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라는 구호 첫 등장
광주대교구 신부들의 단식기도와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라는 구호의 첫 등장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광주교구 신부들의 단식 실행 전에 전국의 각 교구 대표들이 대전에서 만나 전국적으로 단식기도를 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함세웅 신부를 대신해서 서울교구 사제단 모임을 주도하던 송진 신부가 전국의 신부들을 소집하여 전국의 사제단 대표들이 대전에서 모임을 가진 날을 그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4·13호헌조치에 대한 천주교의 대응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모임에서 두 가지가 결정되었다. 우선 당시 여러 구호가 남발하는 것에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국사제단 간사를 맡고 있던 이명준은 보고 형식을 빌어 “현재 가장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 요구다. 이것으로 구호를 통일해야 대중들과 함께 투쟁을 조직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제안하였고,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이 모임에서 결정된 이 구호는 향후 천주교의 일련의 투쟁과정에서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이는 광주교구를 필두로 한 신부들의 단식기도의 구호가 되었고, 나중에는 천주교 전체로 확산되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설립된 후에는 국본의 구호로도 쓰였다. 아울러 이 모임에서는 지방자치실시도 민주화의 주요한 요구사항으로 관철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졌다. 대중적인 구호에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가 아니라 ‘동장에서’가 등장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또한 이 모임에서는 천주교의 향후 투쟁 참여에 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재야단체들과 협의하는 천주교계의 창구로 이명준을 지목하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전국사제단 모임에서 동시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논의를 진행하던 중 의견 차이가 있어 실행 날짜를 확정하지 못하던 차에 광주교구 소속 신부들이 결단해서 먼저 단식기도에 나섰다. 광주교구 신부들의 단식기도가 시작되자, 투쟁의 불길을 확산하기 위해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명준은 4월 22일 광주로 내려가 단식기도 현장을 방문하고, 전주에 들른 다음 대전으로 가서 가톨릭농민회의 정성헌을 만난다. 이명준과 정성헌은 단식기도를 확산하기 위해 각각 지방교구를 나눠서 맡기로 하고 춘천, 청주, 안동은 정성헌이, 이명준은 서울에 와서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를 각각 만나서 광주교구 소식을 상세히 알린 후, 인천교구와 대구교구, 부산, 마산을 들렀다.
광주교구의 선도적인 ‘개헌을 위한 단식’은 전국의 교구별 신부들의 단식기도를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고, 마침내 국민적 개헌 투쟁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천주교계는 당시 운동권의 분분한 이념 논쟁을 뛰어넘어 직선제 개헌투쟁 중심으로 정리하는 즉, 개헌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계에서 먼저 정리한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라는 직선제 개헌의 열망을 담은 구호도 개헌투쟁을 확산시키고 대중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데 한몫을 하였다.
단식기도의 전국으로의 확산
4월 21일 이후 광주 가톨릭센터의 단식기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교구 사제들의 단식농성은 전국의 교구로 번졌다. 광주 농성장을 방문한 문정현, 문규현 신부 등 전주교구 사제들이 4월 24일 단식농성을 이었다. 이어 서울대교구(4월 27일), 안동교구(4월 29일) 등 전국 16개 교구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개신교계도 가세했다. 4월 24일엔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 소속 목사와 장로 등 20여 명이 무기한 단식기도를 시작했다. 4월 27일 김병균 목사 등 전남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소속 목사 27명이 광주YWCA 6층 사무실에서 단식기도를 시작해 12일을 버텼다. 신부들의 단식농성은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커다란 파열구를 냈고, 전 국민적 투쟁의 서막을 열어 젖혔다. 이후의 일련의 단식기도와 단식기도 지지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 21일 광주교구 남재희, 안호석, 임병태, 송홍철, 김희항, 이재휘, 김재기, 강종훈, 이준형, 박성열, 표재현, 황양주, 오요안, 박철수, 윤용남, 김승희, 정규완, 이천수, 강영석 신부 등 19명, 광주가톨릭센터 소성당에서 단식기도 및 성명서 발표
-4월 23일 전국사제단, 시국성명서 발표
-4월 24일 전주교구 양경배, 윤양호, 최상범, 이덕근, 권이복, 김의철, 이상섭, 서광석, 정종복, 이성우, 박병준, 현유복, 김병준, 김동준, 범영배, 김병운, 김준호 신부 등 23명, 가톨릭센터 2층에서 성명서 발표 후 단식기도 시작.
