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정말로 영생을 바라는 것일까
[김건중 신부의 복음강해] 마르 10,17-30 또는 10,17-27(연중 제28주일 ‘나’해)
지난주 복음이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어”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도록 마련하신 혼인 계약의 아름다움과 그에 관한 하느님의 의도에 관한 내용(참조. 마르 10,6-9)이었다면, 이번 주 복음은 그렇게 형성된 가족일지라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상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혼인과 가정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상적인 길이라면, “나(그리스도)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마르 10,29) 실제 열두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그런 일들이 생겼던 것처럼 그 가정이 버려질 수도 있고,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마태 19,12) 하신 것처럼 그러한 부르심을 받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창세기를 인용하시면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마르 10,7 참조. 창세 2,24)이라 하셨는데, 마르코복음의 서두에서 우리는 유사한 문형으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예수님)을 따라나섰다.”(마르 1,20) 하는 의미 있는 내용을 듣는다. 어떤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가족을 이루고, 어떤 이는 “아버지를…버려두고” 떠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독신을 선택한다. 오늘 복음은 비교적 잘 알려진 복음이고 특별히 ‘성소聖召’와 관련된 내용의 강의나 강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목이므로 쉽고도 빨리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길 위험이 있는 성경 대목이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복음에 순응하는 마음으로 잘 읽어야만 한다.
1.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마태오나 루카 역시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지만 올해가 ‘나’ 해이므로 우리는 마르코복음을 따라가고 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마르 10,17)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길(일명 예루살렘 상경기)에 계시는데, “어떤 사람” 곧 익명이지만, 분명 유다인일 것이고 갈릴래아에서 맹활약을 하고 계시는 라삐와도 같은 스승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존경하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와서 우리가 전례에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듯이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이라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라는 말씀으로 ‘진정 네가 나를 선하다고 하는 뜻을 아느냐?’ 하시듯이 반응을 보이신다. “선하신”이라는 접두어는 ‘아가토스, ἀγαθός, agathós’, 곧 하느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이고 하느님만이 선善의 원천이심을 상기하도록 한다. 과연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여…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라는 것에서처럼 자비, 너그러우심, 자애, 진실, 용서, 은총,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선하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신다. 예수님의 선하심은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하여 조금씩 드러나다가 부활 이후에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하느님을 두고 “선하다”라고 표현할 때, 이는 “좋다”는 표현과 동일하다.(참조. 창세 1,4.10.12.18 등)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어떤 사람”은 유다인의 믿음에서 기본이랄 수 있는 죽음과 고통, 그리고 악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 “받으려면…”이라는 의미 있는 질문을 제기한다. 죽음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인간 존재 자체를 필연적으로 위협하는 이율배반이며 모순이고 불의이다. 인간은 생을 영위하면서 막연할지라도, 죽음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는 내면의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영생”을 스스로 획득하거나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러나 사실, 이 “영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선물이며 은총이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곧 미래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백성으로서 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수님 앞에 온 이는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질문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고, 아주 깊은 감정일지라도 그분을 믿고 사랑한다는 감정만도 아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하신 사랑의 명령은 삶의 양식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행동 방식이다.(참조. 요한 14,15 1요한 5,3) 전례나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섬기고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에게 탈출기 20,12-16(참조. 신명 5,17-20)이 전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간의 계약인 십계명 중에서도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계명, 곧 십계명의 후반부(“살인”-5계명 / “간음” -6계명 / “도둑질”-7계명 / 거짓 증언-8계명 / 부모공경-4계명)를 예로 들어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마르 10,19) 하신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은 “너희는…동족들…이방인들…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억눌러서는 안 된다.”(신명 24,14 참조. 집회 4,1) 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채거나 그로 인해 곤란해지지 않도록 하며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듯하다. 이 계명들은 생명과 가정의 존엄성과 소유권을 보호하고 정직한 사회를 건설하는 필수 규정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관계’와 관련하여 순서로 보아 십계명에서는 맨 첫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부모공경”을 맨 마지막에 놓으신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묻는 이에게 관계와 이웃에 대한 계명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신자들에게도 사뭇 의미가 깊다. “영생”, 곧 구원이 내 가족을 포함한 이웃이나 다른 이와의 관계에 좌우된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나 그분께 무엇을 바라고 믿는지를 거론하지 않으신다. 장차 우리가 받을 구원과 영원한 행복은 지금 여기, 내가 함께 살고 있는 형제나 자매들, 동료 인간들과 과연 사랑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사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로 판가름 된다. 그 누구도 “억눌러서는 안 되고”(신명 24,14),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20 레위 19,18) 하는 내용만이 우리 구원의 필수 불가결한 기준이다.
