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대답
1987년 5월 18일 월요일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열렸다. 이 미사는 전국사제단이 광주민주항쟁 7주기와 함께 박종철 군 추모를 준비한 특별한 미사였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2,000여 명의 신자와 민주인사가 운집하여 미사를 드렸다.
이 날 김수환 추기경이 한 강론의 메시지는 다른 때보다 그 톤이 강했다.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수위가 상당히 높았다. 함세웅 신부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김수환 추기경 신변이 걱정되어 무엇보다 먼저 추기경을 한시바삐 사제관으로 모시고 가게 배려했다. 함 신부에 따르면, 사건이 굉장히 중요하고 폭발적이기도 했고, 정권의 반응이 어찌 나올지 여러 가지를 고려하기도 해서, 추기경을 보호하기 위해 1부 미사가 끝나고 사제관으로 가시게 했다고 한다.
독재정권에 치명타를 안긴 은폐조작 폭로
그리고 2부가 시작되었다. 강대상 중앙에 선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목의 미리 준비한 문건을 읽어 내려갔다. 8절지 크기의 종이 앞뒤에 3,120자가 빽빽이 적힌 전국사제단 명의의 성명서였다. 김승훈 신부의 목소리는 떨렸고, 듣고 있는 이들은 놀라움으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성명서는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박종철 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으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 계류 중에 있는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5과 2계 학원분과 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사는 진짜 하수인이 아니다.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은 위 학원문화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반금곤, 경장 이정호로서 이들 진범들은 현재도 경찰관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은폐 조작되었다는 전국사제단의 이 날 발표가 있기까지 여러 긴박한 과정들이 있었다. 은폐 조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먼저 5·3인천사태와 관련하여 수배 중 구속된 이부영의 증언으로 시작되었다. 영등포교도소에 구속되어 있던 이부영은 은폐조작 사실을 알리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관 두 명이 제가 수용돼 있는 그 사동으로 별안간 수감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좀 경계를 하고 그랬는데, 한 사람은 찬송가를 부르고 또 한 사람은 방 안에서 울고 그랬어요.…… 화장실에서 쓰는 갱지에다가 몰래 쓴 편지를 저희들과 가까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교도관들을 통해서 밖에 있는 분들에게 알린 거죠."
이부영이 1987년 2월 중순 경에 쓴 편지 3통이 교도관 한재동 손을 거쳐 전직 교도관 전병용에게 전달되었고, 전병용은 이를 3월 중순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전병용은 이 편지 전달 후 이틀 뒤 수배 중이던 장기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이부영을 숨겨준 이유로 수배 중이던 김정남은 고영구 변호사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김정남은 이 내용을 어떻게 알릴지가 고민되었다. 야당인 신민당 국회의원을 통해 임시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때 폭로하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제도정치권이라 편지의 출처와 과정, 경위 등을 밝혀야 하는 난점이 있었다. 이 문제를 같이 숙고한 고영구 변호사의 증언이다.
"외신을 통해서 다시 국내로 들어오게 하는 그런 방법은 위험성이 많다고 판단이 됐다. 이것이 제대로 외신이 돌아서 들어오기 전에 차단이 될 염려가 있다. 이렇게 판단을 했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선택을 한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자."
김정남은 함세웅 신부에게 편지를 썼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내는 편지도 동봉했다. 편지 내용은 최악의 경우 “축소, 조작 사실을 사실로 확인하고 전국사제단에게 제보한 사람이 수배 중의 김정남”이라고 밝혀도 좋다면서, 어떻게든 발표는 꼭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을 맡고 있던 함세웅 신부는 당시 구파발성당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5월 중순에 접어들 즈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 황국자 여사와 딸 고은영 양이 구파발성당에 미사 드리러 와서 함세웅 신부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이 분들은 김정남을 대신하여 발품 팔아 편지 전달을 수도 없이 많이 한 드러나지 않은 든든한 우군이었다.
편지를 받은 함세웅 신부는 5월 17일 주일 김승훈 신부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김승훈 신부가 성명 발표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에게도 연락하여 제2선을 구축해놓기도 했다. 그날 17일 주일 저녁, 홍제동성당으로 김승훈 신부를 찾아간 함세웅 신부는 다음날인 5월 18일에 있을 미사에서 이 성명을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당시 함세웅 신부가 김승훈 신부를 만나서 말한 내용이다.
"민주화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신부님들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이것만 공개하면 전두환 정권은 파멸된다.…… 무너진다.…… 이번 일은 김승훈 신부님이 하실 몫, 내가 할 몫, 업무분담을 하기로 약속해서 월요일 미사 때 명동성당에서 발표를 하자. 내가 오늘 저녁에 가서 다 서류 준비를 하겠다."
