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공부, 행동은 보통 단어들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로 세상과 교회를 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이미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00년대에 의인 시메온이라 불리는 랍비가 한분이 계셨답니다. 그분은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이 세 개가 있다고 했지요. 성경공부와 기도 또는 예배, 그 다음이 형제애 또는 나눔의 실천입니다.
기원 후 70년에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서, 유대인들은 다시한번 하느님께로 돌아가 자기네들의 전통을 재확인하는 종교회의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랍비 아키바와 랍비 트라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저 세 개의 기둥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겁니다.
랍비 아키바는 성경 연구 즉, 토라 연구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고, 랍비 트라폰은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겁니다. 결국 두 사람을 빼고 다른 랍비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내린 결론은 토라 연구, 곧 공부가 먼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건 기도인데, 기도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바로 공부라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세 가지 원리
성경에서도 이 세 가지 기둥(원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탈출기에 등장하는 미리암은 현자를, 아론은 사제를, 모세는 예언자를 상징합니다. 첫 번째 기둥은 토라 연구이며, 지혜라는 기둥입니다. 두 번째 기둥은 경신례 등 기도라는 기둥이고요, 세 번째 기둥은 형제애 등 행동입니다. 전통적으로 토라 연구를 주로 해왔던 집단은 바리사이 집단이고, 예배와 제사를 주로 관장했던 집단은 사두가이입니다. 그리고 형제애를 유달리 강조한 예수님 시대의 집단은 공동체로 살았던 에세느입니다. 이것은 각각 지혜문학과 모세오경, 예언서에 대응합니다.
지혜문학에서는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것 안에 담겨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우주와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모세오경에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하느님이 세상 모든 것 넘어 계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고 우리 머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라는 것이지요. 예언서에서는 형제애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서는 흔히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여기서 기도와 일을 연결시켜주는 또 하나의 기둥이 공부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은 두 가지를 따로따로 잘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은 기도와 일이 얼마나 서로 통합되어 있어야 하는지 알아들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알려주는 것이 ‘읽는 것’ 곧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입니다. 수도승 전통에 따르면, 성경을 읽는 것은 기도이기도 하고 수행 실천이기도 합니다. 물론 머리를 써서 하느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렉시오 디비나에서 아주 중요한 실천중 하나가 ‘되새김’입니다. 라틴말로 루미나시오( Ruminatio)라고 해요. 소나 염소나 이런 짐승들은 항상 뭘 씹고 있죠. 일단 먹이를 입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끄집어내서 다시 씹죠. 다시 씹는 이 과정을 되새김이라 부르는 거죠. 그러니까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한 수행중 하나가 하느님 말씀을 귀에 들리는 대로 마음속에 암기를 통해 저장해 놓았다가 하루 종일 틈만 나면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입안에서 굴린다는 말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수도자로 양성을 받고 처음으로 수도원에 갔을 때 이상하게 보이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 할아버지 수사님들이 그냥 복도를 다니시면서 입속에서 중얼중얼 거리는데, 참 이상하더라고요. 틈만 나면 그날의 성경구절도 좋고 단어도 좋고 입속에서 굴리면서 다니는 거예요. 화살기도와 비슷한 거 같아요. 수도자들은 단순노동을 많이 하니까 일하면서 계속 중얼거리는 거죠. 중얼거리는 이 작업을 통해서 자기가 그 받았던 하느님의 말씀을 일하는 일상의 순간들에 적용하게 되죠. 이 되새김을 통해서 기도와 이 행동이 연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의 모토를 제대로 이야기 하라면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라’는 거지요.
사도행전 2장 42절에는 초기교회 신자들의 생활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하죠.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여기서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는 ‘지혜’에 해당하는 것이고, 빵을 나누어 먹는 형제애적 친교(코이노니아, Koinonia), 그리고 마지막에 기도가 나와요.