-가톨릭노동청년회 전남연합회, 가농 전남연합회 등 전남지역 13개 재야단체, 광주 신부 단식기도에 동참, 성명서 발표
-4월 25일 광주가톨릭신학대 대학원 남승택, 김진풍, 조성제, 박기준, 김계홍, 오창일, 김영권, 김진화, 이성균, 김권일, 안상길, 문선구, 이동, 윤용선, 박홍표, 김두윤, 김양회, 이부언 부제 등 18명, 단식기도 동참
-4월 27일 서울교구 안충석, 송 진, 김종국, 김구희, 최주호, 전태준, 남국현, 민병덕, 배갑진, 경갑실, 허근, 염수의, 구요비, 정의덕, 이상준, 최기섭, 주수욱, 홍인식, 안병철, 김홍진, 장강택, 소윤섭, 박항오, 최동진, 김윤태, 추영호, 김현배, 김철호, 김정남, 정월기, 고석준, 서춘호, 남학현, 양권식, 유근복, 허중식, 이재을, 이상헌, 정웅모, 박희원, 이찬일, 구일모 신부 등 62명, 명동성당 교육관 2층에서 단식기도 돌입, 성명서 발표
-광주교구 수녀 79명, 가톨릭센터에서 단식기도 시작
-4월 28일 방영술, 이병호, 범선배, 고승유, 조철현, 이철우, 안명옥, 김희중, 김창훈, 김진석, 왕수민, 이홍기, 오영민, 김정수, 송종의, 허성 등 광주가톨릭대학 교수 신부 16명, 성명서 발표
-4월 29일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군사통치체제의 지속과 승계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 발표
-안동교구 류강하, 김학록, 이영길 신부 등 17명, 목성동성당에서 단식기도 시작
-원주교구 박순신, 김승오, 김한기, 배은하 신부 등 14명, 단식기도 돌입
-4월 30일 인천교구 사제 39명, 답동성당 미사 후 가톨릭회관에서 단식기도 돌입, 성명서 발표
-오경환, 김정남, 우제국, 윤주병, 정무웅, 최창무, 서광식, 차지석, 김성태, 이찬우, 염수정, 한정근, 심상태, 유병일, 심용섭 등 서울가톨릭대 신학부 교수 신부 15명, 시국선언문 발표
-5월 1일 원주교구 수녀 21명, 동조 단식
-마산교구 이응석, 허철수, 유영봉 신부 등 21인, 단식기도 돌입
-춘천교구 김정식, 박영근, 최원석 신부 등 15인, 강릉 임당동성당에서 단식기도 봉헌 후 11일부터 춘천 소양로성당에서 단식기도 돌입
-인천교구 답동성당 신도 청년회 1,000여명, 미사 후 가톨릭회관 입구에서 기도회
-5월 3일 서울교구 사제, 단식 풀고 성명서 발표.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 서명운동 개시
-부산교구 박승원, 양요섭, 김윤근, 표중관, 권지호, 김승주, 석찬귀, 유봉호, 김두완, 최득수, 황철수, 이찬우, 예정출, 심순보, 김영곤, 박용조, 문성호, 이재만, 이택면, 이병주, 신요안, 이동한, 이기정, 이기환, 이영묵, 박태식, 김평겸 신부 등 28인, 가톨릭센터 7층에서 성명서 발표하고 단식기도 돌입
-5월 4일 부산교구 사제단, “동료 사제들의 단식기도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 발표. 이후 교구 산하 62개 성당 신자들이 단식기도 동참, 각 성당에서 철야기도 돌입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서울교구정의평화위원회와 공동으로 윤공희 대주교 집전 하에 명동성당에서 정의평화 미사
-전국사제단, 미사 후 서울교구 단식 사제들이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민주개헌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내용의 성명서 발표. 1차 서명 사제 571명 명단 공개(서울 125명, 대구 13명, 광주 54명, 춘천 20명, 대전 63명, 인천 48명, 청주 23명, 안동 21명, 수원 37명, 원주 30명, 전주 67명, 부산 26명, 마산 44명)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 학생 400여 명, 단식기도 시작
-대구교구 원유술, 구본식, 김옥수, 박상호 신부 등 12명,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단식기도 동참
-대전교구 이계창, 정지풍, 구일모 신부 등 29명, 대흥동성당에서 단식기도 돌입
-5월 6일 수원교구 사제단, 조원동성당 미사 후 교구청에서 단식기도
-5월 11일 청주교구 연제식, 이현로, 성완해, 신성근 신부 등 10명, 단식기도 동참
-5월 17일 원주교구 각 본당별 신자들, 검정 리본 달고 1일 단식기도를 봉헌
-5월 18일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서울교구정의평화위원회와 공동으로 명동성당에서 광주 추모미사 봉헌
-전국사제단, 박종철 사건 은폐 조작 폭로
-제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 주교좌 중앙성당에서 구국기도회 개최 후 성명서 발표. 사제단은 미사 후 전국 동료 사제 기도행렬에 동참한다고 천명
-5월 21일 프란치스꼬회 수도자 15명, 단식 시작
-제주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단식기도 동참
광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김양래 사무국장 등은 이러한 일련의 단식기도와 지지활동에 대해서 기록하고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9일간의 단식기도 일지와 전국 각 교구 사제단 및 평신도 단체들의 지지활동 내용을 엮어서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사제들의 단식기도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50페이지의 책자를 발간했다. 그런데 이 자료집을 광주지방검찰청의 지휘를 받은 광주경찰서에서 1987년 5월 16일 1만 5,000부 전량을 탈취해 갔다.
