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우리 필요에 대한 응답 아니라 존재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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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우리 필요에 대한 응답 아니라 존재에 대한 답변
  • 김선주
  • 승인 2024.01.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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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성경은 전쟁의 책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한 단어로 단순하게 압축하여 말하면 ‘전쟁’입니다. 구약성경은 가나안의 토착종교와의 전쟁 이야기고, 신약성경은 로마제국과 하느님 나라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내적 갈등 요인은 ‘세계관’입니다.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정체성을 두고 다투는 ‘세계관 전쟁’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들은 우상입니다. 야훼 하느느님은 이 우상들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옹졸하고 편협하게 보일 정도로 우상에 대해 강박적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가나안의 신들은 모두 풍요와 재물과 관련됩니다. 현실적인 삶의 이해(利害)를 좇아 살려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 우상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욕망을 어떤 대상에 투사하여 그것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그 욕망의 기원(祈願) 의식(儀式)이 우상제의입니다.

우상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인간의 도구입니다. 우상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받는 장면에서 야훼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가 너에게 나에 대해 누구(어떤 신)냐고 묻는다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하라.” 수많은 신들의 제국인 이집트에서 신의 이름과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야훼의 대답은 인간과 우상 사이에 관계된 욕망의 카르텔을 한 방에 깨뜨려 버립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우주와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야훼는 인간의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는 신(우상)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밖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 안에 집요하게 자기 흔적을 남긴 야훼이스트(J문서)들의 신앙고백이며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하느님 말씀으로 알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 안의 우상을 깨뜨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또 하느님에게 나의 욕망을 투사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우주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와 우리의 절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비굴한 태도를 보입니다. 비를 내려달라고, 가축이 새끼를 많이 낳게 해 달라고,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이웃들이 떠나게 해 달라고, 내가 미워하는 놈들이 병들어 죽게 해 달라고, 제사를 지내며 우상 앞에 자기를 비굴하게 낮춥니다. 그것이 우상 제의입니다.

이런 태도는 인간과 사회의 지형을 형성합니다. 사람들은 타자와의 이해관계에서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를 낮추고 비굴하게 굽니다. 고전경제학에서 시장의 원리를 얘기할 때 거기엔 우상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시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얘기할 때, 그것은 ‘우상의 손’이었습니다. 우상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외부 수단이고 그 수단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세계를 우상의 제국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제국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출애굽은 인간 해방의 노정이었습니다. 나일강 하구의 비옥한 토지 소산물을 먹던 노예들을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는 사막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은 자살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대탈출이 아니라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이해할 수 없다며 모세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왜 사막으로 가려 하느냐?” 라고. 모세는 대답합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흘길쯤 광야로 가려 한다.”고. 미친 짓입니다. 비옥한 땅에서 열심히 농사해도 먹고 살기 힘든 판에 사막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건 미친 짓입니다.

사막은 동물적 감각으로 욕망을 탐하는 자들에겐 비현실적인 죽음의 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모양(image)과 형상(likeness)을 닮은 인간이기를 소망하는 자들에겐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 문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는 절대자를 만나는 광장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드리는 제사는 욕망과 삶의 외피를 깨뜨리고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가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사흘길”은 노예들을 구속하고 있는 제국의 문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도 광야(remote place)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고 광야로 나가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막으로 사흘길쯤 나아가는, 삶의 전환(life shift)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막으로 나아가기보다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 소산물을 먹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비굴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라 부르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목숨을 걸고 욕망을 깨뜨려 사막에서 자기 존재를 갱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매우 수준 높은 존재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망의 하수구에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걸하고 있습니다.

천상의 하느님을, 사막의 예수님을, 욕망의 하수구로 불러들입니다. 인간에게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급박한 것이 무엇인지 사막에서 깨달았던 선조들의 고백을 잊어버린 겁니다. 성경을 읽고 신학교를 다니고 수많은 성경공부를 해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눈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두 노예가 됐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의 종교라고 조롱합니다. 나약한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 말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왜 이렇게 저급한 종교가 되었는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진짜 하느님인가?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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