더 실감이 나는 대목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계명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죠. 여기서 첫째 계명이 제일 중요하다고 해놓고,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첫째계명과 둘째 계명 사이에 순위를 매기기 곤란하다는 뜻이죠. 첫째 계명이 ‘기도’라면 둘째 계명은 ‘형제애’겠죠. 그리고 나중 계명이 첫째 계명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게 ‘지혜’입니다.
기도와 행동은 공부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루가복음 10장과 11장에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 세 개가 연이어 나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형제애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기도가 잇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랍비 아키바처럼 지혜와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중요성의 순서이지 시간적인 순서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공부란 내가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지,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판단할 근거를 갖는 것이어서 중요합니다.
제가 볼 때 당장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 곧 공부라고 봐요. 지금은 수도자들도 그렇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활동가들도 일종의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수도자들에게는 기도만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튼튼하고 건강하게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활동가들 역시 행동만으로 뭐가 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전부 난리예요. ‘활동가들을 위한 활동가’가 필요한 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 이들을 영성적으로 심화시켜주는 작업이 필요한 거죠. 영성과 사회적 관심이나 실천이 따로 노는 게 문제입니다.
기도에 관하여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전례동작 가운데 ‘스타시오stacio’라는 게 있어요.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때에 행렬을 지어 성당에 들어가는데, 그전에 수도자들이 복도에서 양쪽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순간이 있어요. 그것을 라틴말로 ‘스타’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서있다”는 말이죠. 영어의 ‘stand’라는 말도 되고, ‘be to be’라는 뜻도 되죠. 그 순간에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고 와있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단순히 “내가 기도하러 간다.”는 뜻이 아니고요.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성무일도를 ‘오푸스 데이Opus Dei’ 곧 ‘하느님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통상 이걸 “내가 하느님을 위해서 바쳐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들)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28-29)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에는 구분이 없지만, 사람들은 복수로 “하느님의 일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예수님 대답은 단수로 나와요. 하느님의 일이란 “하느님이 너희를 통해서 하시는 일”인 것이지요.
기도고 뭐고 ‘내가 한다’는 관점을 버리고 ‘그분이 하신다’고 생각하는데서 참된 기도가 시작됩니다. 마치 수영을 잘 하는 사람들이 물에 부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과 같아요. 자기가 몸부림쳐서 떠야 한다고 용을 쓰면 더 가라앉아요. 사실 물의 부력을 알고 나면 물에서는 뜨는 것보다 가라앉는 게 더 어려운 법이죠. 기도하는 일도 그런 일 같아요.
이걸 내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끝이 없지요. 기도의 결과는 마침내 ‘에고’가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머무르는 것입니다. 사실 말도 필요 없어요. 시편 139편을 보세요. 그분이 이미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
뒤에서도 앞에서도 저를 에워싸시고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으십니다.”(시편 139,1-5)
신학생 때에 어느 수녀님이 “기도는 일광욕과 같다.”고 하셨어요. 햇볕아래에 그대로 누워만 있으면 선탠이 되잖아요. 기도도 그렇다는 거죠. 첫 번째 필요한 것은 쉬고 머무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옷을 벗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기도는 저절로 이뤄지죠. 하느님 현존 앞에서, 그분의 자비 안에서 머무는 것이 기도입니다.
행동에 관하여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점점 더 하느님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그래서 나 자신을 점점 더 알아 갈수록, 그렇게 우리가 ‘진정성’의 자리에 이른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기도 때에 우리가 느꼈던 그 하느님의 기운이 사람들에게 건너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누가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보수 쪽에 있는 사람들은 나쁜 놈들은 전부 진보 쪽에 있는 줄 알아요. 자기가 진보 쪽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나쁜 놈들은 다 보수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나쁜 놈은 어디에나 있어요.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기도의 자리에서 자기 진정성을 얻어 나가고 있느냐는 거죠. 저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도 너무 남들한테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고 하고, 우리가 참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을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돌아보면, 제 인생에 도움이 된 분들의 공통점은 내 앞에서 ‘자기의 쓸모를 주장하지 않았던 분’이셨어요. 없어져야 될 때 사라질 줄 아는 분이였어요. 어떤 분들은 자기 쓸모를 저에게 주장하면서 저를 자기 곁에 묶어놓으려고 했어요. 그런 분들은 도움이 안 되더군요. 주변에서 쓸모 있는 수도자, 쓸모 있는 사제가 되려고 용을 쓰는 분들을 많이 보았어요. 애써 자신의 쓸모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지는 법입니다. 이럴 때마다 “나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해요.
