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철 칼럼]
아버지의 피난처는 ‘성당 담벼락’이었다
예수와의 만남은 신학적 각성이나 어떤 체험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척점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른바 은행알 추첨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배정된 세대였다. 입시지옥을 거친 학부모와 선배들은 우리를 ‘신의 축복’을 받은 녀석들이라고 부러워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이 무엇인지는 전혀 몰랐다. 물론 알 필요도 없었고.
아마도 사돈의 팔촌까지 그리스도교 신자가 전혀 없었던 집안 분위기 탓에 그 나이가 되도록 내가 아는 예수에 대한 생각은, 이것마저도 신빙성 없는 기억이지만, 우리 동네 제법 잘사는 집에서 크리스마스 전후하여 켜놓은 빤짝거리는 전등이 전부일 것이다. 어머니를 통해 들은 바로는 그것이 그들의 신의 생일과 관계있다는 설명과 함께.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지만, 우리 집이 무슨 산골에 있다거나 부모님이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1929년생으로 23세까지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서 살았고, 아버지는 1923년생으로 21세까지 평양시내에서 살았다. 나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6살 이후로 부산시 중구 대창동에서 산만큼 문명의 혜택(?)을 받을 만큼 받은 환경이라는 점을 감안하자면 지독히도 예수와의 인연이 먼 집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있기는 있었다. 육이오 한국전쟁 당시 부모님이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 내려와 임시로 살림터를 마련한 곳이 대구 계산동 성당 담벼락 옆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우리 집안으로서는 가장 가깝게 예수에게 다가간 때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수도원에서 전혀 다른 삶을 열어가던 시절 아버지는 그 때의 인연을 아주 소중한 예수와의 인연인 양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피난처’였던 성당 담벼락에서 예수를 처음 만났다고.
나의 피난처는 ‘부처 담벼락’이었다
그런데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고입 연합고사를 통해서 배정된 학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불교계 고등학교였다. 이른바 미션 스쿨은 여러모로 표시가 났지만 불교계 학교는 그런 표시가 잘 안 났을 뿐이다. 학교 안에 법당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 시간씩(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불교 과목이 들어있었고 ‘법사님’이 들어왔다. 그 분은 수업시간을 열면서 늘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 하고 화두를 던졌다.
“너는 오늘 가방을 매고 왜 학교에 들어왔는고?”
“이 공부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고?”
학생들은 간화선이나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지만 1학년 겨울이 가기 전 그 웃음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각자의 삶이 주는 무게가 들어왔다. 후일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섰을 때 나는 돈보스코 교육에 앞서서 학창시절 만난 법사님의 화두와 모습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만큼 나에게 숨어있던 종교심을 열어준 그 분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나는 산파”라고 했던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은 상대방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 즉 큰 덕을 틔워주는 것이다. 후일 알게 된 예수도 사람들에게 간절히 말한 다음 끝에 가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마감했던 것처럼 자신의 말을 상대방에게 억지로 넣어주려는 태도가 없었다. 그런 법사님 탓이었을까? 학창시절 한 때 유행했던 ‘가출’로 내가 찾아간 곳은 경북 영주의 한 암자였다. 가출을 요란 찬란한 곳으로 안 가고 절간으로 가다니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출가가 아니라 무작정 가출을. 지금은 그것도 인연이려니 생각한다.
고등학생 2학년 때 한 친구가 “여학생 많은 성당이 있다!”란 탁월한(!) 전교방법에 넘어가 처음 들어가 본 천주교회에서 예수와 낯선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난 불교계 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의 안방으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아무튼 아버지의 피난처는 성당 담벼락이었지만 나의 피난처는 부처의 담벼락에서 시작했다.
격류 속에서 만나는 예수
개인의 역사로 말하자면, 십대까지는 잔잔히 흐르는 물이었지만 이십대부터는 격류로 다가왔다. 박정희 말기와 전두환 초기가 겹쳐진 시기에 시작한 나의 이십대는 청년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어느덧 수도자를 청하면서 예수 안으로 나를 데려갔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 형님으로서 다가와 벗으로서, 동지로서 삶의 대목마다 일상 속에서 툭툭 나를 건드렸다.
내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은 ‘복음’에서 시작해 ‘복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당연히 앞의 복음은 ‘글로 된 성경의 복음’이고, 뒤의 복음은 그 복음으로 인한 ‘실천’의 의미였다. “여학생이 많은 성당”에서 처음 간 나에게 선물로서 주어진 책은 박도식신부가 저술한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란 책이었다. 후일 교회사를 배우면서 알게 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나 정약종의 <주교요지> 역시 모두 문답식 대화체 교리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게 처음 주어진 교리서는 아주 적절한 책이었다. 그러나 그 책이 지나치게 호교론적이어서 문제적(!) 인물 ‘예수’가 누구인지 만나기에는 부족했고 갈증은 해소 되지 않았다.
