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정국, 우리 현실과 이스라엘은 다르다

[한상봉 칼럼] 손희송 주교의 성모승천 대축일 메시지를 다시 읽는다

2024-08-20     한상봉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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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광복절 기념사 어디에서도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비판과 역사왜곡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일본을 미래 한국의 동반자로 여겨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의정부교구의 손희송 주교님이 ‘2024 성모 승천 대축일 교구장 메시지’를 통해 “파스카 축제의 정신으로 광복절을 지내면 좋겠다”고 발표한 날은 8월 6일이며, 마침 국가보훈부가 기습적으로 김형석 교수를 신임 독립기념관장으로 발령한 날입니다. 이 때문에 이종찬 광복회장이 ‘정부 안에 일본의 밀정들이 들끓고 있다’고 성토하고, 국민들이 윤석열 정부가 또렷한 ‘친일정권’임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현 정부의 요직에는 친일·친독재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국가교육위원회, 진실과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의 기관장이 모조리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친일파’라고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습니다.

이 마당에 손희송 주교님은 “파스카 축제의 정신으로 광복절을 지내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주교님이 말하는 파스카 정신이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데에 인색한 일본에 대해 밉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더라도 거기에 머물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로 지내자고 합니다. 손희송 주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날은 마치 우리의 광복절 같은 날”이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해 해방절 축제를 지내면서 “자기 조상들을 괴롭혔던 이집트에 대한 원망과 미움보다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기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비유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조상들을 구해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면서 아울러 그런 능력의 하느님께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드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얼핏 불행한 과거보다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는 아름다운 언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히브리성서를 단편적으로 읽은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절에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의지를 확인하고 그분의 백성임을 기뻐하는 이유는, 이미 이집트의 잔재를 청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시는 과정에서 이집트 제국의 군대를 모조리 홍해바다에 쳐넣으셨습니다.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숫송아지를 세우고 경배드리자, 모세는 레위지파 사람들을 모아 우상에 절한 자들을 모조리 척살했습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절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제국의 군대를 해체시키고, 제국을 흠모하는 자들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안팎으로 이집트의 잔재를 청산했기 때문에, 온전히 하느님께 미래를 맡겨드릴 수 있었고, 그 결과 ‘왕이 없는’, ‘더 이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라는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희년 선포’ 안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도 눈앞에서 버젓이 확인하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광복절을 일흔아홉번씩 기념하면서도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해방 이후 친일잔재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위세를 부리던 군인과 경찰들이 온존하고, 해방공간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시킨 이승만을 국부로 섬기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훼손하고 건국절을 운운하는 이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제국의 밀정들이 아직 살아서 나라 곳곳에서 펄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 번도 전쟁범죄에 대해 진솔한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손희송 주교님은 “우리 자신도 회심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일본 정부와 고위관료들은 진정한 회심에 이른 적이 없습니다.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언제든 군국주의로 회귀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과거사를 묻어 버리려는 시도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우리의 뼈아픈 ‘기억’을 삭제하는 짓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손희송 주교님은 세계평화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일본은 물론 북한을 포함한 전 세계의 통치자들이 ‘회심’하기를” 기대합니다. 항상 강조점은 뒷말에 있는 법이어서, 이 글이 제게는 ‘일본보다 북한’의 회심을 촉구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적은 북한이라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한반도의 전쟁위협이 높아진 현실이 윤석열 대통령 때문이라는 사실을 주교님은 모르고 계신 모양입니다. 의정부교구에는 민족화해센터와 참회와속죄의성당이 있습니다. 교구민들 가운데는 남북관계에 예민한 분들이 많고, 이산가족의 아픔과 전쟁의 위협 때문에 늘 불안한 마음을 갖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구장으로서 이 지역 교구민들을 생각한다면,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모든 행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손희송 주교님의 메시지 어디에도 일본 극우세력에 대한 경고나 전쟁위기에 대처하는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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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답답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어쩌면 주교님의 ‘공중부양 화법’에서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메시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8월 15일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중요한 두 사건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가 35년간의 일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면서 해방의 기쁨과 의미를 되새깁니다. 다른 하나는 성모 승천입니다. 이날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사셨던 성모님을 하늘에 불러올려 영광스럽게 하신 구원 사건을 기념하면서 기뻐합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은 이 두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에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구원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남의 이야기 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광복절에 대한 ‘가톨릭판’ 위키백과 사전 설명 같습니다. 평생 학자로서 지내셨기 때문에 이해는 되지만, 이 메시지에 일인칭 ‘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광복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한 나라의 주교라면, 이렇게 메시지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에 광복절을 함께 기념하면서,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여러 교형자매들과 더불어 이날을 기뻐합니다. ...”