예수님도 “너희는 단지 쓸모없는 종이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고만 하라”는 말을 합니다. 내가 맡고 있는 역할과 공헌과 업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부터 공부하면서 지혜롭게 살아야 해요. 아니면, 나이 들어서 계속 자기 옛날이야기를 자랑삼아 고장난 레코드 판처럼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수도자, 사제들 가운데도 평소 존경받던 분들이 나이 들고 제 역할이 없어지면 뒷방 영감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지곤 하죠. 그런 선배들의 모습을 볼 때 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공부에 관하여
공부란 단순한 ‘학습’과 달라요. 공부란 라틴말로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하는데, 애쓰는 마음, 노고, 열정적이지만 특별히 격렬하지는 않은 일반적인 정신 집중 등을 뜻합니다. 스님들도 참선한다, 수행한다는 말 대신에 ‘공부한다’는 말을 곧잘 쓰죠. 동서양이나 그리스도교에서도 ‘공부’라는 말은 머리만 쓰는 것이 아니고 온 몸을 쓰는 것입니다. 지성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일종의 수행이지요. 그리스 철학자들이 전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중세의 큰 스승이었던 생 빅토르의 후고(Hugo von St. Viktor, 1096-1141)는 수행과 공부의 단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 단계가 ‘겸손’입니다. 어떤 지식이나 말도 경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한테든 배우며, 또한 배움을 얻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을 깔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고요함’입니다. 내 안에 고요함, 침묵이 있어야 다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단계는 모든 세계가 그 사람에게는 낯선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반 일리치는 “공부하는 사람은 온갖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이며, 그래서 지혜만이 교향 된 사람이다.”라고 토를 달았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비슷한 말을 하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제일 먼저 알아 듣는다는 거죠. 이분들은 우리가 자꾸 변방으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변방으로 가서 자선을 베풀라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사실 변두리로 가서 ‘경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중심이나 주인이나 정착민이 아니라,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영적인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초기교회 신자들처럼 말이죠. 우리는 마지막까지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들었을 때에야 하느님의 지혜에 정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실 너무 삶이 편안하고 안정되면 기도도 잘 안 됩니다. 고통스러울 때만 기도만 기도해요.
결국 ‘디아스포라의 자리’에 늘 들어가야 공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계인들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회색분자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어요. 그렇지만 어디에도 자기 집을 두지 않는 그런 자세에서만 지혜가 시작됩니다. 한군데를 완전히 자기 집으로 삼아 버리면서 하는 공부는 저질이고, 결국 이데올로기만 낳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놀라게 하실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매사에 조금도 흔들림 없고, 하늘 보고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형사고를 칠 사람들이지요. 신영복 선생님의 자문처럼 차라리 조금 조금씩 흔들릴 줄 아는 얼굴들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나침반의 바늘 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북쪽이지만, 그 바늘이 미동도 하지 않고 한 끝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건 고장 난 나침반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정상적인 나침반 끝은 북쪽 언저리에서 조금씩 흔들립니다.
너무 많이 흔들려도 곤란하겠지만 조금도 안 흔들리는 사람들은 환자들입니다. 어느 집단과 자신을 동일화 시켜 버리면, 그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흔들림 없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삼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들림 없는 원리주의자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흔들리는 진폭 만큼 참된 지혜와도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하게 됩니다.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은 흔들리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요. 그게 늘 놀랄 준비를 하고 있는 자세와 같은 거겠죠.
[출처] 제1회 가톨릭일꾼세미나 강의 녹취록(2017년 7월 23일)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