지금은 성경이 있는 숙박업소가 거의 없지만 청년시절 들어가는 여관에는 거의 빠짐없이 성경이 놓여있었다. 엄격한 도서검열을 하는 교도소도 성경만큼은 예외 취급을 받았다. 여관이든 교도소든 보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무거운 짐 진 자를 늘 기다리는 예수의 모습처럼 성경은 그렇게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의 말씀, 그의 혁명
나는 특별히 예수의 말에 주목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복음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현대의 매스미디어는 아니라 해도 거기에 기록된 예수의 일거수일투족과 함께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분을 만나는 일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지금도 여기고 있다.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에 담겨진 예수의 첫 음성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이다.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예수의 세례, 광야에서의 유혹 그 다음에 나오는 장면이 갈릴래아 전도인데 그 때까지 아껴둔(!) 어쩌면 감추어둔, 모든 군더더기를 넘어선 예수의 첫 음성을 이렇게 기록한 마르코의 생각이 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듣는 예수의 첫 음성은 직접적이었고, 단도직입적인 화두였고, 떨리는 감동이었다.
‘Who is Jesus?’로 물어보았고, ‘What is Jesus?’로도 물어보았다. 수많은 책속에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한 여러 모습의 예수를 만났지만 어느 것도 성경 본문 속에 나오는 예수의 음성을 넘어가지는 못했다. 결국 복음서에 나오는 이른바 큰 따옴표(“ ”)속의 예수의 말씀만을 모았다. 어떤 상황, 어떤 사람, 어떤 주제로 말하는 바에 따라 예수의 말씀이 주는 울림의 크기는 모두 달랐고 동시에 같았다. 예수는 끝내 그의 첫 음성이었던 ‘하느님 나라’를 지금여기에 이루려고 했던 젊은 혁명가였다.
예수의 당부, 그 간곡한 요청
정양모 신부가 성공회대학교에서 은퇴할 때 후학들이 마련한 기념논총이 <믿고 알고 알고 믿고>(2001. 분도출판사)였다.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간 대화·소통을 일관되게 강조해온 성서신학자의 은퇴 기념논총이 신학적 제목이 아니라 너무나 일상적인 언어, 당연하고 기본적인 의미로서 당신의 신학을 정리하는 걸 보고 무릎을 쳤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는 ‘믿는 다’는 것과 ‘안다’는 것을 예수의 언행으로 보아왔다. 그것만으로 나는 지금도 예수의 사람임을 고백하고 증명한다.
성경 속에서는 먼저 주님을 찾는 나는 누구인가? 주님을 만났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왜 알아듣지 못하는가? 어디서 깨달을 것인가? 거듭해서 스스로 묻게 하고 예수가 답 해줌을 듣는다. 자문(自問)하게 하는 힘이 복음에 있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부르며 그 하느님을 대자대비하고 완전하다고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런 하느님을 믿기만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자비와 완전함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마태5.18: 루카6.36)라고 말한다. 그것은 당부이고 간곡한 요청이다.
그의 혁명은 삶의 길목 곳곳에 있었다
예수가 그의 삶속에서 당면한 관심사들에 대하여 말하는 대목들은 눈물겹다. 사람들에게 갇힌 우물에서 나와서 넓은 세상으로 가라고 요청하며 예수는 제자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성전을 정화했다. 복음에서 만나는 예수는 땅이었고 물이었으며 교사였고 예언자였다. 해방자이며 걸림이 없는 무애인無碍人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람의 아들이었고 혁명가였다.
<천개의 바람>이라는 졸시에서 나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 바람 마다 춤이 있기를
그 바람마다 소리가 있기를
그 바람마다 진정 바람이 있기를
천개의 바람마다
각자가 수많은 바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살아내는’ 일이다.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수를 삶의 어느 길목에서 우연히 만났다. 불가의 열반경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연을 ‘맹구우목(盲龜遇木)’이하 했다. 눈먼 거북이가 천년에 한 번 물 밖으로 숨 쉬러 나오다 목구멍만한 구멍이 있는 나무에 목이 끼이는 희한한 우연만큼 귀하다는 뜻이다. 생애에 단 한 번의 만남, 그 예수를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첫 음성을 되새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