학자들은 남의 글을 인용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당신 생각은 뭔데?”하고 물으면 당황합니다. 사목자는 학자와 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내가 본 우리 현실 속에서 나는 광복절에 대해서, 성모승천대축일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교구민들에게 꼭 필요한 현실적인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내 몸이 실리지 않는 말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흩어지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번 메시지의 결론이 허망한 것입니다. 주교님은 “성모님은 아직 천상을 향한 순례 여정에 있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열렬히 전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회심하여 참된 평화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성모님처럼 하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기로 합시다.”라고 말을 매듭짓고 있습니다. 손희송 주교님은 ‘천상여정에 있는’ 교구민들에게 ‘하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덧붙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접으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강생하셨습니다. 고난받는 ‘구체적인’ 이 땅에서 희망의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주교님은 광복절에 교구민들에게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사도들에게 두 분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참고자료]

우리 모두의 회심(回心)을 기원하면서
-의정부교구 손희송 주교, 2024 성모 승천 대축일 교구장 메시지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 마음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성모님도 그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그분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7)라고 노래하셨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8월 15일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중요한 두 사건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가 35년간의 일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면서 해방의 기쁨과 의미를 되새깁니다. 다른 하나는 성모 승천입니다. 이날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사셨던 성모님을 하늘에 불러올려 영광스럽게 하신 구원 사건을 기념하면서 기뻐합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은 이 두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에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구원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시는 분’(루카 4,18)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구원의 하느님을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체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이집트에서 파라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 신음하고 호소하는 목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파라오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기적들을 보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이스라엘 백성을 붙잡아 두려고 했지만, 맏이가 모두 죽는 일이 일어나자 결국 승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심으로써(루카 1,51)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날은 마치 우리의 광복절 같은 날로서 그들은 매해 그때가 되면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해방절 축제는 자기 조상들을 괴롭혔던 이집트에 대한 원망과 미움보다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기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조상들을 구해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면서 아울러 그런 능력의 하느님께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드리는 믿음의 축제였던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매 주일 신약의 파스카 축제인 미사에 참례합니다. 그런 만큼 우리 역시 파스카 축제의 정신으로 광복절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데에 인색한 일본에 대해 밉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더라도 거기에 머물지는 맙시다. 그보다는 성모님의 전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 그리고 그런 능력의 하느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돌보아 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굳건히 다지는 날로 지내도록 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에게 시련을 주었던 이집트를 포함하여 다른 민족들도 미래 언젠가는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기를 기대하고 희망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기대와 희망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써 하느님께서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일본은 물론 북한을 포함한 전 세계의 통치자들이 ‘회심’하기를, 그래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억압하고 침공하는 잘못에서 돌아서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 자신도 회심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저지르는 잘못, 곧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억압하는 잘못’은 바로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억압하는 잘못’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그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필요합니다. 회심한 사람은 성모님처럼 자기 뜻과 계획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함께 걸어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루카 1,79)입니다.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상 영광에 이르신 성모님은 아직 천상을 향한 순례 여정에 있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열렬히 전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회심하여 참된 평화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성모님처럼 하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기로 합시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