전국사제단, “개헌 요구는 민주 국민의 기본권리”라고 선언
천주교의 일련의 단식기도의 확산의 기폭제는 4월 23일의 전국사제단의 성명서 발표였다. 전국사제단은 <우리의 기도와 선언–긴급조치 시대의 재현을 거부하고 민주제 개헌을 촉구한다>라는 제목으로 시국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시국성명서는 열 가지 주장을 핵심으로 담고 있는데,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의 제반 요구들을 잘 요약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의 시대적 소명을 여실히 담고 있는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성명서에서는 “우리는 개헌논의의 자유와 민주제 개헌 주장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민주 국민의 기본 권리”임을 천명하여 개헌투쟁의 정당성을 분명히 선언하였고, “불의한 권력에 대한 협력과 동조는 범죄행위”로 규정하여 동시대인들의 양심과 윤리적 판단과 결의의 기본 규율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모든 민주 세력은 하나로 뭉쳐야”함을 요구하였으며, 특히 “우리는 외세의 힘을 빌어 이 땅의 민주화를 이룰 만큼 비굴하지 않습니다”고 선언하면서, 미국의 광주 책임을 지적하고, 한반도 평화와 외세 개입 반대를 선포하여 반외세 자주와 반독재 민주가 둘이 아님을 선언하였다.
우리의 기도와 선언-긴급조치 시대의 재현을 거부하고 민주제 개헌을 촉구한다
우리는 민주제 개헌에 대한 유신체제 붕괴 이후의 국민적 합의와 소망을 유린, 봉쇄하는 이른바 ‘4·13결단’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변형된 쿠데타이며, 80년대 판 긴급조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직시할 때, 과연 우리 정치공동체는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가 하는 통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엄청난 경찰 병력의 일상적인 동원과 국민 위협, 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살인을 비롯한 공권력의 남용과 전횡, 그리고 일련의 정치적 상황의 전개는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지적처럼 10·26사태로 귀결된 유신 말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고도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민주화와 국민 내부의 화해를 위해서라면, 그 뜻이 없음을 탓할 일이지, 시간이 없음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간절히 호소하면서 이른바 ‘4·13조치’와 관련하여 우리의 견해와 결의를 다음에 밝히는 바입니다.
1. 현행 헌법에 의한 정권 승계는 역사와 국민으로부터 거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제 개헌은 일부 정치 군벌에 의한 쿠데타로 비롯되고 광주사태라는 민족사적 범죄 위에 세워진 제5공화국이라는 가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민주적 정치공동체를 새롭게 창출하자는 국민적 합의요 소망이며, 역사적 과오로 점철하고 있는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화해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 정권은 민주화와 그것을 위한 개헌보다는 오직 영구집권의 관철을 위한 방안으로서의 개헌만을 기도하다가, 기만적 합의 개헌이 불가능하게 되자 예정된 각본에 따라 호헌으로 돌아서고, 제도적인 폭력으로 민주제 개헌운동을 봉쇄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사쿠데타의 산물이요, 군부 독재정권의 창출 기반인 현행 헌법에 의한 정권 승계는 물론, 앞으로 탄생될 어떤 정권도 정통성이 없는 것으로 역사와 국민으로부터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2. 현행헌법에 의한 정권 승계는 정치군벌 내부의 권력 승계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현 정권의 호헌으로의 회귀는 이제까지의 개헌 논의가 국민의 민주제 개헌 요구를 호도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정통성이 결여된 현 정권의 출범과 권력형 부정부패와 특혜특권을 은폐, 향유하고자 하는 권력욕의 표출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아니며, 현 정권의 사실상의 영구화 조치로, 정치군벌 내부의 권력 승계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따라서 군사독재의 승계와 세습을 결과할 것이 자명한 앞으로의 자체의 정치 행사와 일정은 주권자인 국민에 의하여 단호히 거부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 정권이 스스로의 그릇된 발상과 과오로부터 회오, 각성하여 인간의 이성으로 되돌아와 민주화와 민주제 개헌에의 길로 허심탄회하게 나설 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3. 우리는 두려움 없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구현해 나갈 것입니다.
