학순 주교, 회장에 김승훈 신부, 사무총장 총괄에 권호경 목사가 선임되었다. 이렇게 하여 신구교 연대운동체가 다시금 조직되었다. 사선의 총무는 초기에 2년 정도를 개신교 쪽에서 권호경 목사가 맡았고, 1986년 말에 천주교로 넘어와서 가톨릭 농민운동을 하던 이길재가 총무를 했다.
당시 사선은 사회운동의 유일한 연대조직이자 대책회의의 본산이었다. 많은 사건에 사선이 중심이 되어 대책회의를 꾸렸다. 학원안정법에 대한 반대투쟁, 여러 농민운동 관련 사건들에 대해 대책회의를 만들어서 현장을 지원하였다. 당시로서는 운동권이 모이고 힘을 합치는 일종의 터미널이었다. 사선 활동에는 천주교 쪽에서는 사선 총무를 맡은 이길재, 제정구, 노동사목의 윤순녀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개신교 쪽에서는 김동완 목사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김동완 목사는 당시 장충체육관 근처 약수동감리교회에서 담임을 맡고 있었다. 화통한 성격으로 신구교 연합에 꽤 많은 역할을 했다.
아울러 사선을 통해 각각의 사회운동 세력들과 접촉을 확대하는 과정이 바로 국본 탄생과도 연결되었다. 특히 국본 참여에 미온적이었던 민추협의 김영삼계를 적극적으로 추동한 일련의 노력에는 사선을 통한 개신교계를 움직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사회운동 세력이 사선을 통해 연대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6월항쟁의 성공에 있어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이는 단적으로 사선의 총무를 맡고 있던 이길재가 국본의 사무총장을 맡은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재건된 사선은 국본 건설과 6월항쟁의 범국민적 참여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물론 물밑에서 긴 논의와 숨죽인 협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드러나지 않는 노력들이었다. 양 김으로 대표되는 정치권이 국본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데는 사선을 통한 신구교의 협의가 실질적인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권인숙 성고문사건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사선의 역할은 지대했다. 민통련, 민주화추진협의회, 천주교, 개신교의 주요 인사들이 함께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게 되는 과정에서도 그 시초는 사선과 천주교였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