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은 사회교리를 ‘세상과 나누는 대화의 언어’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화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죠. 완벽한 세상은 종말에야 오겠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임무를 저희에게 있다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그러나 우리 없이 세상을 완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계승하는 공동협력자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 교회는 정치가 제일 큰 몫을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의 임무가 바른 질서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른 질서는 교육정책, 문화정책 등 정책으로 나타납니다. 공동체의 선익을 위한 정책들이 지향하는 바는 공동선입니다. 인간의 존엄함과 사회의 공동선, 더 나가서 자연까지 포함하는 올바른 정책을 펼 수 있는 힘은 올바른 정치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이죠. 적어도 사회교리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봉건적 의식이 남아 있는 한국사회
유럽에서는 긴 역사적 과정에서 프랑스대혁명 등 여러 과정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이 성장해 왔고, 이러한 경험 속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도 나온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최근에 와서야 이런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대한제국이었다가 일제강점기를 겪고, 해방 이후에도 한국전쟁, 산업화와 독재를 경험하고,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야 겨우 사실상의 민주주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가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민의식을 고양시키고, 시민 참여의 기회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봉건정부와 식민지와 독재를 겼었기 때문에 전근대적인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기고, 행정은 행정관료들에게 맡기고, 시민들은 일상의 돌아가서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이처럼 신분제처럼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집단이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를 우리는 ‘중세’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회에서 모든 결정은 ‘귀한 족속’들이 맡고, 평민이나 천민들은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습니다. 이 습관이 남아서 아직도 시민들이 정치에는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당원도 별로 없고, 있더라도 선거 때만 당원 했다가 말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겨버리는 거죠. 기업인이 경제 주체라 생각하고, 노동자들은 일자리 주면 고맙고, 일자리 없으면 구걸하고, 그것도 안 되면 그냥 체념하는 데 익숙합니다. 최근에 녹색당처럼 자신들의 정책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여기에 공감하고 실제로 움직여 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보니 운신이 폭이 아주 좁아요.
교회의 정교분리론 넘어서야 한다
일제는 식민지 시절에 문화동화정책을 통해 조선인들을 이등시민으로 편입시켜, 황국신민으로 육성하는 교육을 시켰죠. 유신독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했어요. 저희 부모님도 왜 저를 낳았는지 모르셨는데, 학교에 들어가니 제가 민족증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알려 주더군요. 그래서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했고요. 고등학교 가서는 총검술을 배웠고, 대학 가서는 교련시간이 있었는데, 말이 교련이지 ‘군사훈련’을 받은 거죠.
교육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거죠. 그런데 그만큼 무서운 게 종교입니다. 목숨 내걸고 믿잖아요. 일제강점기에 천주교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등에 참여했는데, 그 대신 일제가 포교의 자유라는 당근을 줘서 당시 종교세력들이 크게 확장된 적이 있어요. 그때 위력을 발휘한 게 ‘정교분리론’입니다. 종교는 정치문제에 관여하지 말고 고유한 목적에 맞게 포교만 하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일제에 협력하는 것은 ‘정치참여’라 부르지 않는 겁니다. 결국 정교분리가 지배권력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으로만 해석된 거지요.
이런 상황에서 중일전쟁이 터지자 그 출정식을 할 때 명동성당에서 강복미사를 했어요. 파병되는 황군들이 칼을 차고 성당 앞머리에 앉고, 서울 시내의 다섯 개 성당에서 온 신부들이 모여서 황군을 축복한 거죠. 그 대신에 행정적으로 성당 지을 땅도 받아내고, 성당 지을 때 지원도 받게 됩니다. 일제 열성적으로 협력했던 평신도들이 해방 이후에도 평신도 지도자로 행세한 걸 생각하면 답답한 노릇이지요.
그런 분위기가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이어져 오는데, 교회에서 정치이야기를 하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어렵죠. 성당에서 사회교리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망설이게 되는 게 교회의 현실입니다. 지난 100년 가까이 정교분리에 익숙했던 분들이 갑자기 변하기는 어렵잖아요. 세상과 교회를 확실히 분리해 두는 데 익숙한 교회를 두고 요한 23세 교종께서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는 ‘요새’라고 불렀죠. 그래서 교종께서 곰팡내 나는 교회의 창문을 열자고 제안했던 겁니다.
교회는 당파적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일부 언론에서 시민들이 생업에 충실하지 않고 희안한 짓거리를 한다고, 심지어 데모꾼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교우들은 세상의 이런 저런 문제들을 교회로 가져와서 깊이 토론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도록 진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교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모든 정책들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판단할 때 늘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정책이라도 이해관계의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이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없으니까요. 이럴 때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먼저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물론 다른 쪽의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신학생 때 많은 들은 이야기 중에 ‘옴니버스 옴니아’(OMNIBUS OMN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초능력자가 되겠다는 것인데,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문맥을 따져보면,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나는 단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나의 모든 걸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먹는 순간에 나는 어떤 입장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갑돌이 편을 들자니 갑순이가 울고, 갑순이 편을 들자니 갑돌이가 눈에 밟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선택한 게 ‘너의 사정이 딱하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지요. 결국 아무에게도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것이죠. 모든 것에서 멀찌감치 서 있는 거죠. 그리고 안타깝다며 울어주기만 하는 거죠.
이걸 보면 야고보 사도 말씀을 떠올릴 수밖에 없어요. 배고파 죽겠다는데, 집에 가서 맛있는 것 차려서 드세요, 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갑돌이는 이렇게 말하겠죠 “누가 몰라 그거, 집에 먹을 거 없다니까.” 그런 거죠.
정권이나 이데올로기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약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사랑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모범적 전통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이 사실 하찮은 민족이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선택하셨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주로 만난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떼 같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회적 낙오자들이었어요. 이른바 요즘 말로 ‘루저’들이죠. 그러니 교회가 그런 사회적 약자들을 선택하는 당파성은 당연한 겁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누룩
하느님의 시선은 항상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4년 방한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과 장차관들이 잔뜩 모여앉은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실 일은 사회적 약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라고 했어요. 구약에 예언자들은 보통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라고 합니다. 정치나 종교나 약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국가와 종교는 서로 구분되지만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 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3항)
교회는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하며, 신자들이 이런 의식으로 자기 현장에서 살아갈 때 이루지는 것이 ‘복음화’입니다. 복음화는 참된 인간화, 참된 사회화라고도 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것이죠. 교회에서 하느님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교회는 하느님 이야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비참한 사람들로 넘쳐나게 됩니다.
19-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는데, 아마도 그들이 교회를 버렸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개혁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로 돌아가자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이 새삼 귀한 시절입니다.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이문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