현 정권은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민주화와 민주제 개헌 주장 또는 그 운동에 대하여 강권과 형벌로 엄단한다는 위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신체제 아래서 긴급조치를 온몸으로 헤쳐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 귀결이 어떠할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작년에도 개헌서명운동을 결단하고 솔선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 민주화를 외치다가 투옥된 수천 명의 정치범이 갇혀 있는 감옥은 이미 우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로 감옥이 터져 나갈 때 민주주의는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4. 불의한 권력에 대한 협력과 동조는 범죄행위입니다.
민주주의는 거창한 결단이나 각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 하나하나가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며, 그런 민주주의만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현 정권이 영구집권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이상 국민 각자는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존엄성, 그리고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위하여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주어진 몫을 다 해야 합니다.
1946년 12월 11일 유엔총회에서 확인된 ‘뉴렌베르그 제 원칙’은 명령을 지상의 규율로 하는 군사행동에서조차 “정부 또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선택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명시하여 부당한 지시에의 협력과 동조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 정권의 민중 탄압과 인권 유린, 그리고 생존권 박탈행위에 참여, 동조하는 행위는 설사 살아남기 위하여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인간으로서 뿐 아니라 역사의 이름으로 심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불의한 명령이나 지시에는 협력과 동조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내 자식 앞에서 과연 나는 떳떳할 수 있는가를 항상 물어가면서 자신을 가다듬는 삶을 살 것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군인과 경찰, 공무원, 그리고 우리 사회의 중간집단에서 일하는 모든 형제들도 나는 그때 양심을 지켰으며,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5.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투신해야 합니다.
이른바 제5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현 정권이 출범한 이래, 획일의 강요와 정보 조작에 의해 우리 사회 각 분야의 모든 기능과 역할은 파탄 나고 말았습니다.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오, 힘만 있을 뿐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김수환 추기경, 1987년 부활 메시지 중에서). 이제 우리의 현실은 더 이상 물러나거나 나빠질 수 없을 만큼의 한계에 다다라 있습니다. 한 시대의 불행한 종말이 예감되는 오늘, 우리는 폐허에서 새로이 정치공동체와 사회 건설을 할 마음가짐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활력과 자치, 부문과 개인, 기능과 역할을 본 모습대로 회복해 내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응어리진 민중의 욕구와 한을 평화적이고도 점진적인 방법으로 분출, 수렴하는 새 사회의 창조와 건설에 투신해야 합니다.
6. 모든 민주 세력은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민주운동 역량 내부의 조직화와 상호신뢰가 지금처럼 절실한 적이 없었습니다. 군부독재의 승계와 그 영구화가 극복되어져야 할 당면과제라면, 모든 세력은 그 역량을 여기에 귀일, 집중시켜야 할 것입니다. 용공조작 모략과 그 탄압에 명분과 빌미를 주는 관념적 논쟁을 지양하고, 우리의 투쟁목표와 방법과 노선을 하나로 정비·강화하며, 민주·민중운동 역량의 연대를 확대해야 합니다. 동시에 갖은 방해와 탄압 속에 창당되는 신당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 속에 구태의연한 모습을 벗어나, 민의를 존중하는 참다운 국민정당으로 발전해 나갈 것을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이 땅의 정의로운 사람들이 모두 하나로 뭉쳐 불의한 세력이 개인으로서건 집단으로서건 도저히 이 사회 속에 서 있을 수 없을 때, 이 땅에도 독재와 억압 그 자체가 소멸되리라고 믿습니다.
