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영성의 원천은 무엇보다 “그리스도 중심주의”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전달하신 메시지가 아닌 다른 덧붙여진 것들은 일정하게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를테면, 신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교리’이고 가장 남감한 것도 ‘교리’입니다. 이를테면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이나 잉태하는 순간이나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동정’이셨다는 ‘교리’ 같은 경우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롭게
“과연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하지 않고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일까?”, “그게 정말 가능해?”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고대인들의 수사법입니다. 일종의 언어방식인 겁니다. “성모님께서 평생 동정이셨다.”는 말을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하죠. 성모님은 늘 자신을 비우시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차지하시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내가 ‘동정’이 아니라면, 예수님까지 내 안에 비집고 들어오기가 너무 힘들다는 거지요. 그러나 마치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비우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신 것처럼, 마리아 역시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이 마리아의 자궁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강생사건은 마리아의 ‘동정성’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나를 얼마만큼 비우느냐’는 동정성이 그리스도인됨의 척도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신 그 분이 사는 것”이라고 말했죠. 바오로 사도는 자기결정권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두었다는 점에서 ‘동정성’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거룩한 어머니’가 되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델이 되는 이유는, 그분이 단순히 하느님께 당신의 ‘자궁’을 빌려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혈육’적인 관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인가”라고 묻고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가슴에 잘 새겨듣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인 까닭이 그렇습니다. 결국 ‘그리스도 중심주의’란 그리스도가 나를 온통 차지한 것처럼 사는 것이죠.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복음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교우’를 넘어서 ‘동지’로
그렇다면 도로시 데이는 어땠을까요? 복음서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도로시 데이가 결정적으로 매력을 느낀 것은 마태오복음서 25장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35-36.40)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주인으로, 메시아로 여기며 그들과 동행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얻어 누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뜻이겠지요.
도로시데이는 본래 아나키스트였죠. 최근에 개봉한 ‘박열’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에서 박열, 그리고 그와 동거한 ‘후미코’도 아나키스트였어요.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력과 제도에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중심의 비중심화’라는 말이 있는데, 세상의 중심에서 권력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변방에서 힘없는 이들에게 주목한다는 뜻이지요. 언제나 자동적으로 가련한 얼굴들에게 먼저 시선이 가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고난을 견디며 기꺼이 싸우겠다는 사람들이지요. 하필이면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에 매료되어 “우리 같이 삽시다!” 하던 후미코가 첫날밤에 벽에 붙인 동거서약엔 “동지로서 동거한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어요. 참 심장이 떨리는 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교우(交友)’를 넘어서 ‘동지(同志)’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 ‘동거同居’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서로를 동지로 여겨 ‘우정’을 나눌만 하다면, 그 교회는 진정 그리스도의 교회일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벗’이라 부르기로 작정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같은 뜻을 나누는 자매형제들의 공동체를 이루자는 게 도로시 데이의 영성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창립한 가톨릭일꾼운동에는 대표도 없고, 어떤 결정권자도 없이 일꾼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고, 진행자도 없이 함께 토론하며 방향을 잡아 가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동체였지요. 회칙도 규칙도 없는 ‘가톨릭 아나키스트’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아요. 교황군주제를 채택하고 권위적으로 작동하는 기성교회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지만, 자발적 가난과 그리스도교 평화주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특성은 사실상 교회 제도권보다 더 복음적이고 더 철저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구조에 저항했지만, 그 저항적 삶의 영적 의미를 찾는데 더 골몰했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에 민감했다는 점에서 다른 휴머니스트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그 공감과 연민과 행동의 동기는 늘 ‘하느님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액면 그대로 만나 뵐 수 없는 분이어서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자비를 헤아리곤 했지요.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보면 내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오늘 단순하게 내가 느낀 ‘연민’ 때문에 투신했던 사람들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입장이 바뀔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자기 결정권을 돌려드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심 없이 기꺼이 항구한 믿음으로 투신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내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그 순간에 예수님이 나를 통해 끝없이 부활하시고 강생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그분처럼 살 때에만 그분은 우리 가운데 현존합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 가운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고 머뭇거릴 때마다, 삶의 고비마다 고단하고 지쳤을 때, 도로시 데이는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나자렛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아마 그분도 이럴 때 나처럼 힘들었을 거야, 분명히.” 하고 말입니다. 그분에게서 위로받고, 그분처럼 살고 있다는 데서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견주어 가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의 불행과 노동과 어려움, 또한 희망과 기쁨도 나의 것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문정현 신부님처럼 “복음 때문에 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성인됨에 있다.”고 버릇처럼 이야기했는데, 성인이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일깨워준 사람이고, 인간적 사랑의 영역을 넓힌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구나.” 그렇게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나간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는,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내가 성인이 되고, 결국 나를 둘러싼 세계마저도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세상이란 물론 ‘하느님 나라’겠지요. 만인이 만인에게 형제이며 자매인 나라겠죠. 만인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평등한 평화를 누리는 나라겠죠.
[출처] 제1회 가톨릭일꾼세미나 강의, 2017년 7월 22일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