김승훈 신부는 함세웅 신부에게서 성명 초안을 받아 몇 번을 계속 읽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너무 엄청난 일이므로 발표는 신중히 하는 게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것은 어쩌면 전국사제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기획은 함세웅 신부가 하였다.
무소불위 대공수사단의 몰락
전국사제단의 발표가 있고 나서, 5월 21일 오후 6시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고문살인의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 사흘간 전국사제단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과연 권력 당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거꾸로 전국사제단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고 덮어씌울 수 있는 정권이기에 그 기다림은 길고 초조했다.
검찰은 5월 20일, 재수사를 시작하였다. 이날 밤 경찰은 스스로 범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해 검찰에 데려왔다. 21일 오후 4시, 3명의 추가범인에 대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5월 29일에는 검찰이 축소 조작을 주도한 대공 수사 2단 단장 박처원, 5과장 유정방, 5과 2계장 박원택을 범인도피죄로 구속 수감했다. 그러나 전국사제단이 강력히 의혹을 제기한 축소, 조작, 은폐의 최고 책임자라 할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이번 재수사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러나 강민창은 박종철이 죽고 나서 꼭 1년만인 1988년 1월 15일, 부검의 황적준 박사의 일기장이 근거가 되어 구속되었다. 황 박사로 하여금 허위 감정 의견을 제출하도록 한 직권남용과 사인을 은폐한 직무유기혐의였다. 전국사제단의 발표와 강력한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5공 정권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조작과 은폐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사제단은 5공 정권이 축소조작사건을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가, 6월 22일 <진실이 밝혀지기보다는 은폐되고 있다>는 제목의 장문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1차 성명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에 못지않게 이 성명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까지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축소조작하고 은폐하려는 5공 정권의 안간힘을 이 성명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모는 5공 정권에 의하여 여전히 은폐되고 있었고, 어쩌면 오늘까지도 당시의 내무부장관 등 축소·조작·은폐의 책임과 진실은 영원한 미궁으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전국사제단의 5월 18일 성명에도 불구하고 5공 정권과 검찰은 여전히 미봉책과 봉합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이 성명 초안은 수배 상태에 있던 김정남이 작성하고, 전국사제단의 검토를 거쳐 발표되었다.
한편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전두환 정권은 5월 26일,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노신영 총리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이한기 감사원장이, 장세동 안기부장이 퇴진하고 안무혁 국세청장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 연쇄적으로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이 바뀌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축소조작사실이 밝혀지면서 전두환 정권의 권력 지형이 바뀐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제2인자, 후계자로 거명되던 노신영, 장세동이 몰락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죽은 박종철이 살아 있는 노신영, 장세동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정국도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국사제단의 발표를 계기로 수세에 있던 재야 민주화 진영과 야당은 일거에 생기를 회복했다. 4·13호헌조치 이후 신당 창당과정에서 5공 정권의 물리적 탄압으로 계속 수세에 몰리던 민주당은 전국사제단 발표를 계기로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5월 23일, 민주당은 박종철 군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각 총사퇴와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였고, 25일에는 사건에 책임을 지고 전두환 정권이 퇴진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은 5월 23일, 이제까지 2·7 국민 추도회와 3·3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대행진 시위를 주도해 왔던 ‘박종철 군 국민추도위원회’를 ‘박종철 군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로 확대 발족했다. 이것이 디딤돌이 되어 5월 27일에는 재야와 민주당이 연합하여 국본을 발기 결성하였다. 전국사제단의 발표가 4·13호헌조치 이후 소극적, 분산적으로 전개되던 민주개헌운동을 범국민적 차원의 적극적, 통합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국내 언론은 연일 박종철 사건의 추이를 대서특필로 보도하였고, 국민의 공분은 날로 끓어올랐다. 이러한 분노의 국민적 분위기는 6월의 민주화투쟁으로 점화되었다. 그것이 조직적, 대대적으로 분출되어 나타난 것이 ‘6·10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였다. 그것이 명동성당 농성투쟁, 6·18최루탄추방대회, 그리고 6월 26일의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동시에 10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한 ‘국민평화대행진’을 거치면서, 민주화라는 장엄한 승리를 이끌어내는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전국사제단 발표의 위력과 파장은 그렇게 컸다.
다른 한편으로, 전국사제단의 발표는 이미 권력의 앞잡이로 전락하여 정권의 안보와 그 유지를 위해 고문 등 무소불위의 국민 탄압과 인권 유린을 자행하던 대공 경찰의 궤멸을 가져 왔다. 그것은 그들의 자업자득이었다. 대공 경찰의 대부 박처원 구속은 정권 안보에 편승하던 대공 경찰의 말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전국사제단의 고문치사사건 조작폭로는 이 나라 민주화의 진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