7. 우리의 힘으로 민주화, 자유, 인권을 이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참다운 민주화는 결코 현 정권의 기만적인 선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독재자들이 이른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편하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쇠사슬 자체가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화와 인간의 존엄은 국민적 화해와 합의로 창조되어 보장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아닐 때 우리는 우리 민주 역량의 힘으로 쟁취하는 민주화와 자유와 인권이어야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독재권력에 의해 배급받는 민주화와 자유와 인권은 속임수이며 그 자체로서 민주시민에 대한 모욕입니다.
8. 가난한 사람들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88올림픽이 민주화된 조국에서 민족의 화해와 단결 위에 이루어지는 축제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88올림픽뿐만 아니라 그 어떤 명목의 상황 아래서도 인간의 존엄, 이 민족의 존엄과 인간다운 삶이 더 존중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하게 살 권리와 삶의 터전이 강제로 빼앗기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통이요, 분노입니다. 이른바 제5공화국의 전시효과와 업적 자랑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뿌리 뽑히고 쫓겨나야 된다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보이지 않아야 하고 마침내 이 세상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정치권력의 논리와 성격을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선에 반(反)하고 공권력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함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랑이 충만한 사회를 위하여는 노동자, 농어민, 도시빈민에 대한 정책이 재검토, 새출발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9. 우리는 외세의 힘을 빌어 이 땅의 민주화를 이룰 만큼 비굴하지 않습니다.
민주화와 사회정의의 실현, 그리하여 인간화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래된 꿈이었습니다. 반외세 자주와 반독재 민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이며,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이 구현하고 관철해야 될 가장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우리는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를 논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은 단 한 번도 한국민에게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잘못을 사죄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자국의 국익을 위하여 독재정권을 지원함으로써 이 땅의 민주화를 희생시켰을 따름입니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보호무역 장벽과 끊임없이 강요되는 수입개방 압력 또한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미국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의 하나입니다. 그런 미국이 한국의 민주화를 촉구한다는 명분 하에 ‘타협’과 ‘합의’를 요구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힘을 빌어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미국에게 구걸할 만큼 비굴하지 않습니다. 또한 김대중(토마스) 형제를 불법연금한 후 한국 국민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일개 미국 국회의원의 출입은 허용하는 당국의 해괴한 자세를 지켜보면서, 말로는 사대주의 배척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압력에 순응만하는 현 정권의 무기력함을 지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핵전쟁은 민족의 이름으로 막아져야 되며 핵병기는 철거되어야 합니다. 민족적 권익과 관련된 문제,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관한 문제, 한반도의 평화와 외세 개입 문제에 있어서는 오직 민중만이 그 최종적인 결정권자라는 사실이 내외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부심과 믿음으로 민족·민중운동이 전개되고, 그를 통해 민중이 마침내 나라의 주인이 되고 주권자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10.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는 민족적 비극인 광주사태의 진원지, 광주에서 광주대교구 소속 동료 사제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지난 4월 21일부터 시작한 무기한 단식기도를 지지합니다.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①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 유신 이래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 회복을 위해 ② 양심수 및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과 민주 인사들의 복권을 위해 ③ 옭아맨 사람이 푼다는 말과 같이 명목상의 언론기본법의 개정이나 지방자치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참정권 보장과 언론자유를 위해 ④ 집권 시와 집권 이래 자행된 모든 죄과를 속죄할 수 있는 현 집권 세력의 명예로운 퇴진을 위해”라는 기도 지향을 내걸고 ‘대통령 중심 직선제 개헌’을 위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의 고통에 찬 결단을 바로 우리들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며, “주여! 이 나라, 이 백성을 군사독재와 그 억압에서 해방하소서”란 이 분들의 기도를 바로 우리들의 기도로 함께 하는 바입니다.
“사회 안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구체화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인권과 화해 11항, 교황 바오로 6세 메시지, 1974. 10. 23) 이러한 인간의 권리를 공권력이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침범하는 경우에는 그것은 자기 책임을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치는 법적 효력조차 없는 것임이 명백합니다.(지상의 평화 42, 참조) 우리는 개헌논의의 자유와 민주제 개헌주장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민주국민의 기본권리임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민주제 개헌의 의도적인 거부와 봉쇄라는 역사적 퇴영과 그것이 결과할 정치적 억압과 보복의 악순환, 그리고 마침내는 한 정치권력의 파탄과 나라의 불행을 가져올 것임을 내다보면서, 아울러 이럴 수는 없다는 우리의 윤리적 판단과 결의를 밝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로 세상을 비추고, 모든 사람들을 정의에 기초한 일치와 화해에로 이끌며, 성실한 대화를 용이하게 하고 촉진하는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 교회의 사명을 다하여, 마음에서 우러나는 민주화와 민주제 개헌에로의 조속한 회귀를 모든 당사자들에게 거듭 호소하고 기도하는 바입니다.
