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람들은 왜 서울 순대만 좋아할까?
김선주 칼럼
야, 이런 걸 어떻게 먹냐? 나름 성의를 다해 의미 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나에게 친구가 한 말이었습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난 뒤 군대 동기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역에 마중 나갔습니다. 대전역 앞 중앙시장에 가면 시장통 바닥에 앉아 잔술과 순대를 파는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땐 거기가 대전의 명물 코너였습니다. 가짜 순대가 아니라 돼지의 창자에 선지와 야채를 넣은 진짜 순대를 파는 곳이었습니다.
시중에 파는 순대는 거의가 ‘식용 비닐’이라 불리는 콜라겐 케이싱으로 만들어진 유사 순대입니다. 나는 그 유사 순대를 먹을 때 마지막까지 분해되지 않고 입안에 비닐처럼 씹히는 느낌이 싫습니다. 그래서 그건 먹지 않습니다. 고무줄 같은 당면이나 찹쌀이 가득한 그것들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경험한 가짜입니다. 나에겐 어릴 적 동네에서 아저씨들이 떠들썩하게 모여 돼지를 잡고 내장을 분해하여 선지와 야채를 넣고 끓인 것이 순대의 오리지널리티였습니다.
순대의 원래 맛을 선물하고 싶었던 나의 의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가 먹은 순대가 진짜 순대라고 우겼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을 떠나본 적이 없는, 자신이 먹었던 유사 순대를 진짜 순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름 사유할 수 있는 명문대 문과생이었던 그 친구의 세계관에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의 오리지널리티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많이 놀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순대가 돼지의 창자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생명을 가진 동물의 창자를 적출하여 그의 피와 야채를 채워 삶아낸 것이 순대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순대는 마치 공산품처럼 인위적인 제조 공정을 거친 식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런 식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그동안 먹었던 순대에 대한 인식과 세계관을 수정해야 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세계관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걸 그 때 알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말한 ‘서울 순대’라는 것에 대해. 그가 순대의 원형이라고 생각한, 비닐처럼 씹히는 껍데기 속에 당면이나 찹쌀을 꽉 채운 유사 순대의 사이비성에 대해. 어쩌면 우리는 사이비성에 속하여 있으면서 우리가 처한 시간과 공간, 사회적 형태가 가장 올바르고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잠재된 사이비성을 정상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올바름, 타당함, 정상, 주체, 정통 같은 말들은 그름, 부당함, 비정상, 객체, 이단 같은 말들의 대립항입니다. 전자는 후자를 기반으로 성립합니다. 후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정상성을 취득합니다. 유사 순대가 진짜 순대를 부정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모태신앙이라는 말을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고 살아온 사람을 말합니다. 모태신앙이란 말은 신앙의 뿌리가 정통 기독교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순혈성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울타리를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이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정말 정상성을 갖는지 반문해 봅니다. 한 번도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사유해보지 않은 신앙이 정상성을 갖는지 반문해 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기껏해야 6,70년 정도 배워온 신앙이 2천 년 전의 예수가 요구한 그 신앙과 부합할 수 있는지 돌아봅니다. 적어도 예수와 나 사이엔 2천 년의 시간의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 수많은 교회사적 사건과 정치적 사건이 얽히면서 성서 해석과 이해, 그리고 교리적 변천이 있었습니다. 지금 내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 모태로부터 왔기 때문에 정상이라고 믿는 것은 유전학의 패러다임입니다.
우리는 서울 순대를 먹으면서 돼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끼에서 젖을 물리고 구정물에 주둥이를 처박고 게걸스레 밥을 먹으며 똥오줌을 싸는, 살아서 꿀꿀대는 돼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에 생명에 대한 윤리나 감정 따위는 없어야 하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순대를 먹을 순 없겠지요. 순대는 순대일 뿐 그 무엇도 아니어야 된다는 간편한 사유, 그것이 우리가 믿는 종교는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한 번도 서울을 떠나서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이 서울에서만 먹어본 순대가 순대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한 번도 교회를 벗어나서 사유해보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는 예수가 과연 2천 년 전 우리에게 진리를 전해준 예수가 맞는지 돌아봅니다. 교회가 서울 순대처럼 세련되고 간편한 음식만 탐하다 보니 교회 사람들은 서울 순대만 좋아합니다.
시장통에 좌판을 깔고 있는 할머니의 순대가 생각나는 날들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