2. “가서 가진 것을 팔아…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 왔던 “어떤 사람”(마르코는 그저 “어떤 사람”이라고 하고, 마태 19,22는 그 “어떤 사람”이 “젊은이”였다고 하며, 루카 18,18은 그가 “권력가”였다고 한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마르 10,20)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상당히 놀랍다. 그 “어떤 사람”이 겸손하지 못한 태도로 거들먹거리면서 허풍을 떨고 있지나 않은지 마르코 복음사가는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마르 10,21)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간다. 원문에서 “ἐμβλέψας αὐτῷ ἠγάπησεν αὐτὸν, emblépsas autô egápesen autòn”이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를 깊이 사랑하시고 대견해하신다. 그리고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와서 나를 따라라, δεῦρο ἀκολούθει μοι, deûro akoloúthei moi!”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뿐만 아니라 소유가 있다면 그 소유를 나눔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재물은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나눔이 그 목표이다. 나누어보지 않은 자는 자기가 얼마나 가졌는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서…주고, 와서…따라라.”(마르 10,21)라고 단순 명쾌하게 4개의 명령어로 말씀하신다. 부자가 받은 초대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초대였다.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이라 하시는데, 유다 묵시 문학은 의인들의 선행이 하늘에 보물처럼 쌓인다고 표현한다.(마태 6,19-21=루카 12,33-34) 또한 마지막에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시는데,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운명을 같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임으로 결론이 난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부르심과 소명은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만이, 그리고 주님의 깊은 사랑을 얻은 이에게만 주님께서는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라고 복음은 전해준다. 사랑이 거부되면 슬픔만이 남는다. “재물”도 아니었고, “말씀”만도 아니며, 그 누구의 사랑도 아닌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얻었던 이가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슬퍼하며 떠나간다.”
그 사람은 사랑과 일치, 그리고 가진 것과 외로움 사이에서 선택과 식별할 기회를 맞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을 알 기회와 결정에는 이르지 못한다. 다가온 사랑에 문을 닫아 사랑받을 기회를 잃고 만다.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의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가해오면서 나 자신에서 벗어나 나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나아가도록 요청하고, 나의 수많은 가면을 벗어서 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에게 다가가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능동적인 사랑보다도 나에게 다가와 나에게 받을 것을 요구하는 수동적인 사랑은 저항에 직면한다. 수동적인 사랑은 저항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랑을 알고 싶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나를 개방해야 하고 나를 발가벗겨야 하며 나를 내어놓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진 것이 많았던, 아니 스스로 많이 가졌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은 끝내 사랑을 얻어 사랑을 체험할 기회를 받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며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3-24)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얻기 위해서 돈, 부富, 권력과 같은 것이 유혹하는 다른 사랑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이러한 것들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고 충분하므로 다른 이나 다른 무엇으로부터 사랑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 참사랑을 분별할 줄 모르게 된다. 이에 제자들은 “놀라서…서로 말하였다.”(마르 10,26) 예수님의 측근이었고 이미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이들마저도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다는 듯이 논란을 벌인다.
3.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맏이 격인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집과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 자식이 있었다면 그 자식마저)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며 “나선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마르 3,14) 위해서 선하고 거룩한 지향으로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필리 3,7) 하던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하고 대답하신다. 여기서 『‘남편이나 아내’라는 목록은 빠졌다. 예수님께서는 ‘단일혼’을 말씀하셨으므로 마땅한 일이지만, 이는 아마도 베드로가 아내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다녔다(참조. 1코린 9,5)는 사실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여 볼 수 있다. “내세에서는…”이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현세의 보상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보상은 언제나 종말의 보상이다.(참조. 루카 22,28-30=마태 19,28) 제자직에 대한 완전한 보상은 저세상에서 베풀어질 “영원한 생명”이다.(정양모)』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하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오늘날 현세에서는, 심지어 교회에서마저 자기가 충분히 꾸릴 수 있는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다.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 생활은 단순히 가정을 포기한다는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될 필요도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인간적인 가정은 아닐지라도 단순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결핍을 넘어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로서 살아가는 ‘충만한’ 가족애와 가정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예수님 몸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하고 말씀하셨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혈육의 가족은 잃었을지라도 새로운 예수님의 가족을 얻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 안에 형제요 자매들이 나누는 사랑의 결실을 맛보며 “스스로 고자가 되어” 독신을 살아간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라는 이유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결정적인 포기를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다른 이를 섬기며, “박해”를 받으면서도 “영원한 생명”만을 바라고 살아간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미에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31)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첫째도 없고 꼴찌도 없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얻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아멘!
[출처] benji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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