1987. 4. 23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민주개헌 범국민서명운동 제안
광주에서 시작된 단식기도는 전국의 양심을 깨우고 저항의 불길을 지피며 이후 한 달여 간 이어졌다. 서울대교구 신부 62명은 5월 3일 단식기도를 마치면서 “범국민 직선제 민주개헌 서명운동을 제창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신부들은 성명서에서 “이제 서울대교구 단식 사제들의 ‘호헌철폐와 민주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는 내일로써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 뽑게 되는 그날까지 지칠 줄 모르는 복음적 열정을 가지고 기도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이 기도와 다짐의 연장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수호할 소명을 부여받은 우리 전국사제단은 화해의 새 사회를 소망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오늘 이 시간을 기하여 전국적인 ‘범국민 직선제 민주개헌 서명운동’을 다시금 제창”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5월 4일 전국사제단은 미사를 마친 후, 서울교구 단식 사제들이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민주개헌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에 1차 서명한 사제 571명의 명단을 공개하였다.
서울교구 신부들의 단식기도는 마무리되었지만, 천주교의 저항은 식을 줄 모르고 이어졌다. 5월 4일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 학생 400여 명이 단식기도를 시작하였고, 부산교구 사제단이 “동료 사제들의 단식기도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후 교구 산하 62개 성당 신자들이 단식기도에 동참하면서 각 성당에서 철야기도에 돌입하였다. 보수적 성향으로 사회 참여를 꺼려오던 대구대교구 신부들도 5월 4일 <민족 구원의 교회이기를 간구하는 단식기도를 드리며>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며 동참했다. 대전, 수원, 청주, 원주, 제주 교구까지 단식기도는 전국을 강타했다. 프란치스꼬회 수도자들도 단식기도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민주화는 우리의 십자가”
5월 4일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서울교구정의평화위원회가 공동으로 윤공희 대주교의 집전 하에 명동성당에서 정의평화 미사를 올렸다. 이날 미사에서 정의평화위원회 윤공희 대주교는 <민주화는 우리의 십자가요 구원이다>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민주화가 시대의 구원이자 개헌 투쟁이 종교적 사명이라는 선언은 한국 천주교회의 민주화운동에서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선언이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온갖 허위와 거짓을 거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탄의 유혹인 권력, 명예, 독점독식의 유혹을 단연코 뿌리치게 하는 은총의 힘을 주십니다. 그 힘은 오로지 단식과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추종의 자세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앙인이 지닌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대적 사명을 깨닫고 법조인들이, 교수들이, 문인들이 진실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습니다. 진실의 목소리는 곧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아무런 원칙도 명분도 없이 호헌과 개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방황하는 현 정권의 모순과 비리에 찬 처사는 우리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치 권력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공동선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되는 것이므로 그 권력의 운용과 목표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에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적 정부 이양이란 현 정권이 주장하는 바대로 단순히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정부 이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민 다수의 의사가 굴절 없이 반영되는 민주적 과정을 통하여 국민적 지지와 축복 속에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주정부가 탄생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 정권은 평화적 정부 이양과 올림픽 대사가 마무리되고 나면 ‘개헌 노력’이 재개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가도 ‘반성 없는 합의’와 일종의 간선체제인 내각제 고수가 다시 개헌의 전제가 될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 집권 여당이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 호헌은 계속될 것이며,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은 유신 전제시대의 되풀이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명백히 알려져 있는 대로 현 집권 세력은 군부에 기반을 둔 세력이므로 한국의 민주화는 군인이 정치군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본연의 고유한 임무에로 돌아감으로써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국민의 힘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외세의 힘을 빌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제들이 단식으로 몸이 지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정치운동이 아닙니다. 인권 회복과 민주주의만이 곧 복음화에 합치되는 것이고, 복음 정신이 없이는 우리의 삶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희생하며 죽고 부활함으로써 동포 형제들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의 민주화는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십자가이며 또한 구원입니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