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왕이냐?

김선주 칼럼

2024-09-29     김선주

사람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물이 학습받지 못하여 인격성이 없고 지성과 교양을 잃을 때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에 속하지만 짐승에 속할 때도 있습니다. 동물이란 말은 생물학적 분류에 대한 지시어이고 짐승이란 말은 인격적 분류에 대한 지시어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로마의 황제 권력을 짐승(데리온)에 빗대어 말합니다. “내가 또 보니, 푸르스름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의 이름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저승이 따르고 있었습니다.”(묵시 6,8)라는 구절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살상과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 제국 권력을 짐승의 야만성으로 묘사합니다. 사람이 가진 힘에서 인격과 지성을 빼면 짐승의 야만성이 됩니다.

교만이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인격과 지성이 사라진 자리에 ‘나’만 남게 되면 사람이 짐승이 됩니다. 교만은 사람의 어떤 특수한 성향이나 태도가 아니라 자기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 내가 세상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게 교만입니다. 다윗은 위대한 믿음의 선진이었습니다. 성서에서 그는 왕으로서의 권위보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으로서의 믿음의 신실함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윗을 다윗이게 한 것은 왕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서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윗조차도 교만이라는 짐승이 몇 번 찾아옵니다.

역대상 16장 27절에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 난 후 제일 먼저 찬양단장 아삽을 시켜 곡을 만들어 부르게 한 노래 중 한 소절입니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도다.” 그런데 여기서 ‘존귀와 위엄’, ‘능력과 즐거움’은 권력으로부터 파생되는 아우라입니다. 여기서의 즐거움이란 권력자에게 부가되는 영광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쾌감을 말합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권력자를 중심으로 질서가 이루어진 왕궁에서 자신의 존귀와 위엄, 능력과 즐거움을 확인합니다. 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인 전략을 모색합니다. 그것이 역대상 13장에 나오는 법궤 이전 실패 사건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취임하고 한 일이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느님의 법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믿음의 행위처럼 보였지만 다윗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 퍼포먼스였습니다. 법궤를 자신의 성에 둠으로써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동시에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옮기는 퍼포먼스에 온 나라 백성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하지만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궤 이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법궤 이전은 정지되었고 다윗의 권위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심지어 하느님과 다윗의 관계가 의심받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 다윗은 다시 법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시고 올 계획을 세우고 이에 성공합니다. 그 때 불렀던 찬양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역대상 16장 27절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도다.”입니다. 다윗이 법궤 이전에 실패할 때의 마음엔 교만이라는 짐승이 있었습니다. 그 짐승은 다윗의 마음에서 이렇게 노래했을 것입니다. ‘존귀와 위엄이 왕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왕의 처소에 있도다’ 왕이 된 다윗의 무의식 가운데 짐승의 노래가 불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짐승은 세계의 근본과 질서를 파괴하고 자기 본능에 충실합니다. 권력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묵시록에서 로마의 황제를 짐승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하느님의 법궤를 옮기는 거룩한 믿음의 행위로 위장한 퍼포먼스를 벌일 때, 거기에 짐승의 논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짐승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습니다. 다윗은 그 때 깨닫고 보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짐승의 모습을.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고백과 찬양은 귀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짐승의 모습을 보고 깨달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계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 세계의 질서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존귀와 위엄은 세속권력이 아니라 우주의 지평 가운데 편만한 그 분의 숨결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구절은 실존적으로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과 ”나는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가치판단의 기준도 아닙니다“라는 답변이 내재돼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지구에 세들어 사는 미생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미생물에 불과한 인간이 절대자처럼 행세하며 지구를 폐허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너무 절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에서 인간은 이제 존재가 아니라 권력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긍정의 대상으로 보고 사람의 이성(理性)을 존엄의 영역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근대의 세계관은 탁월한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선을 넘어버렸을 때 사람은 짐승이 되어버렸습니다. 과학과 기술로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따위는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만이 절대선이고 사람이 우선인 세계에서 더욱이 개인의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 때문에 이 세계는 방향과 질서를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으로, 사회적 공평과 정의를 말씀한 하느님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으로 축소되고 왜곡됐습니다. 우주와 온 생명에 호흡을 불어넣으시고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는 절대자가 아니라 나의 기도를 들어주고 내 인생의 성공을 위한 조력자로 바뀐 것입니다. 하느님을 옹춘마니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세계의 중심이 됐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하여 본문을 읽어봅니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도다.”

교만으로 인해 실패한 뒤 바뀐 다윗의 세계관입니다. 존귀와 위엄은 나에게 있지 않으며 인생을 살아갈 능력과 행복의 조건도 나에게 있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그 모든 게 하느님이라는 절대자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세계관에서 하느님의 세계관으로 변화하는 걸 회개라 합니다. 이 세계가 이토록 뜨거워진 이유는 내가 왕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네가 왕이냐?’ 다윗은 실패와 절망을 겪고 난 뒤이렇게 답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이 왕이십니다“ 오늘 다윗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왕이냐?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